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화연가 (81)화 (81/126)

단우결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머릿속 언저리에서 언젠가 서문산산에게 들었던 한 마디가 신기루처럼 떠올랐다.

[대감께서 갖지 못하셨다면 처음부터 대감의 몫이 아니었던 것이겠지요. 왕좌도, 소녀도.]

남자는 분노를 참느라 잇새를 꽉 다물었다. 두 사람이 짜기라도 한 듯 같은 발언이었다. 마치 처음부터 욕심 내지 말았어야 한다는 말투. 그건 곧 진단우결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대군은 차마 눈앞에 없는 서문산산에게 화를 뒤집어씌울 수는 없어 울분의 화살을 임금에게 쏟아 냈다.

“네까짓 게 무엇이기에 감히.”

그러나 이미 왕의 몸은 빠르게 식어 가고 있었다. 미친 사람처럼 흘러나오던 웃음도 없었다. 짧았던 숨소리가 마침내 그림자처럼 잦아들었다. 원녕은 신경질적으로 손에 든 천을 내던졌다. 의식이 희미한 함공왕의 어깨를 우악스럽게 잡고 흔들었다.

“너 따위에게도 허락됐던 것을 내가 갖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냐!”

찢어 삼킬 듯한 분노였다. 왕의 몸을 거칠게 뒤흔드는 단우결의 표정은 절박했으나, 임금에게서는 어떤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힘없는 고개가 끈 떨어진 인형처럼 출렁거렸다. 입에서 다 뱉어 내지 못한 핏덩이들이 쏟아져 나와 원녕의 의복을 적셨지만 대군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집념에 찬 얼굴로 한참 동안 왕을 몰아세우다가, 그에게서 더는 숨이 남아 있지 않다는 걸 깨닫고 단우결은 그제야 내버리듯 임금의 어깨를 밀쳐 냈다.

기분이 몹시 더러웠다. 평우찬의 웃음은 명백한 조롱을 담고 있었다. 마치 대군이 모르는 어떤 함정을 미리 파 놓은 사람처럼.

‘목숨이 끊기기 전에 대답을 들었어야 했는데.’

단우결은 짧게 혀를 차며 차가운 시신이 된 왕의 얼굴을 노려봤다. 임금은 가엾게도 눈을 뜬 상태로 숨을 거두었으나 대군은 손을 뻗지 않은 채 천천히 일어났다.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을 도와 주지 않는 숙부다. 눈을 감겨 주는 자애로움 같은 건 베풀지 않아도 좋으리라.

남자는 침전을 나서기 전 얼굴을 두건으로 가렸다. 미리 준비해 둔 두건에도 역시 독고가의 문양이 금색 자수로 새겨져 있었다. 대군은 왕의 주검을 서슬 퍼런 눈으로 쳐다보다 별안간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황천길은 길 테니 너무 서둘러 가지는 마세요. 곧 길동무를 만들어 드릴 테니.”

대군은 조용히 콧노래를 삼켰다. 왕을 시해한 죄목으로 독고영에게 어떤 형을 선고하면 좋을까. 건방진 영의 얼굴이 피범벅이 될 걸 생각하니 속이 시원하다 못해 통쾌할 지경이었다.

들어왔던 것과 같은 가벼움으로, 원녕은 내실을 나섰다. 사람의 온기가 남지 않은 내실에는 끔찍한 적막만이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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