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화연가 (43)화 (43/126)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아버지는 3대에 걸친 갈등 상황을 모두 알고 있었는지, 단박에 홍종대제의 저의를 유추해 냈다.

그는 머리가 아픈 듯 가만히 이마를 짚었다. 아버지의 표정은 무척 복잡해 보였다. 어딘가 딱한 목소리로 남자는 천천히 입을 뗐다.

“나 역시 대군의 야망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나 한편으로는 안타깝다고 생각한단다. 어린 대군이 궁에서 기댈 자는 제 할아비밖에 없었거든.”

“무슨 말씀이세요?”

“어른이 아이를 이용하는 것만큼 쉬운 것이 어디 있겠느냐? 홍종대제는 어린 대군의 뛰어난 자질과 명예욕, 권력욕을 알아본 거다. 그 때문에 자신이 이루지 못했던, 혹은 감춰야 했던 정복제의 꿈을 대군에게 심은 것이겠지. 원녕 대군에겐 왕으로서의 자질이 독이 된 셈이다. 뭐, 반대로 자질이 없이 왕이 된 원휘왕 역시 애석한 팔자이긴 하다만.”

아버지는 안타깝다는 듯 짧은 한숨을 쉬었다. 3대에 걸친 왕을 모신 가신답게 세월이 스친 그의 얼굴은 무척 고단해 보였다. 마치 단우결이 지금과 같은 사상에 젖은 것에 그의 탓도 있다는 듯이.

“하지만 아버님. 사람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의지가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그것도 큰 힘이 있는 자에게 반복해서 같은 말을 들으면 세뇌가 될 뿐이다. 인간의 의지를 바라는 것은 과욕이야.”

“어려서는 세뇌당했겠지만 성인이 되어서는요? 대군께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습니다. 자신을 반성하고, 혹은 다르게 생각할 기회와 지위가 있었지요.”

“…하긴. 왕의 자질에는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도 있을 테니까.”

“예. 나라의 명예를 위하는 길에 전쟁을 택한 것은 오롯이 자신의 선택입니다.”

‘그리고 소녀는 그 선택을 절대 지지하지 않아요.’

마지막 말은 속에 묻은 채 단단한 눈빛을 굳혔다. 생각보다 태도가 완고해 보였는지, 아버지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대군에 대한 평가가 무척 박해진 것 같구나.”

“소녀는 대군을 싫어하는 게 아닙니다. 좋은 점도, 본을 받고 배울 점도 아주 많이 갖고 계시지요. 하지만 정복 전쟁을 통한 국력 강화만큼은 동의할 수 없습니다.”

말을 마치고 나자마자 이상한 느낌에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고 보니 왜 자신이 직접 전쟁을 치를 것처럼 말한 거지?’

함께 담소를 나눌 때 그의 태도를 다시 떠올려 보니 의심이 더욱 확실해졌다. 대군의 목표가 정복 전쟁이라고 해도 당장 이룰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왜 그는 내게 ‘꼭 그렇게 하겠다’는 확신을 내보인 것일까.

표정이 흐려진 나를 두고 아버지가 궁금한 듯 입을 열었다.

“갑자기 왜 그러느냐?”

“사교 모임이 끝난 후 대군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전쟁에 대한 의지를 너무 과도하게 펼치신 것 같아서요. 마치….”

말꼬리를 늘리며 단호한 의지가 가득한 원녕의 표정을 떠올렸다. 의지라기보다는 미래 계획에 가까웠던 그의 포부.

“자신에게 전권이 있는 것처럼요. 만에 하나 출정한다고 해도 금상께서 바로 허락을 내려 주시는 것도 아닐 텐데.”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아버지를 바라보자 그의 얼굴은 조금 전보다 수심이 한층 더 깊어져 있었다. 생각의 늪에 빠진 것처럼 아버지는 습관처럼 책상을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폐하의 시름이 깊어질 것 같구나. 왕권에 도전하는 대군이라니.”

“예? 에이. 아버님. 무슨 도전입니까. 그냥 포부이겠지요.”

‘설마’라는 얼굴로 가볍게 웃으며 말했지만 아버지의 얼굴에는 조금의 웃음도 없었다. 얼굴을 구기고 있는 아버지 때문에 덩달아 나 역시 미소를 유지할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이라 폐하께서 후사에 더욱 힘을 쏟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세자를 세워야 대군부를 경계할 수 있으니. 후궁을 조금만 일찍 두셨어도 지금쯤 후사 하나 정도는 보셨을 텐데.”

“그래도 순빈께서 회임을 했으니 왕자를 순산한다면 나라의 정세도 안정되겠지요.”

여전히 그의 말에 걸리는 것이 많았지만, 일단은 위로하듯 말을 꺼냈다.

“그래. 첫 회임이니 왕궁에 폭풍우가 없어야 할 텐데 말이다.”

그는 왠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책상 위에 차를 한 잔 입에 머금었다.

다 식어 버린 찻물이 떫어 가늘게 인상을 썼다. 아니, 그의 마음을 씁쓸하게 만드는 건 현재 나라 정세인지도 몰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