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화연가 (75)화 (75/126)

대군의 목소리는 전혀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는 듯 차마 시큰둥하기까지 했다. 나를 망가뜨린다는 남자의 얼굴이 너무나도 대담무쌍해서, 한편으로는 그의 눈동자에 걸린 잔혹한 집착이 너무나 진득한 까닭에. 떨리는 목소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천천히 입을 뗐다.

“소녀의 명예가 땅으로 추락하고 위신조차 세울 수 없어도 대감의 곁에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다는 뜻입니까?”

깊은 분노를 느꼈을까. 단우결 역시 순식간에 표정을 뒤엎었다. 작은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없이 숨 막히는 냉기가 남자의 얼굴에 자욱했다. 대군은 노기 가득한 음성으로 다그쳤다.

“어여쁜 채로 내 곁에 남기를 거부한 건 너였어.”

“결국 모두 다 소녀의 탓이 되는군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대군과 함께 벗으로 지내며 쌓아 온 신의가 완전히 두 동강 나는 순간이었다. 나를 상처 입혀도 적어도 어떤 선을 지키리라는 일말의 기대 역시 산산이 조각났다.

“나야말로 궁금하구나. 그 서찰이 가짜임을 이미 알았는데도 왜 이곳에 나왔는지.”

“반신반의했거든요. 예상은 했지만 아니길 바랐기에, 진의를 확인하기 위해 나온 겁니다. 헌데 상상했던 것 그 이상이었네요.”

온 힘을 다해 그를 노려봤으나 대군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실성한 사람처럼 남자는 히죽 웃음을 머금었다. 소름이 오소소 팔뚝에 밀려왔다. 초점은 있으나 이성을 상실한 눈으로 원녕이 중얼거렸다.

“무얼 예상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단다. 널 곁에만 둘 수 있다면 미움이야 백 번도 더 받을 수 있어.”

‘완전히 미쳤어.’

무심코 뒷걸음질 치며 고개를 저었다. 이미 내가 알던 진단우결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니, 처음부터 내게 보이던 모습은 안개보다 짙은 허상이었을지도 모른다.

헐겁게 맞물렸던 신의와 우정이 마침내 모두 사라졌다. 비통한 얼굴로 눈을 꽉 감았다. 머릿속에서 지금보다 앳된 얼굴의 어린 단우결이 순수한 얼굴로 웃고 있었지만 이내 지워 버렸다. 그리고 속으로 나지막이 되뇌었다.

‘안녕. 한때 친우였던, 그리고 충의를 다하고 싶었던 진단우결.’

다시 눈을 떴을 때 내 눈동자는 납덩어리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다. 원녕에게 처음 보이는 단호하고 매서운 얼굴로 천천히 입을 뗐다. 이제 우리에겐 부정적인 처음이 아주 많이 생길 것이다. 아니, ‘우리’로 함께 묶일 일도 없겠지.

“아니요. 절대 대군의 곁에 설 날은 오지 않을 겁니다.”

산보다 완고한 의지에 기분이 상했는지 남자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대답했다.

“호언장담하는구나. 만에 하나 그런 날이 오기라도 하면 어찌하려고.”

이번엔 내가 가볍게 코웃음 쳤다. 눈빛에는 칼날 같은 혐오를 애써 숨기지 않은 채, 굳은 결의를 품고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했다.

“어쩌긴요. 혀라도 깨물고 죽을 겁니다.”

그러니 갖은 수를 다 써서 날 곁에 둔다 해도, 거기에 사람의 온기는 찾아볼 수 없을 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