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화연가 (57)화 (57/126)

전언은 입으로 나오지 못하고 속에서 체한 듯 울렁거렸다. 문을 넘어오는 적을 언제든 베어 넘길 수 있도록 손바닥 속 검을 세게 쥐어 잡았다.

‘민이 돌아와 함께 싸운다면 승산이 있다.’

그러니 일단 그가 돌아올 때까지 어떻게 해서든 시간을 벌어야 했다. 내키지 않았지만 대화라도 이어야 할 것 같아 명여림을 향해 말을 걸었다.

“호위는 일부러 물렸나?”

“맞아요. 나를 경계하는 당신의 의심을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려야 했거든.”

“나와 해완을 습격했던 자들의 정체 역시 산적은 아닐 테지. 신발에 쇠붙이 장식을 붙이고 산길을 누비지는 못할 테니까.”

“그건 반만 맞는 거로 해 두죠. 이들은 보수에 따라 산적이든 호위무사든 뭐든 되어 주는 사람들이니.”

‘그럼 먼저 명여림을 잡아간 것 역시 미리 짰다는 거네.’

계획 한번 야무지게 짰다는 생각에 혀를 두를 수밖에 없었다. 만약 민이 우리를 우연히 마주쳐 살리지 않았다면 정말 나와 해완은 나란히 황천길 배에 몸을 실었을 거다.

“황태자비가 될 생각은 없다더니. 어디서부터가 거짓이지?”

내 물음에 여림은 재밌다는 듯 소리를 높여 깔깔대고 웃었다. 비웃음이 아니라 정말 뱃속 깊은 곳에서 즐거움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어쩐지 괴이하게까지 느껴지는 웃음이 끝나고 여림은 능청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거짓이라니요. 나 명여림은 거짓말 같은 걸 할 줄을 모르는걸요. 분명 황태자비엔 관심이 없어요. 내가 되고 싶은 건 황후니까.”

“전형적인 어불성설 아닌가? 태자가 황제가 되면 당연히 태자비가 황후가 될 텐데.”

명여림은 한 걸음 더 문 쪽으로 다가섰는지 발걸음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은밀하고도 욕망이 담긴 목소리로, 여림이 속삭이듯 말했다.

“낮은 확률이긴 하지만 금친왕이 반역을 일으켜 황제가 될 수도 있잖아요?”

“무슨…!”

“그러니 금친왕이 아낀다고 벌써 소문이 파다한 당신도 함께 처리해야 완벽하게 황후 자리를 얻을 수 있겠죠.”

여림의 집착에 소름이 돋았다. 주이환이 반역을 일으키려는 상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나까지 제거하려 했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내게서 어떤 대답도 나오지 않자 여림은 풋, 하고 작은 웃음을 머금었다. 어쩐지 은혜를 베푸는 것처럼 거드름은 피우며 여자는 천천히 말했다.

“공녀. 시답잖은 질문으로 시간 끄는 게 다 보이니까 우리 문답 놀이는 이쯤으로 할까요?”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 행동반경을 읽힌 것보다 이제 정말 그들이 코앞에 들이닥칠 것에 위기감이 엄습했다.

잊었던 긴장감이 등줄기를 씻고 내려갔다. 밭은 숨이 자꾸만 몰아쉬어져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 눈을 곧게 떴다. 잘 다듬어진 칼이 가늘게 빛났다.

이윽고 바깥에서 조용하지만, 번개 같은 여림의 목소리가 내리꽂혔다.

“문을 부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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