소설리스트

낙화연가 (42)화 (42/126)

의문이 도를 넘어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점점 이상하게 변해 가는 내 얼굴을 보며 대군은 작게 웃음을 지었다.

남자는 손을 뻗어 꽉 옷자락을 움켜쥐고 있던 주먹을 감쌌다. 원녕의 손길에 힘을 풀자 그는 내 손을 어루만지며 손톱자국이 새겨진 손바닥을 속상하다는 듯 살살 문질렀다.

“말했잖니. 할바마마께서는 본디 대륙 정복에 관심이 많으셨다고. 그분의 눈에는 아바마마인 원휘왕이 전쟁을 일으켜 나라를 점령할 배포가 없다는 게 보였을 거다.”

‘돌아가신 양반이라고 너무 험담이 심한 것 같은데.’

서슴없는 말에 오히려 내가 당황한 나머지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대군이라고 하나 선왕을 욕보이는 것은 대죄가 될 수 있음에도 단우결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오히려 빨갛게 된 내 손바닥이 더 신경이 쓰이는지 입매를 굳히며 손을 조몰락거렸다.

“그렇다고 그 책들을 남겨 두자니, 아바마마께 부담이 돼 예기치 못한 부작용으로 이어질까 두려워하셨단다. 정확하게 말하면 내게 불똥이 튀실 걸 염려하셨어. 결국 모두가 보는 앞에서 책을 태우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허면 네 권의 책들은 지금….”

“나에게 있지.”

단우결의 대답에 가볍게 미간에 빗금을 그었다. 대륙평책과 결을 같이 하는 네 권의 전서가 원녕에게 있다니. 곧 한 가지 결론에 다다랐다.

“홍종대제의 유지를 대감께서 이어받으신 거군요.”

“그래. 내게 정복제로서의 꿈을 심어 주신 것도 할바마마이시니까.”

정복제. 단어가 내포하는 공포에 입 안이 따가웠다. 수많은 목숨과 피가 수반되는 명예였다.

“그러니 네가 불태웠다는 그 책은 사실 홍종대제께서 내게 주시기 위해 그토록 애타게 찾으신 거란다. 이게 진실이다.”

“화, 황공합니다.”

황급히 그의 손바닥에서 내 손을 빼내고는 깊이 허리를 숙였다. 일단은 사과를 해야 했다.

원휘왕에게는 무심한 아버지였을지 모르나 단우결에게는 각별했던 홍종대제다. 그런 황제가 대군을 위해 그토록 찾았던 책을 홀랑 태워 놓고서 죄를 시인하지도 않고 오히려 갖은 거짓말로 사람들을 속였으므로.

“황공은 됐고, 나는 성은이 더 좋은데.”

단우결은 왠지 조금 웃음이 묻은 것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일일이 죄를 열거하지 않아도 그는 사죄의 의미를 다 안다는 듯 다정한 눈을 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분명 큰 의미가 있는 책일 텐데 쓴소리 한 번이 없었다. 오히려 죄책감에 내가 더 몸 둘 바를 몰랐다.

“아, 성은이 망극합니다. 진실이 무엇인지 알고 계셨음에도 모두가 있는 곳에서 소녀의 죄를 덮어 주셔서.”

“네 앞에서 한없이 약해지는 게 나 이거늘 어찌 그럴 수 있겠니. 네 얼굴이 흐려지면 내 마음에서는 피가 흐르니까.”

과분한 고백이었다. 주이환이 다녀간 이후 적극적으로 구애를 해 오기 시작한 단우결은 거침이 없었다.

그는 다시 내 손을 가로채듯 잡았다. 그러고는 손바닥을 편 뒤 자신의 손을 깍지에 하나씩 끼웠다. 마치 짝이 잘 맞는 경첩처럼 꽉 맞물린 것을 보고 남자는 뿌듯한 미소를 띠었다.

“책과 너, 둘 중에 무엇이 더 소중한지를 따져 보면 아주 쉬운 일이지. 화 같은 건 진즉에 풀렸단다.”

“하지만 어딘가 편치 않은 기색이십니다.”

단우결의 입매가 다시금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초조한 기색을 감추며 주저하듯 입을 뗐다.

“네가 그 책을 태운 것이 걸려서 말이다. 어지간히 네 심기를 건드렸다는 뜻인데.”

“소녀는 다만 전쟁이 두려운 것뿐입니다. 성심을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게 거짓말을 하는구나, 산아.”

대군은 매섭게 눈을 반짝였다. 일말의 거짓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표정에, 나도 모르게 눈꺼풀이 가늘게 떨렸다.

