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화연가 (60)화 (60/126)

세상에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주씨 형제는 우리가 다쳤다는 소식에 이성이 날아간 것 같았다. 일단 두 남자가 끌고 온 마차의 크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자그마치 마차 하나에 궁인이 스무 명 이상 딸린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아마도 황제나 황후만이 쓸 수 있는 것을 온갖 억지를 써 가지고 온 것 같았다.

게다가 마차 안은 마치 황궁 침실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처럼 꾸며져 있었다. 황금색 비단으로 멋을 낸 폭신한 요와 이불뿐만 아니라 가림막, 탁상, 간단한 차까지 준비된 터라, 조금 흔들리지만 않았더라면 마차 안이라고 생각하지도 못했을 거다.

‘거기서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황궁에 다 도착해서는 또 어땠는가. 오두막에서도 잘 걸어 다녔던 내 다리가 갑자기 고장 날 리가 없는데도, 그는 나를 서양의 공주님처럼 번쩍 안고 이곳 궁까지 데려왔다. 두 다리가 있으니 걸어갈 수 있다고 몇 번을 말했지만, 그는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며 끝내 나를 내려놓지 않았다.

‘솔직히 그건 좀 많이 창피했다.’

눈은 내리깔고 있었지만 호기심이 가득한 궁인들의 시선이 다시금 생각났다. 왠지 웃음기 어린 그들의 표정이 떠오르자 약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주이환은 약간 붉어진 얼굴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십니까? 열이 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아니요. 그냥 잠시 다른 생각 중이었습니다.”

“혹시 명여림의 처벌을 생각하고 계신다면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뭘 생각하든 그 이상의 벌을 받을 거거든요.”

주이환은 입꼬리를 비틀며 차가운 미소를 머금었다. 단우결을 상대할 때와는 또 다른, 어딘지 모를 잔악함이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그걸 어찌 아십니까?”

“제 분노 이전에 태자 전하께서 격분하셨습니다. 예상했던 것보다 공녀의 친우분을 전하께서 많이 아끼시나 봅니다.”

왠지 조금 뿌듯한 마음이 들어 깊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 내 친우를 아껴 준다는 사람을 싫어하고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나와는 달리 주이환의 얼굴에는 걱정과 근심이 가득했다. 내 무릎에 남아 있는 큼지막한 피딱지와 복숭아뼈 언저리의 시퍼런 멍, 팔 군데군데에 새겨진 크고 작은 상처들이 쉽사리 눈에서 잊히지 않은 것 같았다.

마치 자신이 아픈 것처럼 남자의 눈은 쓰린 빛을 머금었다. 정말 더 아픈 곳은 없는 거냐고 몇 번이나 되묻는 그의 모습이 어쩐지 애잔해, 콧등이 시큰거렸다.

“산아. 제가 많이 송구합니다.”

“괜찮습니다. 저도 깜빡 속았는걸요.”

“아니요. 그대를 여기까지 데려왔으니 제가 더 면밀히 살폈어야 했습니다. 검상을 입은 것이 만약 독고 세녀가 아니라 당신이었다면….”

주이환은 더 상상하고 싶지 않다는 듯 눈을 꽉 감았다. 남자의 얼굴은 어느새 하얗게 질려 있었고, 입술 역시 버석하게 말라 있었다. 식은땀이 흘렀다가 금세 마른 것처럼 넓은 등이 얕게 떨렸다.

금친왕은 침상 위에 얹어 놓은 손을 꽉 움켜쥐었다. 주먹을 쥔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치고 싶었던 건지, 혹은 그 주먹으로 명여림의 얼굴이라도 갈겨 주고 싶은 건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만은 확실하게 알았다. 더는 그가 죄책감에 짓뭉개어지길 바라지 않았다.

“착하지.”

