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화연가 (61)화 (61/126)

한여름인데도 등 뒤에는 한기가 돋아 잠시 몸을 움츠렸다. 제후국의 차기 왕을 태자로 점찍고 있다는 아버지의 의중이 기억났다. 재고해 보겠다던 그의 뜻은 결국 꺾이지 않았나.

더는 글을 읽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서둘러 상자를 밖으로 끄집어내니 자물쇠로 완고하게 잠긴 게 보였다. 다행히도 종이의 모서리가 상자 밖으로 꽤 나와 있었다. 끝을 살짝 당기니 스륵 하고 상자에서 빠져나왔다.

글의 내용은 서신이었다. 다시 확인해 봐도 또한 아버지의 필체가 맞았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겨우 가라앉히고 문서를 끝까지 읽었을 때는 손을 툭 하고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무릎이 후들거렸다.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어서 탁자를 짚고 겨우 자세를 유지했다. 머릿속에서 쥐가 난 것처럼 지글거렸다.

‘아니야. 아닐 거야.’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기도하듯 절박한 심정으로 상자 밖 다른 종이들도 아까와 같은 방법으로 꺼낸 다음 빠르게 읽어 나갔다. 종이를 쥔 손이 점점 가파르게 떨려 왔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거칠게 다른 문서의 내용을 읽고 ‘아니야’라는 말만 중얼거린 채 또 다른 종이를 읽었다. 얇은 종이가 살결을 찢어 어느새 손가락에서 핏물이 고였는지도 모르고. 점점 글자들이 뭉개진 듯 흐리게 보였다. 눈동자에 멍울 같은 물기가 잔뜩 고인 까닭에.

가슴에서 해일이 일고 있었다. 처음엔 물웅덩이밖에 되지 않았던 주이환이 어느새 연못을 넘어 바다가 되어 있었고, 그가 일으킨 풍랑이 나를 송두리째 흔들고 있었다.

세찬 바람 속에서 진실은 하나였다. 주이환은 제후국을 점령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아버지는 뒤에서 이를 돕고 있었다.

허무함에 차마 웃음이 나왔다. 나는 도대체 당신의 무엇을 보고 있었던 걸까.

‘아니, 되레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나라를 넘기는 결정을 재고한다 했을 뿐 포기한다고는 말하지 않던 아버지. 끝내 내게 뭔가를 숨기고 있던 주이환. 이 둘이 연장 선상에 있을 수 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까.

‘천만에.’

자신에게 묻는 말에 씁쓸한 고소로 자답했다. 사실은 은연중에 알고 있었다. 다만 모르는 척 덮어 놓았을 뿐.

애써 아버지가 왕재라 여긴 태자와 주이환은 다를 것이라고. 금친왕은 이런 거래 같은 건 전혀 모를 것이라고 단정했다. 또 그렇게 믿고 싶었다. 만약 이 모든 걸 본인이 직접 행하면서도 한편으로 내게 구애하는 건 기만이니까. 나를 향한 애정까지도 거짓은 아닌지 의심하게 만드는 건 서로에게 너무 참혹한 일이기에.

‘그리고 이 참혹한 일이 기어이 일어나고야 말았구나.’

가슴이 찢겨 넝마가 되는 듯 아팠다. 그때 마침 집무실 안으로 주이환이 들어왔다.

“공녀. 저녁쯤에나 오실 줄 알았는데….”

예상치 못한 만남에 반가움으로 함박웃음을 짓다가, 내 곁에 상자와 그 옆에 함께 흩어져 있는 종이들을 발견하고는 말을 다 맺지 못하고 돌처럼 굳었다.

금친왕의 동공이 가늘게 떨렸다. 무얼 말하려다 쉽게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내게 손을 뻗으려다가도 이내 거두어 버리는 것이, 그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 것 같았다.

천천히 그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주워 담지 못한 눈물방울들이 울컥하고 흘러 금친왕이 곧잘 쓰다듬던 두 뺨 위로 족적을 내렸다.

“변명… 해 주세요.”

무의식적으로 뱉은 말이 고작 이것이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나는 아직도 주이환을 믿고 싶은 것이었음에. 뭔가가 잘못됐을 거라고, 사정이 있을 거라고 억지로라도 이해하고 싶은 마음에서.

