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화연가 (80)화 (80/126)

평우찬은 무언가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가슴에 있는 모든 피가 졸아들다가 또 한순간 다시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차가워지는 것 같았다.

“컥!”

목울대로 새까만 흔적이 울컥하고 넘어왔다. 침상에 흩어진 빨간 자국을 확인한 후에야 그는 자신이 각혈했음을 알았다. 산 채로 몸이 쪼개지는 고통에 머리가 너무나 느리게 돌아갔다.

‘끼익!’

누군가 그의 절규를 듣기라도 한 걸까. 그토록 열리길 바랐던 문이 삐걱, 하고 천천히 열렸다. 함공왕은 쓰러진 채로 기어 나가며 손을 뻗었다가 이내 멈칫했다. 이윽고 툭, 하고 왕의 손이 힘없이 침상 위로 떨어졌다. 남자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동자로 제 앞에 서 있는 한 인영을 노려봤다.

“이런. 꼴이 꽤 험하십니다, 숙부님.”

왕의 동공에는 귀신보다 진득한 웃음을 짓고 있는 단우결이 있었다.

“ㄷ… 대군!”

평우찬의 비명 같은 외침에도 원녕은 여유로운 미소를 보였다. 그는 쓰러져 있는 왕을 일으킬 생각이 전혀 없었다. 마치 춤을 추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단우결은 왕의 앞에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예. 접니다. 모든 것이.”

원녕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몸의 장기가 쥐어뜯기는 고통을 감내하며, 왕은 대군이 말한 ‘모든 것’에 제 죽음까지 포함돼 있음을 깨달았다.

“폐하께서 드셨던 차에 독이 들어 있었습니다. 정확히는 찬물에 말이지요.”

“…헉, 허억! 상선이….”

“예. 상선이 가지고 온 그 물 말입니다. 애초에 뜨거운 차를 준비한 것도 사실은 그의 계획이었답니다.”

원녕의 친절한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왕은 한 번 더 컥, 하고 더운 피를 게워 냈다. 흰색 침의가 붉은 피로 얼룩져 가는 것을 단우결은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하긴, 모든 것이 계획대로 흘러갔던 건 아니었다. 기미 상궁의 눈을 피해 첫 찻물을 금상이 물리면, 독이 들어 있는 새 차를 올릴 예정이었다. 설마 물 한 잔만 가지고 오라고 할 줄은 몰랐기에 작은 소동이 있었다. 혹시 몰라 예비해 둔 독이 없었다면 오늘의 거사는 어쩌면 실패했을지도 모른다.

‘이왕 죽어 주실 것, 덜 번거롭게 해 주었으면 좋았으련만.’

대군은 어수선했던 조금 전의 분위기를 떠올리며 짧게 혀를 찼지만, 이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결국 함공왕은 독을 마시고 제 앞에 피를 흩뿌리며 쓰러져 있다. 이 정도면 충분한 성과였다.

한편 피를 게워 내면서도 왕은 애써 위엄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임금으로서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평우찬은 입술을 비튼 채 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 발을… 찍었구나. 컥, 흐억! 제 발로… 여길 기어… 들어오다니. 쿨럭!”

“예. 이곳에 직접 발을 들이는 건 위험한 일이지요. 추립이가 그리 말리는 건 처음 봤으니까요.”

원녕의 동공에서 잠시 추립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절대 침전으로 가서는 안 된다며 목숨으로 막아서는 것을 정말 베어 버릴 뻔했다. 지금 이 순간이 단우결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추립은 절대 모를 것이다.

얼마나 기다리고 바랐던 날인가. 오늘은 승리의 날이요, 또한 그 동안의 치욕을 되갚는 날이다. 어떻게 일생의 원수가 죽는 꼴을 놓칠 수 있을까. 직접 보지 않으면 배알이 뒤틀릴 것 같은 심사였기에, 추립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원녕은 왕의 침전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을 절절히 실감했다. 평우찬의 고통은 자신에게 희열로 다가왔다. 임금의 고통받는 모습을 조금이라도 오래 볼 수 있다면 대군은 귀신에게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단우결은 왕을 향해 얼굴을 가까이 내밀었다. 입매는 웃고 있었으나 눈매는 더없이 사납고 잔인했다. 수년간을 묵혀 온 적대감과 증오가 독을 바른 화살처럼 왕에게 가감 없이 박혔다.

“허나 보는 눈은 상선을 통해 모두 물러 뒀으니 그리 위험하지는 않습니다. 폐하의 염려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온 힘을 다한 자존심을 염려라고 말하다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평우찬은 가슴을 움켜쥐며 침전 문을 뚫어지라 노려봤다. 문 사이로 상선의 얼굴이 보인다면 제 몸을 다 던져 목을 베어 버리겠다는 일념으로. 임금을 적에게 팔아 넘긴 것도 모자라 침전의 호위나 상궁까지 모두 물러가게 했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원녕이 문 쪽으로 내다 꽂히는 임금의 눈초리를 깨닫고 얕은 비웃음을 내비쳤다.

“상선에게 죄를 묻고 싶으셔도 그는 이미 황천길을 건넌 터라 아니 되실 겁니다.”

제 약점을 알고 있는 자를 살려 둘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하고 원녕은 빙그레 웃었다. 왕은 절규라도 뱉고 싶었으나 몸이 따라 주지 않았다. 시야가 점점 까맣게 물들어 갔지만 고통은 계속 이어졌다.

