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화연가 (74)화 (74/126)

자신이 한 말을 그대로 돌려받자 여자는 마침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작고 둥근 어깨가 두려움으로 바들바들 떨었다.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는지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산책하던 중 우연히 두 분이 함께 있는 장면을 목격하여, 정황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사람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오해하여 송구합니다.”

온 공녀는 마지못해 사과의 표시로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마음에도 없는 사죄에 자존심은 구겼지만, 그래도 더 큰 화를 입는 것보다는 낫다고 결론지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도망가게 둘 수는 없었다. 증좌는 이미 두 개나 있었으니까.

“송구로 끝날 문제가 아닙니다. 공녀는 저뿐만 아니라 일국의 대군까지 속였으니까요.”

“저는 그런 일을 저지른 적이 없습니다!”

“대감께서 받은 서찰에는 은은한 봄꽃 향이 났습니다. 어디서 맡아 본 듯한 향이었는데 공녀가 곁에 있으니 확실해지는군요.”

“아, 설마…!”

“한여름에 봄처럼 달콤한 향이 온몸에서 풍긴다고 한빈께 칭찬을 받은 게 누구였더라?”

낭패 섞인 표정이 여자의 얼굴에 흘러 넘쳤다. 아름다움을 돋보일 목적으로 사용했던 꽃향기가 오히려 독이 되어 자신을 옥죄어 올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압박감에 숨쉬기가 어려웠는지 온효재는 밭은 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도 도망칠 구멍이 남아 있는 이상 절대 포기할 수 없다는 듯 끈질긴 변명을 멈추지 않았다.

“꽃향기 하나로 사람을 특정하는 것은 비약 아닙니까?”

“증좌는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서신이 쓰인 종이입니다.”

영 생각지도 않은 것을 지적당한 듯 공녀는 벙찐 표정을 지었다. 하긴, 실수라는 건 본인이 자각하지 못하고 저지르는 경우가 많은 법이니까.

“서문가는 검소를 중시하는 터라, 직분이 막중한 가주를 제외한 모두가 한 겹의 기본 선화지를 사용합니다. 헌데 서찰에 쓰인 종이는 진서지입니다.”

“그깟 진서지가 무엇이 특별하단 말입니까! 그래 봤자 종이인 것을!”

“바로 그것입니다. 오로지 공녀만이 진서지를 특별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거요.”

맞장구를 치자 효재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도대체 무엇이 자신의 실책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치였다. 나는 어린아이에게 정답을 알려 주듯 또박또박 설명했다.

“진서지는 서국에서 수입되는 귀한 종이입니다. 즉 서찰 같은 일상 용도가 아니라 서예나 서화 같은 작품을 만들 때 사용하지요. 공녀가 이런 진서지를 흔히 여길 수 있는 이유는 딱 하나뿐입니다. 공녀의 집안에서 운영하는 상단이 진서지를 독점으로 수입하기 때문이에요.”

“아… 아아….”

여자는 애써 손으로 입을 막았지만 터져 나오는 신음까지 주워 담지는 못했다. 처참하게 일그러지는 얼굴을 무덤덤한 눈으로 바라봤다. 지금 확실히 밟아 두지 않으면 온효재는 다시금 끈질기게 자신의 죄를 시인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려서부터 흔히 보고 자란 진서지이기에, 필사꾼에게 서찰 작성에 필요한 종이를 내어줄 때도 별생각이 없었겠지요. 공녀 특유의 꽃 향을 잔뜩 묻힌 채.”

“오해… 오해입니다. 나는….”

“이 서찰로 대감의 충의를 능욕했고 저에겐 음녀의 모욕을 씌우려 했으니 그 죄는 두 배가 될 겁니다, 공녀.”

순간 효재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눈을 부릅뜬 그녀는 정신을 놓은 것처럼 희번덕거리는 얼굴로 소리쳤다.

“아니! 대감께서는 알고 계셨어. 이 서찰이 가짜라는 걸!”

공녀를 모함한 죄보다 왕족을 능멸한 죄가 더 크다는 걸 알아서였을까. 온 공녀는 적어도 자신은 대군을 속인 적이 없다는 걸 강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거꾸로 따지자면, 그 말은 단우결도 함께 짜고 나를 모함하려 했다는 뜻이 된다. 내 위신은 실추시켜도 자신의 명예는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마당에, 원녕 대군이 온효재의 편을 들어 줄 리가 없었다.

“더는 자신의 죄를 다른 사람에게 덧씌우지 마세요, 공녀. 나는 모르는 일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원녕은 불쾌한 표정으로 가차 없이 효재를 내쳤다. 지체 없는 꼬리 자르기였다. 예상은 했지만 왠지 씁쓸했다. 어쩌면 나는 이제야 진단우결이라는 남자의 본색을 알아 가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대감! 소녀에게 어찌 이러십니까!”

“여봐라. 일단 공녀를 처소로 모셔라. 단, 처소 궁 밖으로는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게 하고.”

절규하듯 비명을 지르는 여자를 무시하며 대군은 관군들에게 짧게 지시했다. 장정들에게 질질 끌려가면서 온효재는 ‘대감, 대감!’하고 울부짖으며 길게 흐느꼈다. 차마 귀를 막고 싶었지만, 정신력을 그러모아 대군을 노려보는 것으로 대신했다.

‘필시 이 계획에 구멍이 있다는 걸 눈치챘을 거다.’