그는 내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볼 위에 남아 있는 눈물 자국을 도저히 볼 자신이 없다는 듯. 후회와 죄책감,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듯한 절망이 그의 창백한 얼굴을 덮었다. 금친왕은 마른 수건을 쥐어짜듯 갈기갈기 찢어진 음색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태자 전하께서는 이미 무력으로 공녀의 나라를 정복할 계획과 능력을 갖추셨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전쟁을 막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밖에서 쳐부수는 대신 안에서 귀족들을 회유해 점령하는 걸 선택하셨습니까?”

하마터면 ‘사람이라도 덜 죽으니 감사라도 해야 하는 것이냐’고 말이 나갈 뻔했다. 어느새 깊은 슬픔은 날카로운 노기로 변해 있었다. 대답이 없는 주이환이 무심하고 답답해 날을 세우며 다그쳤다.

“이 문서들은 모두 제국이 나라를 점령하는 것을 도와주는 것을 대가로, 귀족에게 어떤 이득을 줄 것인지를 거래하는 내용이잖아요.”

원망스러운 눈으로 탁상 위에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는 문서들을 바라봤다. 어떤 문서에는 제후국의 땅 일부를 제국에 넘기는 대신 수확물의 일부를 가져간다는 내용이 있었다. 어떤 문서에는 광물 자원을, 또 관직을 약속받는 것도 있었다.

‘여기에 아버님이 가담했다니 믿을 수 없어.’

나를 절망하게 하는 것은 아버지가 이들의 편을 들어 줬다는 것에 있었다. 나라를 넘기는 뜻이 있었어도 이렇게까지 빠르고 구체적으로 행동에 옮길 줄은 몰랐다.

그나마 딱 하나 위로가 된다면 그는 물질적인 혜택을 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장 먼저 본 서신에 의하면 아버지는 점령 후 백성들이 평등하고 안온한 삶을 보장받길 바랄 뿐, 자신이나 가문에 이득이 될 것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연달은 충격으로 숨을 깊게 쉬기가 어려웠다. 폭풍우처럼 몰아치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가까스로 물었다.

“아버님께서는 왜….”

“거꾸로 서문 가주께서 계시기에 이 귀족들의 회유가 가능했습니다. 공녀의 아버님께서는 제후국이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을 아셨고, 가장 피를 덜 흘리고 효과적인 방법을 선택하셨던 것뿐입니다.”

“내 나라의 존망을 지금부터 어찌 안다는 말입니까.”

자존심이 상하다 못해 구겨졌다. 네가 뭘 아느냐고 일갈하고 싶은 걸 참고 물어뜯는 것처럼 되물었다.

“현 치세가 계속 유지된다면 쇠락은 분명합니다. 아니, 그 전에 정변이 일어날 수도 있고요.”

“정변이라니요?”

이제까지의 맥락과 전혀 맞지 않는 단어였다. 아버지는 상 제국에 나라를 넘겨줄 생각이지 본인이 직접 역모를 일으킬 사람은 아니다. 그렇다면 누가….

“원녕 대군 말입니다. 우리가 귀족들의 회유를 시작할 때 이미 그는 왕위 찬탈을 위해 다른 진영의 귀족들을 포섭하고 있었습니다.”

“말도 안 돼!”

거의 소리를 지를 것처럼 말을 쏟아 냈지만 주이환은 이것이 진실이라는 듯 가볍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신음이 나올 것 같아 입을 틀어막았다. 머릿속에서 서로 흩어져 있던 모든 단면들이 정확하게 짜 맞춰지는 감각에 어지러웠다.

마치 병권이 자신에게 있는 것처럼 말하던 단우결의 포부, 끊임없이 그를 경계하던 함공왕, 그리고 절대 원녕 대군만은 왕위에 올라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가진 아버지까지. 모든 것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이어졌다.

‘만약 정변이 성공해 단우결이 정권을 잡는다면?’

생각만 해도 머리가 으스러질 정도로 아팠다. 정복제로서의 꿈이 원녕 대군의 꿈이며 목표인 까닭에, 그는 왕좌에 오르자마자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단행할 것이다. 그러니 무능한 함공왕을 지지하는 한이 있더라도 결단코 단우결이 왕이 되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속으로 욕지거리를 참을 수 없었다. 콩가루도 이보다는 덜 작았을 것이고, 개판이라고 하면 장터에 짖던 강아지가 억울해할 판이었다.

자신의 업적을 위해 역모를 꾀하는 대군과 간신 무리에게 손발이 잘린 무능력한 임금, 이 모든 상황을 외부 세력의 힘으로 타개하려는 아버지. 그 사이에서 손 안 대고 코를 풀고 있는 상 제국까지.