“이제 슬슬 눈이 감기시지요? 허나 아직 숨이 끊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최대한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는 약을 수소문한 보람이 있군요.”

“어찌 짐에게… 이런….”

“제 왕좌와 연모를 가져가셨으니 응당 대가를 치르셔야지요.”

단우결은 자신이 입던 의복 끝을 조금 찢었다. 그러고는 다정한 얼굴로 손을 뻗어 핏자국으로 엉망이 된 왕의 입가를 조심조심 닦았다. 일방적인 유린에 가까운 농락이었다. 상냥한 손길과는 다르게 악질적이고 험악한 말들이 이어졌다.

“오래 아파하세요. 숙부께서 지키고자 했던 사람들이 어떤 최후를 맞이하는지 저승에서 본다면, 죽어서도 영영 고통스러우실 겁니다.”

저승에서도 고통받을 임금을 상상이라도 했을까. 원녕의 표정이 기괴할 정도로 황홀경에 물들었다. 왕은 대군의 손길을 거부하려 쓰러진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그러나 힘이 거의 남지 않았기에 발버둥은 아기의 발짓만큼 약하고 희미했다.

꺼져 가는 의식 속에서 문득 왕은 대군의 말을 되짚었다. 자신 말고 또 누가 원녕의 광기 어린 증오의 대상이 될지 차마 두려웠다. 차라리 빨리 끊겨 주었으면 하는 목숨 줄이 악착같이 남아 있던 터라, 평우찬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원녕을 노려봤다.

순간 임금의 눈에 평소 단우결의 모습과는 다른 이질적인 무언가가 걸려들었다. 그것이 익숙한 징표임을 깨달았을 때, 함공왕은 마침내 짐승 같은 포효를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단우결의 허리띠와 이마 띠에 독고 가문의 문장 장식이 달려 있었다. 대군이 말한 ‘지키고자 한 사람’이 왕의 수족 노릇을 자처했던 독고가의 사람들임이 분명했다. 점점 흐릿해져 가는 시선 속에서 남자는 미련할 정도로 충성스러웠던 독고승무와 어린 영의 모습, 그리고 산산의 친우인 해완의 얼굴이 연달아 스쳐 지나갔다.

‘산산… 나의 비.’

심장을 산 채로 녹이는 것처럼 아렸다. 그토록 고대하던 혼례 날이 코앞이었다. 손을 뻗으면 새로운 삶에 닿을 수 있는 거리에서, 도리어 삶이 제 손을 놓을 줄 누가 알았던가.

“왜… 허, 허억, 왜 하필, 컥, 지금인 것이냐….”

평우찬은 너무나도 억울했다. 단우결은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함공왕을 꺾을 수 있었다. 언제나 대군부를 경계한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속절없이 죽일 거였다면, 희망을 믿지 않았던 과거에 목숨을 거둘 것이지. 한스럽고 답답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단우결은 지극히 인자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대꾸했다.

“반대입니다. 지금밖에 시간이 없었어요.”

“하, 흐, 흐으….”

“서문 공녀의 혼례식이 아직이지 않습니까. 초야도 치르기 전이니 저의 비로 삼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왕은 무어라 대답하려 했지만 도저히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뼈마디끼리 서로 맞부딪히며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죽음까지 너무나 길었다. 참담할 정도로.

단우결은 점점 온기가 빠져나가는 왕의 몸을 쳐다보며 입매를 끌어 올렸다. 꼭 입만 웃고 있는 가면을 쓴 것 같은 모양이었다.

“폐하께서 승하하시면 적통 대군인 제가 이 나라의 임금이 될 겁니다. 서문산산은 숙부님의 아내가 아닌 왕의 비로 간택된 것이니, 그녀 역시 제 것입니다.”

‘이 얼마나 명쾌한 정답인가.’

몸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기쁨을 겨우 억누르며 단우결은 깊고 진하게 미소 지었다. 왕에게 후사가 없는 것이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이었다. 책봉식이 아직 거행되기 전이라 왕비 자리 역시 공석이나 다름없었고. 그러니 함공왕이 죽으면 왕좌는 나라의 적통 장자인 자신에게 돌아갈 게 뻔했다. 임금이 되는 것은 곧 서문산산을 얻는 것과 마찬가지이기에, 이제야 비로소 평우찬에게 뺏긴 모든 걸 찾을 수 있을 테지.

“크… 하… 핫! 하학!”

단우결은 이 상황에서 들려야 할 리가 없는 어떤 웃음 소리를 들었다. 눈앞에서 평우찬이 실성한 사람처럼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웃으면서도 고통스러운 것은 여전했는지 얼굴은 일그러뜨린 채였다. 죽음을 코앞에 두고 정말 정신을 놓아 버린 건가 의심하고 있을 무렵. 마지막에 가까운 평우찬의 말이 드문드문 신음과 함께 섞였다.

“어리석구나… 네놈… 컥, 역시!”

“닥치세요, 폐하.”

얼굴에 드리웠던 미소가 거짓말처럼 삽시간에 사라졌다. 공손한 욕설이 재미있기라도 한 건지, 여전히 평우찬은 넘어가는 숨과 함께 킥킥거리길 반복했다. 이제까지 보였던 분노나 한스러움을 모두 잊은 것 같은 광증이었다.

함공왕은 마지막 힘을 쥐어짜 자꾸만 내리감기는 눈에 힘을 줬다. 혀가 굳었는지 힘도 뜻대로 움직이기 어려웠지만 유언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임금은 마지막 의지를 불살랐다.

“너는… 아무것도… 갖지 못할…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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