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표가 찍힌 말끝에는 미처 다 갈무리되지 못한 슬픔이 묻어 나왔다. 굳이 눈동자를 그의 곁에 두지 않아도 주이환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허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고 잊어버리려고 해도 진실은 가릴 수 없었습니다.”
“…무엇 말입니까.”
쥐어 짜내듯 조용히 묻자 주이환이 먼 추억을 되짚는 듯 대답했다.
“제 연정이 이기적이었다는 것 말입니다. 연모를 핑계로 저의 행복을 위해 그대의 나라를 빼앗으려 했습니다. 그러니 원망은 제 몫이 될 수 없지요. 오직 그대만이 내 인생의 목표이고 꿈이라, 여유가 없던 것이라 믿었지만 사실은 그저 내 욕심을 채우기 급급했던 겁니다.”
“…그 욕심 덕에, 한때 저 역시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을 너무 폄훼하지 마세요.”
입에 담는 모든 낱말이 조심스러웠다. 이미 함공왕의 반려가 되기로 한 이상 원녕 대군에게 그러했듯 금친왕에게도 여지를 줄 수 없었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이미 지나온 과거는 인정하되 미래의 마음까지는 장담하지 않는 것이었다. 비록 내 연정의 주인이 이 순간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주이환이라고 할지라도.
“예. 저 역시 행복했습니다.”
남자가 저물어 가는 햇빛보다 찬란하게 미소했다. 그가 내 곁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나를 겁먹게 하려거나 끊어 내지 못한 자신의 연심에 힘겨워하는 모양새가 아니었다. 이미 많은 것을 받아들인 주이환의 몸짓은 몹시 섬세하고도 겸허했다.
“혼자 품었어야 할 연정을 그대와 함께 나누었고, 당신의 애정도 되돌려 받았습니다. 그로 인한 행복으로 대가를 치러야 한다면 일생 감읍하며 속죄할 겁니다. 제 마음은 이 세상의 수명이 다하는 날까지 오직 그대의 것이니까요. 이 연모는 모래가 진주가 되는 날 멎겠지요.”
또다시 어떤 탄식이 나올 것 같았다. 모래알이 진주가 되는 날이라니, 불가능한 영겁을 약속하는 말이었다. 그 먼 미래까지, 이토록 기쁜 얼굴로 죄를 갚겠다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마치 자신의 일생이 가시밭길임을 알면서도 맨발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남자의 얼굴은 담담하고도 깊었다.
“지난날의 연정은 모두 제가 보듬을 테니, 그대는 아무 걱정 없이 내내 행복하고 또 강녕하시길 바랍니다.”
“…예.”
“저를 위한 당신의 다정을 감히 소원하지는 않으나, 아주 조금이라도 그대의 마음이 허락된다면. 제 이름자를 기억해 주시겠습니까.”
“잊지 않겠습니다.”
‘어찌 잊겠어요. 내 연심에 당신의 이름 세 글자가 깊이 새겨져 있는데.’
뒷말들을 끝내 전할 수 없어 입 안으로 삼키길 반복했다. 평생 묻을 것을 선택한 은애가 가슴께 에서 얹히기라도 한 걸까. 심장이 불에 덴 것처럼 아리고 따가웠다.
주이환은 통나무처럼 딱딱하게 경직된 채 무언가를 자꾸 눌러 참는 나를 지그시 응시했다. 남자의 얼굴에 회환이 가득했다.
“한때 그대가 행복할 수 있는 곳은 오로지 제 곁이라 자만했지요. 당신의 웃음을 지키는 것 역시 나뿐이라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조건 없이, 오롯이 그대가 행복해지길 염원하는 일이 진정한 연모임을. 너무나도 늦었으나 이제는 진실로 압니다.”
참회와도 같은 고백이었다. 상냥하고도 다정한 연정에 눈가가 바르르 떨렸다. 왕비로 간택되었어도 여전한 연심을 보여 주는 그에게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너무 밑지는 연모를 품고 계신 것 아닙니까.”
애써 올라가지 않는 입술을 올려 버석한 웃음을 지었다. 열심히 농담인 척했지만 자신을 향한 걱정을 느낀 건지, 남자는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원래 더 많이 연모하는 자가 지는 법 아니겠습니까. 평생 이길 생각이 없으니 마음 쓰시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습니까.”
“영 밑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대가 웃고 있다고 생각하면, 저 또한 대륙 어디에 서 있든 웃을 수 있거든요.”
그리 나쁜 이야기는 아니라며 웃는 금친왕의 얼굴을 보며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다. 어째서 자신이 있을 장소를 제국이나 점령국으로 제한하지 않고 ‘대륙 어디든’이라는 식으로 뭉뚱그리는 걸까. 마치 세상 어디에도 쉽게 발붙일 생각이 없다는 듯이. 문득 불안한 마음이 들어 다급한 얼굴로 물었다.
“대륙이라니, 제국을 떠나시는 겁니까.”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는지 주이환은 잠시 말이 없었다. 허를 찔린 것처럼 눈에 띠게 얼굴을 굳히다, 불안정하게 떨리는 내 눈동자를 바라보고는 피식 마른 미소를 지었다.
“이곳 저곳으로 처리할 일이 많아 무심결에 그리 말했나 봅니다.”
“거짓말.”
툴툴거리며 즉답하자 금친왕이 한 번 더 너털웃음을 지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투덕거렸던 것과 같은 흐름이었다. 애틋한 그리움에 휩싸여, 그는 다정스레 눈꼬리를 늘어뜨린 채 대답했다.
