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에 탄식과 어떤 울음 소리들이 쏟아졌다. 처음에는 작았던 흐느낌이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뭉치자 오열이 되더니 이윽고 눈물이 바다가 되었다. 한편에서는 넘쳐 나는 곡 소리 사이로 수상한 웅성거림이 들렸다.
‘폐하를 시해한 진범이 독고영이라는 게 사실입니까?’
‘도주할 여지가 있으니 먼저 추포하는 것이 옳을 텐데….’
‘아비인 독고 가주가 여기 있으니 설마 어디로 도망가지는 않겠지요.’
수군거리는 목소리들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왕의 죽음과는 또 다른 결의 분노가 치밀었다. 힐끔 뒤를 돌아 가주인 독고승무 쪽을 쳐다봤다. 뻔히 들리는 말소리에도 가주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군신의 도리가 무엇보다 최우선시되어야 한다는 거지 같은 법도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가주는 반론을 하고 싶어도 우선은 금상의 죽음을 애도할 뿐, 다른 말은 애써 아끼는 듯했다.
그러나 들판에 뛰노는 야생마 같은 내 성정엔 이 모든 상황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런 일은 때를 놓치면 그대로 구정물을 뒤집어쓰게 된다. 지금 당장 잘못된 인식을 돌려놓지 않으면 영의 목숨이 위험해질 게 뻔했다.
‘임금의 죽음은 막을 수 없었지만 영의 누명을 벗기는 건 내 몫이다.’
독고영을 구한다고 죽은 사람이 돌아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망설임 없이 해내고 싶었다. 결심이 굳어지자 몸을 돌려 사람들을 향해 단언하듯 소리쳤다.
“폐하를 시해한 범인은 독고영이 아닙니다!”
“허나 폐하의 침전에서 독고 공자의 모습을 본 사람이 이미 여럿이옵니다.”
침상 앞줄에 서 있던 신료 한 명이 공손하게 대답했지만 내용은 지극히 불쾌했다. 그러자 이번엔 대군부의 창녕 대군이 조금 더 적대적인 표정으로 말을 덧댔다.
“듣자 하니 독고 공자는 오늘 아침 일찍 상 제국으로 출발한다면서요. 간밤에 폐하를 시해한 후 날이 밝는 대로 제국으로 도주하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속을 알 수 없는 원녕과 달리 창녕은 무척 호기롭고 성격 좋은 사람이었기에, 많은 귀족이 그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창녕이 앞장서 독고영을 매도하자 주변의 신료들이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나만은 알고 있었다. 창녕의 발언에 얼마나 구멍과 모순점이 많은지. 일단은 영이부터 살려야 했다. 생각을 다른 데로 돌리지 않으면 왕을 잃은 슬픔에 금방이고 함몰될 것만 같았다. 멸시를 가득 담은 눈동자로 입을 열었다.
“유감이지만 허점투성입니다.”
“예?”
말과는 달리 전혀 유감스럽지 않은 내 얼굴을 보며, 창녕은 기가 찬 듯 되물었으나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먼저 독고영을 봤다는 사람들의 말이 허점입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공자의 얼굴을 제대로 본 사람이 있는 겁니까?”
“복면으로 얼굴은 가리고 있었으나 이마와 허리띠에 독고 가문의 문장이 있었으니 신분이 증명된 셈입니다.”
“대군의 이치에 따르자면, 내가 독고 가문의 의복을 챙겨 입으면 얼마든지 독고영이 될 수 있다는 뜻이겠군요.”
이죽거리는 말투 때문에 창녕은 불쾌한 듯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면서도 딱히 반박할 말을 찾지는 못했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입을 삐죽이는 창녕에게서 시선을 거둬 청중들을 향해 선언하듯 말했다.
“누군가가 독고 공자의 의복을 구해 변장한 겁니다.”
“세가의 옷은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누가 그런 짓을….”
이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독고승무가 억울한 듯 입을 뗐다. 상중이기에 애써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어도 제 아들 걱정은 숨길 수 없었던 게 분명했다.
“쉬운 일은 아니나 공자의 의복을 얻을 만한 힘과 능력이 있는 사람이겠지요.”
내 대답에 머리가 복잡해 졌는지 독고 가주의 고심이 깊어 졌다.
“또한 만에 하나 공자가 범인이었다면 절대 궁인들의 눈에 띄지 않았을 겁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가주께서도 아시다시피 독고가에서만 전해져 내려오는 왕궁의 비밀 통로가 있지 않습니까. 그 통로를 이용하지 않고 어째서 궁인들에게 발각되었을까요. 오히려 궁인들에게 제 모습을 일부러 보여 주려는 것 같지 않습니까?”
주위가 술렁거렸다. 사실 영의 누명을 푸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치에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으므로. 그러나 모두 왕의 죽음을 앞두고 있던 터라 논리적인 사고가 불가능한 때였다. 범인은 분명히 이 틈을 노리고 있었던 것일 테지.
이때 상황을 지켜보던 원녕이 조용히 운을 뗐다.
“폐하께서 드신 차에는 독이 있었습니다. 무색 무취의 희귀한 것이라 하더군요.”
단우결의 얼굴을 보자 기분이 미묘해졌다. 물론 그는 왕가의 적통 장자이기에 이곳에 있는 게 당연했지만 이제 더는 그의 얼굴을 마주 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함공왕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내게 부탁한 것은 ‘대군부를 경계하라’라는 것이었다. 그 말 때문인지는 몰라도 평소보다 더 가시를 세운 채 대답했다.
“그래서요?”
“독초에 해박하다 정평 나 있는 독고 세녀의 서재에서 독초를 구하기는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해완이 취급하는 것은 독초가 아니라 약초입니다!”
