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화연가 (54)화 (54/126)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싶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가 이내 긍정했다. 확실히 주이록은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함공왕의 탄신제 때 타국의 사신들 사이에서도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거나, 연회장에서 위압감을 뿜어내던 모습을 떠올리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첫날 별궁에서 저를 대하는 태도를 보셨지요? 표정은 언제나 냉랭하고 말투에는 가시가 잔뜩 돋쳐 있는데 어찌 무섭지 않을 수 있을까요.”

“…어, 저, 아마 여기까지 오는 여정이 피로한 나머지 말이 조금 거칠게 나간 것일 수도….”

내 쪽에서 싸움을 걸다시피 해 놓고 다시 위로하려니 좀 이상했다. 그러나 여림은 체념한 듯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서문 공녀께서는 상냥하시네요. 이미 10년 가까이 그런 냉대를 받았으니 비단 그날만의 일이 아니랍니다.”

오히려 담담하기까지 한 여자의 말에 미안한 마음이 돋았다. 옆에서 해완이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또 한 번 아프게 발을 밟았다.

“그래서 독고 공녀를 만나보고 싶었어요. 사철 겨울바람 같으신 태자께서 마음에 두신 여인이 어떤 사람인가 궁금했거든요.”

“마음에 두다니요. 저는 온통 처음 듣는 얘깁니다.”

해완이 곤란하다는 듯 살짝 웃었다. 아직 서로 마음을 확인한 건 아니고 간을 보고 있는 단계쯤인 것 같은데, 직설적인 여림의 말에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자 여림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허면 전하의 짝사랑인가요? 저는 황궁도 아닌 이곳으로 오셨기에 두 분께서 마음을 확인하신 줄로만 알았는데….”

“이 별궁이 특별한 곳인가요?”

“적어도 태자 전하와 금친왕 저하께는요. 승하하신 황후 폐하께서 이곳을 아주 좋아하셔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별궁에 기거하셨거든요.”

여림의 설명을 듣자마자 나도 모르게 눈을 꽉 감을 수밖에 없었다. 분명 제국에 처음 당도했을 때 주이환은 나에게 이곳을 ‘이맘때쯤 가기 좋은 궁궐’ 정도로만 묘사했다. 황후가 살아생전 가장 사랑했던 곳이라는 말 같은 건 입 밖에도 내지 않았는데. 이 궁궐의 의미를 알리는 것은 제 연모의 깊이를 알아 달라고 떼를 쓰는 것처럼 보일까 봐, 금친왕은 내게 별궁의 의미를 숨겼던 거다.

‘이 바보 같은 남자를 어찌하면 좋을지.’

해완 역시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둘의 표정이 썩 좋지 않자, 명여림은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사과의 말을 전했다.

“송구합니다. 두 분께서 모르고 계신지는 정말 몰랐어요.”

“아닙니다.”

“괜히 저 때문에 이 궁에 기거하기가 불편해지신 건 아닌지….”

나와 해완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효심이 지극했던 두 남자가 어떤 의미로 우리를 이곳으로 데려왔는지를 생각하면 부담스럽긴 했다. 그러나 여전히 별궁은 보는 눈 많은 도성의 황궁보다는 심적으로 편한 곳이니까.

“큰 결례를 저질렀으니 작은 부탁 하나는 다시 품에 넣어야겠군요.”

여림은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단념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해완 다급하게 몸을 일으키며 여림을 향해 물었다.

“부탁이라니요?”

“궁 뒤쪽 산에 황후께서 좋아하셨던 백일홍이 많이 피거든요. 의미가 있는 별궁이니, 꽃을 함께 따오자고 말씀드리려 했어요. 이 궁에 백일홍 향기가 가득해진다면 태자 전하께서도 감회가 남다르실 것 같고요.”

해완은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나는 의심을 거둘 수 없었다. 조금 전과 같은 날카로운 태도는 아니었지만, 여전히 경계 어린 눈초리로 말했다.

“태자 전하가 무섭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헌데도 전하를 위해 직접 꽃을 따러 간다니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두렵기는 하나,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것은 충의에 어긋나는 일이지요.”

“그렇게 치자면 여럿이 가서 공을 나누는 것보다 혼자 가셔서 꽃을 따오는 게 공녀에게 더 이득일 텐데요?”

“부끄러운 일이지만 전하께서는 제가 독단으로 하는 모든 일은 좋게 보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두 분과 함께 움직이는 게 더 나을 거예요.”

여림은 충분히 자존심이 상할 수 있는 이야기였는데도 불쾌한 내색 하나 없이 차분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녀의 고단함이 조금 엿보이는 것 같아 입맛이 썼다.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내게 기어코 화가 났는지, 해완은 이제 그만하라는 듯 날서린 눈짓을 보냈다.

나 역시 더 이상의 경계는 무의미함을 깨닫고 얌전히 단념했다. 어쩌면 의탁할 곳 없는 타국인지라 애먼 의심만 높아진 걸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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