“거짓이 아닙니다. 잘못된 일을 바로잡으려면 부지런히 몸을 옮겨야 하거든요.”
“바로잡다니요. 무엇을요?”
“그대가 혼약으로 지키려는 이 나라를, 나 역시 지키고자 합니다.”
의외의 발언이었다. 나를 얻기 위해 제후국을 와해시키려 했던 그다. 어떻게 한 계절 사이에 완고했던 결단이 바뀔 수 있었던 걸까.
“만약 당신을 욕심 내지 않았더라면 두 나라의 운명은 어찌 됐을지 생각해 봤습니다.”
“그랬다면 제 나라는 진작 제국에 의해 침공당했겠지요.”
우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금친왕은 이미 주이록이 무력으로 나라를 침공할 충분한 준비를 마쳤다고 했었다. 실제로 제국에 가 봤을 때 납득할 수 있었고. 침략을 당했어도 열 번은 더 당했으리라. 그러나 금친왕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전쟁으로 당신이 포로 취급당하는 것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라, 침공은 무슨 짓을 해서라도 막았을 겁니다. 또 그대와의 인연 역시 욕심내지 않았을 테니 제후국의 분열을 조장하는 멍청한 짓도 하지 않았겠지요.”
“하여 이 나라를 지키겠다는 결심이 서신 것입니까.”
“예. 처음부터 그리해야 했던 일입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바로잡으려 하는 것이고요.”
주이환은 담담하지만 결의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제국을 떠나온 기간 동안 주이환은 훨씬 넓고 단단해져 있었다.
동시에 알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에는 금친왕의 연심이 있었다는 걸. 나를 얻을 생각 하나만으로 잘못된 방법을 선택하게 한 것은 은애였다. 그러나 동시에 비록 나와 일생의 연을 맺지는 못했어도, 내 행복을 위해 제후국을 지키겠다는 뜻을 품게 한 것 역시 연모였다.
‘하지만 일이 그렇게 쉬울까.’
한편으로는 의구심이 들었다. 제후국을 지키는 일이 말처럼 쉬웠다면 주이환 역시 처음부터 나라를 와해시키기보다는 어떻게든 지키는 쪽을 선택했을 거다. 태자를 꺾는 일이 태산을 무너뜨리는 것만큼이나 어려웠기에 오늘의 비극이 벌어진 것 아니겠는가. 염려스러운 어조로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허나 쉽지 않을 것입니다. 황실 전체를 상대로 가능하겠습니까. 태자부터 난관일 텐데요.”
“예. 몹시 어려운 여정이 될 테지요. 하지만 그 길의 끝에 그대의 행복이 있다면 저는 타협하지 않을 겁니다.”
“저하….”
“게다가 제겐 비밀 무기가 하나 있거든요.”
금친왕의 얼굴에는 짓궂은 미소가 찾아 들었다. 꼭 승리를 미리 본 것만 같은 얼굴이었기에 그 기세에 어울려 물을 수밖에 없었다.
“무기라니요?”
“독고 세녀께서 황궁에 머무는 사이, 제후국으로의 점령 거사를 알게 되셨습니다. 지금도 태자 전하를 설득하느라 애를 쓰고 계시겠지요.”
‘그래서 귀국을 늦춘 거였구나.’
해완의 부자연스러운 체류가 한 번에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해완 역시 제후국의 세녀이니, 제 나라가 점령당하지 않도록 있는 힘껏 태자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쓸 것이다. 그러나 제국의 황태자씩이나 되는 인물이 일개의 세녀의 말에 과연 신념을 굽힐까.
“그녀의 충심을 의심하지는 않으나, 태자 전하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영향력이 있는지 걱정입니다.”
“감히 장담하건대 독고 세녀께서는 현재 황제 폐하 다음으로 권능을 지닌 분이실 겁니다.”
금친왕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지만 나는 놀란 입이 다물어 지지 않았다. 내 기억에 두 사람은 서로 호감이 있는 정도였는데, 도대체 그 동안 제국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주이환은 혼란스러운 얼굴의 나를 앞에 두고 얕게 미소 지었다. 이윽고 천천히 허리를 굽혀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더없이 온화한 눈빛으로 작게 속삭였다.
“그러니 다 잘될 겁니다. 그대의 선택을 의심하지 말아요.”
차마 금친왕 얼굴을 마주 보며 웃어 줄 수 없었다. 자신과의 미래를 버린 것이 옳은 선택이었음을 암시하는 말이었다. 곧 더는 자신에게 미안해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기도 했다. 일종의 면죄부이기도 했고.
자꾸만 아프게 미끄러지는 시선을 금친왕에게 고정했다. 이렇게 주이환과 독대를 허락받을 날이 또 얼마나 될까. 그러니 지금 힘껏 주이환을 눈에 담아야 했다.
어떻게 나를 보며 미소 짓는지, 다정한 눈꼬리가 얼마나 곱게 휘는지. 얇은 입술 사이로 산아, 하고 부르던 목소리를. 건조했던 얼굴이 나를 볼 때면 따사로움이 물감처럼 퍼져 나가던 경이로운 순간들을. 앞으로 살아가는 날 동안 연정이라는 보석 상자에 넣어 두고서 한 번씩 꺼내 볼 수 있도록.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잠시 나를 응시했다. 그 역시 나의 마지막을 눈에 담으려는 듯 시선이 옮긴 곳마다 애정이 절절했다. 잠시 뒤 주이환이 입술을 천천히 뗐다.
“산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