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악에 물든 얼굴로 낚아채듯 단우결의 손에서 서찰을 빼앗았다. 관군들의 횃불에 의지해 빠르게 문서를 읽어 나갔다. 거기엔 얼굴이 달아오를 정도의 단우결을 향한 절절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대로 횃불에 종이를 태워 버리고 싶었다.
‘아아. 서찰을 안 본 눈 삽니다.’
아까 먹은 저녁이 그대로 얹힐 것 같았다. 울렁거리는 속을 겨우 다독이며 다시 서찰을 원녕 대군에게 돌려줬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아무리 온효재와 사전에 나를 탈락시키려는 계획을 짰다고 해도, 대군 본인 역시 간택 후보자와 밀회를 했다는 오명은 벗을 수 없다. 단우결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곳에 온 걸까. 나는 흡사 범인을 심문하듯이 원녕을 향해 물었다.
“대감께서는 이 서찰이 의심스럽다고 여기지는 않으셨습니까? 게다가 이런 서찰을 받고 약속 장소로 나온 이상, 대감 역시 밀회의 의지가 있는 것으로 여겨질 텐데요.”
“아니요. 나는 공녀를 설득하러 나온 겁니다.”
“무슨 설득이요?”
단우결은 곧고 충의 어린 얼굴로 입을 뗐다. 누가 봐도 의젓하고 듬직한 일국의 대군의 모습이었다.
“간택에 참여한 이상, 나를 향한 공녀의 마음은 크고 깊겠으나 그 연모를 이제 접어야 한다고요. 그것이 폐하를 향한 올바른 충심이기에.”
“…어이가 없다 못해 고갈되겠네, 정말.”
도저히 속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혼잣말하듯 밖으로 뱉어 버리고 말았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다른 누구보다 말을 하는 원녕 대군 자신이 거짓임을 알고 있을 텐데, 천연덕스럽게 자신을 연모한다고 주장하는 꼴이 답답하다 못해 억울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이 사태를 내 짝사랑으로 치부해서, 자신은 밀회의 오명에서 벗어나시겠다?’
이 얼마나 대외적으로 점잖은 대군인가. 자신을 흠모하는 공녀를 야멸치게 내치지 않고, 충심을 지키기 위해 설득하러 이 자리에 나왔다니. 서궁에 온 이유를 합리화시키면서도 자신의 명예는 지키는 남자의 언변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상황을 모두 지켜본 온효재는 마음은 아프나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아무래도 이 밀회는 서문 공녀 혼자만의 은애에서 비롯된 것 같군요. 벗을 팔아넘기는 것 같아 유감이지만, 이를 웃전에 고하지 않을 수 없답니다.”
말은 유감이라면서, 여자의 입가엔 가느다란 미소가 걸렸다. 승전보를 바로 눈앞에 둔 얼굴이었다. 왕비의 대례복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벌써 상상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저 역시 유감이지만. 기다리세요, 온 공녀.”
그녀와 마찬가지로 유감이라고 말했으나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효재를 단호히 막아섰다. 더는 이들의 날뛰는 꼴을 지켜볼 수 없었다.
‘지금부터 간택 후보자는 네 명에서 세 명으로 줄어들 거다.’
오랜만에 자존심이 제대로 상한 나머지 속으로 칼을 갈았다. 누명을 씌운 것도 모자라 단우결을 연모한다는 거짓 서찰까지 꾸민 온효재를 가만둘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