“마음에 드는 책을 소장하길 좋아하는 네가 불태우기까지 했다는 건 책에 담긴 모든 것을 부정하고 싶어서라는 걸 안다. 본래라면 내 것이 되었어야 할 대륙평책을 네가 그리도 싫어하는데, 신경 쓰지 말라는 건 너무 섭섭한 말 아니니.”

서운하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 듯 남자의 얼굴은 안개가 낀 것처럼 흐렸다. 그렇게까지 싫어하는 건 아니라고 입에 발린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꽉 붙들린 손 때문인지 거짓을 고하기가 어려웠다.

긴장 때문에 맞닿은 손바닥 사이로 땀이 배어들었다. 거짓을 고할 수 없다면 남은 건 정공법뿐이었다.

“소녀가 대감을 거절한 것 같아 마음이 상하신 건 아니고요? 책의 내용이 곧 대감의 뜻이기에, 책을 태운 소녀가 대감 역시 밀어내는 것 같아서.”

원녕은 순간 정곡을 찔린 듯 숨을 집어삼켰다. 흐릿했던 얼굴이 한순간에 얼어붙은 것처럼 차가워졌다. 막연하게 여겼던 내 거절을 확인받은 것처럼, 단우결의 표정은 분노로 조금씩 어두워졌다.

“나라고 전쟁이 좋은 것은 아니란다. 하지만 잃어버렸던 내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상 제국에 넘어간 남동쪽 땅 말씀이십니까. 누굴 위해서요?”

“이상한 말을 묻는구나. 내 백성을 위해서지.”

“오히려 그 땅의 백성들이 상 제국으로 귀속되면서 더 풍요로운 삶을 사는 건 아십니까?”

“적국의 곡물로 배불러 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어. 충심 어린 백성들은 다시 제후국으로 영입되기 전까지 차라리 배가 곪기를 자처할 거다.”

단우결에게는 한 톨의 의심도 없었다. 적어도 무엇이 백성을 위한 길인지 한 번 정도는 고민해 볼 줄 알았는데. 너무나 의지가 확고한지라 되레 나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소녀 역시 모든 무력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외부에서 쳐들어오는 세력이 있다면 그걸 막는 것 역시 무력이고 때로는 전쟁이 될 테니까요. 하지만 이쪽이 먼저 나서는 정복 전쟁은 다릅니다. 타국을 점령한다 해서 당장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나아지는 것도 아니에요. 지금 이 나라에 필요한 건 땅덩어리가 아니라 제대로 된 국정이니까요.”

“자원이 풍부한 나라를 점령하면 백성들의 살림살이도 좋아지기 마련이란다. 내사를 보강하는 것도 중요하다만 그래서는 현재에 안주하는 것이 되어 버리지 않니.”

답답함에 이마를 짚었다. 우리는 전혀 다른 가치관을 따르고 있었다. 혹은 둘 다 맞는 말을 하는 걸지도 모른다. 다만 접근 방식이 완전히 다를 뿐이지.

‘그리고 이 간극은 왠지 절대 좁히지 못할 것 같은데.’

처음으로 벽을 두고 이야기한다는 말이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있었다. 원녕 대군은 무척 완고했고, 오로지 전쟁을 통한 국력 확장이 자신의 모든 목표인 것처럼 굴었다. 단단한 그의 얼굴은 바늘 하나도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몹시 빡빡했다.

“네가 아무리 싫어도 이것만은 양보할 수 없겠구나, 산아. 내 꿈은 상 제국뿐만 아니라 대륙을 점령하고 통일하는 것이란다. 그게 내 명예고, 또한 가장 존경했던 할바마마의 유지이기도 해.”

“대감의 명예에 이 나라의 백성은 과연 있습니까.”

중얼거리는 말끝에 단우결의 대답은 없었다. 어느새 저녁노을이 지고 있었다. 노을이 그의 머리와 얼굴을 붉게 적셨다. 마치 사람의 피를 뒤집어쓴 것처럼 아찔했다.

“당연하지 않니.”

한참 뒤에 입을 연 남자의 얼굴엔 짙은 웃음이 감돌았다. 애석하지만 그 웃음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 파리도 미끄러질 것 같은 아름답고도 잘 만들어진 미소. 억지로 무언가를 꾸며낼 때 쓰는 가면이었다.

순간 엉뚱하게도 아버지가 말했던 ‘원휘왕의 선택’이 떠올랐다. 더불어 왜 아버지가 그토록 단우결의 즉위를 반대했는지도 어느 정도 납득이 됐다. 어쩌면 원휘왕은 제 아들의 저런 전쟁욕을 보았기에, 지금의 함공왕을 왕세제로 선포했는지도 모르겠다.

‘만약 내가 원휘왕이었다면 과연 원녕을 왕세자로 삼았을까.’

어느새 가슴에서 피어난 불씨는 쉽게 꺼질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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