화가 치밀어 올라 날카롭게 일갈했다. 원녕의 말에 마치 내가 오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수치심이 밀려들었다. 가문의 행보와는 관계없이 사람을 살리겠다고 열정을 부리던 해완의 노력을 한 순간의 살인 도구로 전락시키다니. 이건 흡사 모욕이 아닌가.
그러나 이런 반응을 예상이라도 했는지 대군은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조금 안타까운 목소리로, 하지만 얼굴은 전혀 유감의 색을 드러내지 않은 채 그가 대답했다.
“약초도 배합과 쓰임에 따라 독초가 될 수 있다는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시해에 쓰인 독은 무색 무취였습니다. 결코 독초 한두 개만 가지고서는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아무리 밑바탕이 되는 재료가 있다고 한들, 독고영이 그걸 직접 배합하고 만들기라도 했다는 겁니까.”
“글쎄요. 혹은 배합할 필요가 없이 이미 구비되어 있을 수도 있고요.”
자신이 직접 확인한 것도 아니면서 대군의 발언은 지극히 무책임했다. 남자는 영뿐만 아니라 해완의 명예까지 실추시키고 있었다. 머리끝까지 뻗치는 분노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이 이상 참을 수 없어 주먹을 꽉 쥐고 원녕을 향해 윽박질렀다.
“대군은 말씀을 삼가세요!”
“진정하시지요, 전하. 저는 다만 가능성을….”
“독고영은 무사이지 학자가 아닙니다. 자신이 독을 배합할 만큼의 능력은 없습니다.”
단칼에 말을 잘라 버리자 단우결은 불쾌했는지 잠시 미간에 빗금을 그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더는 무엇도 참아 줄 수 없는 나는 숨을 쉬는 것도 잊은 채 반론에 집중했다.
“독고해완 역시 지식을 갖추고 연구하는 학자이지 배합사가 아닙니다. 하나의 완성된, 그것도 왕실에서도 보기 드문 무색 무취의 독약으로 제조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주위가 다시 한번 웅성거렸다. 무리가 반으로 갈렸다. 범행의 동기도, 방법도 분명하지 않은 독고영을 범인으로 몰수는 없다는 의견과 목격자의 진술을 무시할 수는 없다는 반응으로.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확신은 없었으나 조금이라도 영의 누명을 벗길 수만 있다면 무슨 패라도 던져 봐야 했다. 애써 긴장을 감추며 입 꼬리를 비틀며 입을 벌렸다.
“게다가 당장 독고영을 추포하고 싶으셔도 제국의 협력이 필요할 겁니다.”
“제국이요?”
예상 밖의 발언에 단우결이 눈살을 찌푸렸다. 빗금 어린 얼굴을 비웃기라도 하듯 대답했다.
“지금 그는 이 나라에 없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제 점심 경에 이미 제후국을 떠났습니다. 독고영이 둘이 아니고서야 제국으로 가는 길목에 있어야 하는 자가 어찌 침전에서 폐하를 시해할 수 있겠습니까.”
삽시간에 주위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 졌다. 정적을 체감하며 두근대는 가슴을 가라앉히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다.
사실 영이 정확하게 언제 출발했는지는 알 수 없다. 분명 우리가 만난 것은 점심이고, 곧 출발하겠다고 했지만 그 이후의 종적까지는 모르니까. 최악의 경우 평우찬이 시해될 당시 아직 제후국에 남아 있을 수도 있었고.
‘정확한 확인을 위해서는 국경 검문소의 증명을 받아야 하고, 그때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벌어 둔 시간 동안 제국으로 빠르게 파발을 보내, 영의 안전을 확보하면 적어도 당장 목숨은 살릴 수 있다. 황태자가 가장 아끼는 여인의 남동생이니 신변 보호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겠지. 명예를 회복시키는 건 차차 풀어 나가는 숙제로 잠시 놓아두어도 될 것이다.
그때 원녕이 창녕에게 가만히 눈짓하는 게 보였다. 창녕이 얕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이더니,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내게 물었다.
“독고 공자는 오늘 아침 표(慓) 상단과 함께 제국으로 떠나기로 예정되지 않았습니까?”
“어제 오후 급하게 일정이 바뀌었습니다. 상단에는 오늘 이른 아침 독고가에서 사람을 보내 알릴 예정이었고요.”
“함께 가기로 한 상단에까지 말하지 못하고 급히 떠나야 할 용무가 무엇인지 무척 수상하군요. 세가의 공자로서 책임감도 염려스럽습니다.”
짓이기듯 웃는 창녕을 보며 이마에 힘줄이 빠득 돋았다. 애먼 사람을 범인으로 모는 것도 모자라 인성까지 지적질하고 있는 꼴이라니. 그러나 급히 떠나야 할 용무가 서궁에서 몰래 공수한 약초라는 걸 드러낼 수는 없었다. 누명을 벗기도 모자랄 판에 왕궁의 물건을 훔쳤다는 혐의까지 써서는 곤란하니까.
“제가 독고 세녀에게 급히 전할 물건이 있어 예정보다 일찍 길을 나선 것뿐입니다.”
“전하의 용무라니요. 이런 때에 대관절 무슨 급한 용무가 있으시기에….”
“대군.”
창녕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차분히 그의 말을 잘랐다. 엄히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그는 잠시 몸을 굳혔다. 눈매를 굳히고 천천히 턱을 들었다. 나보다 키가 큰 대군을 똑바로 직시하기란 쉽지 않았으나 기죽지 않고 어깨를 폈다.
“대군께 내 개인사까지 일러야 할 의무가 있습니까.”
“아니, 그건 아닌데….”
“정식으로 비에 책봉된 것은 아니나 나는 비이의 신분으로 대군의 어미가 되는 품계입니다. 예를 갖추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