머리 좋은 대군이 내가 간파한 구멍을 놓쳤을 리 없다. 아니, 그 전에 원녕은 실리적인 사람이었다. 모함이 성공해 나를 얻을 수 있다면 좋고, 실패한다면 다만 모르쇠로 일관한 채 꼬리를 잘라 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할 만큼. 일찍이 그의 비정함을 알고 있었지만 막상 살갗에 닿을 정도로 실감한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자신을 박살 낼 것 같은 시선이 못내 따가웠는지, 단우결은 짐짓 해사한 얼굴로 물었다.

“왠지 내게 화를 내는 것 같구나.”

“…이번 온효재의 계획은 대감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으니까요.”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말하지 않았니.”

이미 끝난 얘기를 괜히 따지고 든다고 생각했을까. 대군의 얼굴에 약간의 짜증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증거도 없이 그를 몰아세우는 게 아니었다. 소매 안으로 손을 넣어 서신 하나를 꺼냈다. 대군부의 궁녀가 가져다준 원녕의 서찰이었다.

“대감께서 받은 서찰이 가짜인 건 모를 수 있어도 이것마저 모르시지는 않겠지요.”

남자는 눈살을 찌푸린 채 예리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마치 자신이 흘린 공범의 증좌를 들킨 것처럼 어떤 긴장감까지 엿보였다. 날아드는 시선에 정면으로 맞서며 말했다.

“이 서찰은 온효재 혼자만의 작품이 아닙니다. 서체는 대감의 것이에요.”

“앞선 서신처럼 이 역시 필사꾼이 쓴 것일 수 있지 않니.”

남자는 별일 아니라는 듯 넘어가려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이미 정나미가 다 떨어져 버렸기에, 그런 웃음에 쉽게 넘어갈 수 없었다. 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설명을 이었다.

“아니요. 제 글씨체는 완벽하게 흉내 냈던 필사꾼이 모사한 것치고는 서투릅니다. 평소 대감의 필체와 좀 다르거든요.”

“난 잘 모르겠는데.”

“글씨의 삐침 쪽이 거칠고 울퉁불퉁합니다. 마치 글자를 쓸 때 불편함을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지요. 어째서일까요?”

“글쎄.”

시종일관 모르쇠로 일관하는 게 얄밉다 못해 못나 보였다. 이렇게 된 이상 하나부터 열까지 제대로 짚어 내는 게 좋을 것 같아, 또박또박 설명하기 시작했다.

“종이 때문입니다. 이 종이 역시 귀한 진서지이나, 왕궁에서 주로 쓰이는 비단 순지에 비하면 표면이 매끄럽지 못하고 이물감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온 공녀는 직접 대감을 방문해 자신이 가지고 온 두 개의 서찰을 보였겠지요. 하나는 소녀의 글씨를 완벽하게 흉내 낸 것으로, 다른 하나는 아직 비어 있는 채로. 계획에 찬동한다면 직접 서신을 작성해 달라는 요청 같은 걸 받고 대감께서는 직접 글자를 쓰셨을 겁니다. 허나 평소 쓰던 순지와 달리 표면이 거친 터라 생각보다 글씨가 잘 나오지 않았고, 이 때문에 소녀가 이질감을 느낀 것입니다.”

“종이라면 대군부에도 차고 넘치는데 뭣 하러 공녀 본인이 진서지를 가져올 필요가 있을까.”

피식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게. 본인은 아무 생각 없이 챙겨 온 종이가 이렇게까지 큰 파장을 몰고 올지 당시의 온효재는 전혀 몰랐을 거다.

“눈치가 보였겠지요. 모종의 제안을 하러 온 마당에 대군께 종이까지 내놓으라고 하기엔 뻔뻔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요.”

“헌데 종이 하나만 가지고는 부족하지 않니, 산아.”

단우결이 빙그레 웃었다. 그건 빠져나가려는 웃음이 아니었다. 오히려 설명을 더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렇게라도 해서 조금이라도 더 내 목소리를 들으려는 듯. 예전처럼 함께 대화를 이어 나가고 싶다는 것처럼.

“제게 대군의 서신을 전달한 대군부 궁인이 온효재가 데려온 무리 사이에 끼어 있었습니다.”

거래를 성립한 사람들끼리 각자의 하인을 보내는 것은 흔히 우정의 증표로 사용되기에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구구절절한 설명은 생략했다. 함께 대화를 섞으려는 대군의 바람을 조금도 들어주고 싶지 않았으므로.

우리 사이에 잠시 얼음장 같은 침묵이 깔렸다. 한여름인데도 살벌해진 공기가 차갑다 못해 에일 정도로 따가웠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나였다.

“이렇게까지 하셔야 했습니까, 대감.”

“무얼 말이니?”

단우결은 또다시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예리한 눈동자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내 말투에서 이제까지 없었던 실망과 분노를 직접 실감했기 때문이리라.

“오늘의 일이 함정임을 입증하지 못했다면 소녀는 간택 후보자의 처지로 대군과 사통을 한 천하의 음녀로 손가락질 받았을 겁니다. 어찌 이런 계획에 찬동하실 수 있습니까.”

“말하지 않았니. 앞으로 좀 괴롭힐 거라고. 다소 망가지긴 하겠지만 손에서 놓는 것보다는 낫다고 미리 언질도 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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