‘이게 나라냐.’

나라의 한심한 꼴을 금친왕에게 들켰다는 것도 자존심이 상했지만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황당함과 자괴감, 분노를 겨우 갈무리하며 한탄하듯 읊조렸다.

“그러니까 저하께서는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할 나라이기에, 전쟁 하나는 막겠다는 일념으로 귀족들을 포섭하신 거군요.”

“감히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허면 묻겠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제후국을 얻고서 소녀가 저하와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다시금 눈물이 차올랐다. 슬픔인지 분노인지 알 수 없었다.

이제껏 계속 문 앞에서만 서 있던 그는 처참한 얼굴로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남자의 뺨에 눈물은 없었지만 번들거리는 눈동자에서 슬픔을 억눌러 참는 게 느껴졌다. 두어 걸음을 남겨 놓고 주이환이 내게 손을 뻗었다. 울음 자국으로 범벅이 된 볼을 닦아 줄 생각이었을까.

하지만 곧장 뒤로 두 걸음을 물러났다. 지금만큼은 그의 온기를 느끼고 싶지 않았다. 이미 날카롭게 베여 너덜너덜해진 마음이 작은 온기로 치료될 리가 없지 않은가.

“나를… 그렇게도 몰라요?”

원망 섞인 목소리가 집무실을 공허하게 채웠다. 이미 6년 전 종식된 전쟁 하나에도 마음을 주기까지 한참이 걸렸다는 걸 아는 당신이. 또한 연정보다 죄책감이 더 크다면 버틸 수 없다는 걸 아는 주이환 당신이. 나라를 뺏긴 이상 어떤 형태로도 당신과 행복해질 수 없다는 걸 정말 몰랐나.

그럼에도 나는 당신을 받아들이려 했다. 집착에 가까운 고집을 버려야 한다고 되뇌고 있었지. 당신이 이런 계획을 품었는지도 모르고 바보처럼.

“미안합니다. 나에겐 그 방법이 최선이어서… 그대를 놓지 않을 방법이 오직….”

“놓았어야지요.”

더듬더듬 말하는 주이환의 말허리를 차갑게 끊었다. 신경질적으로 볼에 흐른 눈물을 손바닥으로 쓸어 냈다. 더는 울고 싶지 않았다. 지금부터 하는 모든 말들이 감정적인 순간의 실수로 여겨지기 싫었으니까.

주이환은 사고가 정지한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그의 인생에서 내가 없는 것은 이제까지 상상조차 해 보지 않았던 것처럼.

“저하. 세상에는 이어질 수 없는 인연이라는 것도 있는 법입니다.”

“산아.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제발. 그러지 말아요, 제발.”

남자의 표정은 무릎이라도 꿇을 것처럼 절박했다. 두려움과 공포에 짓눌린 것처럼 그의 숨이 거칠었다. 또다시 주이환이 내게 한 걸음 더 다가왔지만 또 한 번 물러섰다.

눈물이 마르자 오히려 정신이 개운했다. 다름 아닌 지금 이 순간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또렷하게 알 수 있었다. 더는 물기가 남지 않은 말투로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제후국이 쇠망하는지와 관계없이 만약 소녀가 저하였다면 죽어도 저를 탐내지 않았을 겁니다. 연모를 품었어도 가슴속에서만 뭉개고 말았을 겁니다. 짓이긴 애정 때문에 마음이 썩어서 고름이 나와도 나 혼자 아팠을 거예요.”

“산아, 그건….”

“사랑하는 사람에게 언젠간 다가올 실연과 배신의 아픔을 겪게 하지 않았을 겁니다.”

점점 처참히 일그러지는 주이환의 얼굴을 무감정한 눈길로 바라봤다. 그의 마음에 일부러 상처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칼 한 번은 휘두르고 싶었다. 내가 뱉은 말에 당신의 가슴 역시 잘게 찢기겠지만 아무렴 넝마가 된 내 마음보다 더 아플까. 누군가는 이기적이라고 손가락질하겠지만 이 순간만큼은 성인이 될 수 없었다.

“일전에 말씀하셨죠. 저하 때문에 내가 망가지면 어떡하냐고.”

숨을 한 번 참고 사형선고를 내리듯 냉랭한 표정을 지었다. 납덩이처럼 묵직하고 냉기 어린 목소리로 한 마디를 뱉었다.

“그 일이 지금 벌어졌네요.”

나는 그대로 등을 돌려 집무실 밖으로 빠져나왔다. 주이환은 나를 붙잡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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