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직하지만 의지가 엿보이는 말이었다. 그는 화를 억눌러 참고 있었다. 임금의 머릿속에서는 필시 해완의 아버지인 독고승무가 가득 차 있을 것이다. 가주의 얼굴을 봐서 당장 해완을 베지 않는 게 그의 최선인 것 같았다.
평우찬의 화가 한계치를 넘기기 전에 어서 상황을 역전 시켜야 했다. 나는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디디며 입을 열었다.
“황공하오나 폐하, 독고 세녀가 귀빈 마마께 홍화차를 진상한 것은 유산을 바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잉태를 돕기 위함이었나이다.”
그러나 왕은 내 쪽을 한 번 흘끗 볼 뿐, 여전히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남자는 내 말솜씨를 잘 알고 있었기에, 이번에도 임기응변으로 죄를 넘어가려 한다고 오해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절대 없는 죄를 해완이 뒤집어쓰게 만들 수는 없어.’
결심을 굳힌 뒤 여전히 우리를 불신의 눈으로 쳐다보는 사람들을 향해 말문을 뗐다.
“귀빈께서는 평소 몸이 차고 달거리 주기가 부정확해 고민이 많으셨습니다. 하여 독고 세녀가 홍화차를 진상한 것이지요. 홍화차는 혈액순환과 배농을 도와주니까요.”
“맞습니다. 하지만 소녀는 귀빈 마마께 차를 진상할 때 이 말씀을 꼭 드렸을 겁니다. 절대 임신 중에는 이 차를 드시면 안 된다고요.”
평우찬의 싸늘함에 기가 눌렸던 해완도 한마디를 거들었다. 제 일인데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겁에 질린 얼굴을 하고서도 침착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회임했을 때 홍화차를 자주 드시게 되면 과도하게 피를 돌게 해 하혈이 잦아지고, 이내 유산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증좌는.”
함공왕이 건조하게 묻자 해완은 왕이 있는 쪽으로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소녀는 언제나 차를 선물할 때 음용법을 다관 상자 안에 함께 넣어 둡니다. 귀빈 마마께도 그리했고요. 음용법에는 언제 마시면 좋은지, 언제는 피해야 하는지 등을 적어 두었나이다.”
“한 번이라도 독고 세녀에게 차를 선물 받아 본 적이 있는 자라면 알 겁니다. 폐하께서도 독고 가주를 통해 차를 진상 받으신 적이 있다면 기억나시겠지요.”
임금은 내 말을 듣고는 가만히 생각에 빠졌다가, ‘흠’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그의 얼굴을 쳐다봤을 때 우연히 시선이 마주쳤다. 들여다본 눈에서는 긍정을 찾을 수 있었다.
곧 왕의 수려한 얼굴이 빠르게 굳었다. 해완의 말을 인정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뒤따라오는 의심이 생기니까. 바짝 마른 나무처럼 서걱대는 표정이, 꼭 불씨라도 날아 분다면 곧 활활 타오를 것처럼 메말라 있었다.
“그대들의 말이 진실이라면 진 귀빈이 받은 다관에도 홍화차에 대한 음용법이 있었을 것이고, 귀빈 역시 임산부는 홍화차를 먹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았다는 게 된다.”
순간 장내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냉막해진 공기의 틈에 왕의 목소리만이 고요하게 울렸다.
“즉, 일부러 순빈을 유산시키기 위해 알면서도 차를 보냈다는 게 되지.”
함공왕의 눈에 살점을 떼먹는 사자처럼 핏발이 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