언젠가 남자가 나를 달래며 말했던 것처럼, 나 역시 그의 말투를 따라 하며 다정스레 말했다. 바위처럼 딱딱하게 굳은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살포시 얹었다. 그러고는 아이를 달래듯 손가락으로 살살 문지르자 뼈마디가 새어 나왔던 손등에서 스르르 힘이 풀렸다.

남자는 내 손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다시 그 위에 다른 손 하나를 가져와 조심스럽게 얹었다. 마치 탑을 쌓은 것처럼 겹겹이 포갠 손과 손 사이에 따뜻한 온기가 가슴까지 스며들었다. 여러 겹의 갈라진 목소리로 주이환이 쥐어짜듯 말했다.

“오늘의 일이 나처럼 형편없는 남자가 감히 그대를 욕심낸 업보는 아닐까요. 숨만 쉬어도 죄가 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마음에 품는 것만으로도 당신이 상처 입을 것만 같아서.”

“소녀는 그리 약하지 않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가볍게 위로를 건넸지만 아무런 효력이 없었는지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나 때문에 산아, 당신 역시 망가지면 어떻게 합니까. 열 번을 죽어도 속죄할 수 없을 텐데. 티 없이 맑고 고운 당신이 고작 나 하나 때문에.”

점점 그의 목소리에 물기가 젖어 들었다. 남자의 동공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그가 어떤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느새 내 온기로도 다 덥혀줄 수 없이 차가워진 손끝이, 핏기 하나 없는 뺨이 그가 느끼는 공포를 대변하고 있었다.

“처음엔 그저 공녀가 내 마음을 알아주길 바랐습니다. 6년간 줄곧 품었던 연정이니 여유가 없을 만도 하지 않겠습니까. 하여 하루라도 빨리 내 마음을 보여 주고, 공녀의 마음마저 얻길 바랐지요.”

“지금은요?”

“모든 것이 두렵습니다. 전부 다.”

본능적으로 주이환이 말하는 ‘전부 다’라는 건 내가 생각한 그 이상의 범위라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아무리 괜찮다고 말해도 그는 고개를 저을 것이 분명했기에. 나는 반대 손을 들어 까칠한 그의 볼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이럴 땐 백 마디 말보다 사람이 주는 온도가 더 안심되곤 하니까.

“두려운 나머지 소녀를 놓을 겁니까, 저하?”

무거워지는 분위기를 풀고 싶어서 일부러 조금 짓궂게 물었다. 내 물음에 예상한 대로 주이환에게서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얼굴에 얕은 미소를 띠고 그의 턱을 내 쪽으로 돌려세웠다. 그제야 똑바로 눈을 마주해 오는 금친왕을 향해 조용히 입술을 열었다.

“무서워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사고 잘 치는 망나니를 정인으로 두셨으니, 그 정도 걱정은 하는 게 맞아요.”

“…하하.”

“걱정은 하되 겁은 내지 말아요. 소녀는 겁쟁이를 연인으로 둔 적은 없거든요.”

주이환이 한숨처럼 김빠진 웃음을 얕게 뱉자 나 역시 그를 향해 작게 마주 웃어 줬다. 어딘지 모를 불안과 긴장이 조금은 풀린 건지, 혼돈으로 탁해진 눈동자에 빛이 조금 돌아왔다. 남자는 천천히 내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눈을 감았다.

어느새 완연한 저녁이 된 창밖에는 멀리서 쓰르라미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높아진 온도에 땀이 밴 손이 답답할 만도 한데, 우리는 미동도 하지 않고 순간에 완전히 젖어 들었다.

여전히 고개를 파묻은 채 주이환은 왠지 조금 망설이는 듯한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공녀에게 꼭 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정리되면 말씀드릴게요.”

“예. 보채지 않을 테니 때가 되면 알려 주셔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작게 웃으며 남자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맞닿은 온기가 있었고 그로 인해 서로의 존재를 실감하는 밤이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이렇게 꽉 맞물린 손 하나만 있다면 어떤 절벽과 폭풍우도 견뎌 낼 수 있을 거라고 자만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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