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이 말을 믿을지 말지는 네 마음이야. 나를 주제넘다고 여기거나 쓸데없이 참견이나 하고 다니는 사람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
“웬일로 서론이 이렇게 길어?”
그녀는 되레 피식 샌 웃음을 지었다. 빈정거리는 말투는 여전했지만, 예전보다 가시는 없었기에 작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허리를 곧추세우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대감은 너를 구한 게 아니야. 자신을 구한 거지.”
“대뜸 그게 무슨 말이야?”
급선회한 대화 주제로 혼란스러웠는지 그녀는 고운 이마를 찌푸렸다.
“네가 춘 봉황무는 나라의 지존에게만 올릴 수 있는 거잖아. 그런데 네가 춤을 출 당시 원휘왕은 없었고.”
“그럼 그 춤을 받는 건….”
“왕을 대신해 식을 주관하고 있었던 원녕 대군이야.”
순식간에 연조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조금 안쓰러운 마음도 들었지만 결심을 굳힌 이상 진실은 끝까지 밝혀야 했다.
“그때 대감은 질투심에 눈이 먼 왕을 피해 몸을 사려야 하는 상황이었어. 오직 임금만 진연받는 봉황무를 보게 생겼는데, 너 같으면 죽자고 말리지 않겠니? 그래서 춤이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중지시킨 걸 거야.”
“기껏 춤 하나잖아. 그게 무슨….”
그녀는 몹시 억울한 얼굴로 인상을 찌푸렸지만 나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옛일이다 보니 원휘왕의 광증이 상상 이상이었다는 걸 잠시 잊은 듯했다.
“잊었어? 옛날에 대군 한 명이 저잣거리를 지나다, 머리가 모자란 백성 하나가 그에게 왕만 받을 수 있는 삼배를 했지. 대군은 그 후 열흘도 되지 않아 참수당했어.”
“…맞아. 나도 기억나.”
“이래도 ‘겨우’ 춤 하나일까? 게다가 온 귀족들이 다 보는 건국제인데? 목숨이 달아날 이유가 되고도 남아. 실제로 연회가 끝난 후 귀족들 사이에서 중지된 봉황무 때문에 뒷말도 좀 있었고. 결국 몸을 던져 살리고 싶었던 건 네가 아니라 그 자신이야. 그리고 그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일걸.”
연조는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감추려 눈을 꽉 감았다. 짓이겨 깨문 입술이 애처로웠다. 탁상 위에 얹어 둔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잠시 뒤 여자가 천천히 눈을 떴다. 깊은 눈동자에서 비바람이 치고 있었다.
“왜 이걸… 나한테 알려 주는 거야? 내 연모가 처음부터 잘못됐다는 걸 말해 주고 싶어서? 아니면 동정이라도 했니? 비웃고 싶었어?”
뒤로 갈수록 목소리는 울음으로 차 먹먹했다. 마치 알고 싶지 않은 진실을 파헤친 내가 원망스럽다는 듯. 심지어 이 순간 누구라도 미워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처럼 필사적이었다.
평소라면 나도 발끈했겠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독기가 빠진 얼굴로 화를 내는 제갈연조는 전혀 밉살맞게 보이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남의 연모를 파헤쳤는데, 이 정도 비난은 당연한 거 아닌가. 고개를 저으며 담담한 어조로 입을 뗐다.
“너를 비웃는다고 내 마음이 흡족해지지는 않아. 누군가를 동정할 만큼 잘나지도 않았고.”
“그럼 왜…!”
“내가 말하지 않으면 대군은 이 진실을 영원히 묻거나, 혹은 대충 변명거리를 만들어서 빠져나갈 거야. 정치 세력이 있는 너와 척을 질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럼 유린당한 네 연모는 뭐가 되니. 네 삶과 맞바꿔 가꿔온 연정이 무참해지잖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는지 그녀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어느새 눈가에 물기가 자욱했다. 화가 나면 눈물부터 터뜨리는 성격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았다. 악우라는 말을 처음으로 실감했다. 견원지간 이상의 앙숙이었지만 그래도 서로를 겪어 온 시간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었으므로.
“난 너처럼 모든 걸 다 바쳐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이 없어. 연정 이전에 따지는 것도, 욕심과 걱정도 너무 많거든.”
잠시 동공에서 주이환이 스쳐 지나갔다. 만약 내게 오직 사랑만이 중요했다면 우리의 앞날은 과연 행복했을까.
“그래서 네 연정만큼은 인정해. 연모 하나만을 바라보고 사는 삶 역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다시 말하지만 난 하고 싶어도 못하는 거라. 만약 사랑이 네 전부라면, 네가 베푼 만큼 아낌없이 사랑해 주는 사람을 만나서 행복해져. 밑 빠진 독에 정 쏟지 말고.”
“인생 오래 살고 볼 일이네. 이런 말을 다 듣다니.”
어느새 눈동자에 물기를 거둔 연조는 마른 웃음을 지었다. 당장에라도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그녀의 얼굴은 무척 초췌했다.
한동안 말이 없던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릎이 꺾일 것 같았는지 크게 휘청거렸지만 이내 허리를 반듯하게 세워 냈다. 역시 자존심 하나는 알아줘야 했다.
“가야겠어. 더 추태를 보이기 전에.”
이제까지 더한 꼴도 많이 보인 주제에. 새삼스러웠지만 별다른 타박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소 문을 열기 전 내게 등을 보인 채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나는 앞으로도 여전히 네가 좋아지지는 않을 거야.”
“기대도 안 해.”
전혀 신경 쓸 거리도 되지 않아 어깨를 으쓱거리며 즉답했다. 제갈연조가 나를 좋아한다니, 황당하다 못해 두려울 일이니까.
“하지만… 내가 지나쳤어. 사과로 모든 일이 없던 게 될 수는 없겠지. 감히 용서를 바라지 않아.”
여전히 등을 돌리고 있는 터라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분명 그녀는 후회하고 있었다. 천하의 제갈연조가 후회와 반성이라니.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흐름 깨서 유감이긴 한데, 난 딱히 사과할 마음 없어.”
뜻밖의 사과에 당황했지만, 얼른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입궁을 앞두고 서로 지난 과거를 청산하는 건 동화 속에나 나오는 이야기 아닌가. 무작정 행복한 결말로 가기엔 나와 제갈연조 사이에 쌓인 게 지나치게 많았다. 겨우 사과 한마디로 풀릴 게 아니라는 뜻이고, 아마 우리는 죽을 때까지 이 응어리를 풀지 않은 채 살아갈 거다.
한편 이런 반응을 예상이라도 한 듯 연조는 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도 기대 안 했어.”
“그래. 이렇게 훈훈한 건 어색하니까 얼른 돌아가. 해 떨어지기 전에.”
괜스레 머쓱해져서 억지로 연조를 돌려세우고 처소 문을 열었다. 그녀는 그대로 밖으로 나가려다 멈칫하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간택이 서문 세녀 내정이라는 소문이 벌써 돌던데.”
“다들 남 얘기하는 걸 왜 이렇게 좋아하는지.”
“왕비 간택은 국정 대사이니 다들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걸? 조심해서 나쁠 건 없어.”
생전 처음 받아 보는 제갈연조의 걱정에 또다시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기분이 묘했다. 아직 이 거리감과 분위기가 익숙하지 않았으니까.
입술을 끌어당겨 피식 웃었다. 독기는 빼고 장난기는 집어넣어 가볍게 한 마디를 뱉었다.
“너나 잘해.”
“…발언 정정할게. 앞으로도 여전히 네가 싫을 거야. 맹세할 수 있어.”
나긋했던 연조의 눈매가 삽시간에 도끼눈으로 바뀌었다. 그녀는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몸을 홱 돌려 처소 문을 부술 기세로 꽝 닫고 나갔다. 씩씩거리는 연조의 등 뒤로 나는 한참을 깔깔거리며 웃었다.
역시 너랑 나는 서로 물어뜯는 게 제일 잘 어울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