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화연가 (83)화 (83/126)

말이 끝나자마자 남자의 표정이 어그러졌다. 입매를 꿈틀거리며 무어라고 반박을 하고 싶어 했지만 법도는 지엄하지 않은가. 결국 창녕은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휙 돌려버리는 그를 무감정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또한 독고 공자는 본래 상단의 호위로 고용된 것이 아닌 단순한 길동무일 뿐이기에 어떠한 책임도 없습니다. 오히려 대군, 이번엔 제가 묻고 싶군요. 어찌 독고영이 제국으로 특정 상단과 함께, 그것도 오늘 아침 출발할 것임을 아셨습니까.”

“그것은 세가의 공자로서….”

“말씀대로 그는 세가의 공자이기는 하나 귀족일 뿐, 나라의 존체가 아닙니다. 대군께서 알기엔 너무나 시시콜콜한 정보가 아닙니까.”

창녕은 말이 막혔는지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남자는 살짝 고개를 숙여 상황을 되짚어 보는 듯했다. 그의 눈이 조용히 원녕 쪽으로 움직였으나, 원하는 답을 얻지는 못했는지 나지막한 한숨을 뱉었다.

창녕은 다시금 천천히 고개를 들어 특유의 시원스러운 미소를 지어냈다.

“표 상단은 제국에서 비단을 직수입하는 곳 아닙니까. 이번에 상단을 통해 특별히 주문한 것이 있어 신경을 쓰다 보니 자연스레 독고 공자의 동행도 알게 되었습니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거짓임은 뻔히 알고 있었다. 대군의 물건은 곧 왕실의 물건으로, 필요한 것이 있다 해도 궁인을 중간에서 거치지 본인이 직접 관여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를 밝혀내기는 조금 복잡했다. 상단에 물어도 분명 자신들의 앞날을 생각해 되도록 대군의 주장에 입을 맞춰 주겠지. 하는 수 없이 일단은 한 걸음 물러서자는 생각으로 수긍했다.

“그랬군요.”

대신 가만히 창녕의 얼굴을 쳐다봤다. 고집이 한풀 꺾인 표정에서, 더는 영이나 해완을 헐뜯을 악의가 없는 것을 은연중에 느낄 수 있었다.

“폐하의 승하로 제가 잠시 이성을 잃었나 봅니다. 전하께서는 부디 용대를 베푸소서.”

아니나 다를까, 창녕은 이제까지의 무례를 용서하라는 듯 깊게 허리를 숙였다. 자신 역시 더는 독고영을 범인으로 몰기엔 무리가 있다고 판단한 듯했다. 혹은 대화 중간 단우결을 향해 눈빛을 보냈을 때 어떤 지원도 오지 않음을 깨닫고 승부를 접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 도대체 누가 이런 끔찍한 짓을 벌였다는 말입니까.”

존재를 잊고 있던 태의령이 다시금 코를 훌쩍이며 말을 꺼냈다. 노신의 말에 잊고 싶었던 현실에 다시 발을 들인 느낌이었다. 차라리 창녕과 말다툼이라도 하고 있었다면 이 슬픔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었을 텐데. 다시 등을 돌려 침상 쪽을 바라봤다. 태의령의 말이 그대로 머릿속에 퍼졌다. 도대체 누가, 어떻게.

“밤사이 궁궐을 지키는 시위나 궁인들은 다 어찌 된 겁니까.”

“상선의 명에 따라 최소 인원만 남기고 호위를 거뒀다고 합니다. 그나마 있던 시위나 궁인들도 침전에서 제법 떨어져 있었습니다.”

“문제의 상선은 이미 죽어 사실 정황을 물을 수 없겠지요.”

“예. 상선 역시 죽임을 당한 것인지 뒤에서 기습당한 흔적이 있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저절로 얼굴에 먹구름이 들어섰다. 속이 타다 못해 아렸다. 범인의 실마리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궁에 오는 길에 아버님께 들은 것이라고는 금상이 마신 차에 독이 있었다는 게 전부였다.

‘단서가 너무 부족해.’

그러나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현장을 가장 먼저 발견하고 정황을 파악한 것이 태의령이었으므로, 미안하지만 몹시 지쳐 보이는 태의령을 붙들고 질문을 이어 나갔다.

“폐하께서 독을 드셨다면 기미 상궁은 무사합니까.”

“예. 조 상궁은 아무런 이상이 없다 합니다. 다만, 당시 차가 무척 뜨거워 폐하께서 찬물을 떠 오라 이르셨다고….”

말을 흐리는 태의령 앞에서 다시금 눈살을 찌푸렸다. 무색 무취의 독인 만큼 다른 특성이 있을 수도 있다. 뜨거운 물에서는 효능이 없다가 찬물에서만 독성을 지니는 것이라면?

‘아니. 너무 변수가 많아.’

음독의 가장 큰 장점은 나이나 성별을 떠나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상대방을 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반대로 단점은 꼭 독을 먹여야만 하기에 어떤 이변이 생길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 와중에 온도까지 고려해야 할 변수가 된다면 정확도가 너무 떨어진다.

‘차를 식히려고 다른 그릇에 옮겨 담으면서 독을 넣은 걸까?’

물음표를 던지자마자 다시 지워 냈다. 찻잔은 계속 침실 안에 있었으니 찻물을 다른 잔에 옮겨 담았을 가능성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상선이 가지고 왔다던 찬물에 독이 들어 있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 뜬금없는데.’

이제껏 멀쩡히 금상을 보필해 오던 상선이 갑자기 왕을 시해했다는 것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무색 무취의 특이 독을 어떻게 구할 수 있었으며 왕을 죽인 동기는 무엇인가.

스스로 던진 물음에 어떤 답도 낼 수 없었다. 생각이 막다른 길에 빠지자 입술을 짓이겨 깨물었다. 비린 피 맛이 혀끝에 맴돌았지만 상관없었다. 이제는 ‘그리 몸을 함부로 하지 말라’며 입가를 닦아 주던 평우찬도 세상에 없었으므로.

‘생각을 멈추면 안 돼.’

자신에게 타일렀지만 자꾸만 머리가 굳었다. 독고영의 변론을 할 때는 그나마도 맑았던 머릿속이 다시 안개가 낀 것처럼 삐걱거렸다. 시야에 들어찬 평우찬의 주검 때문일까. 아니면 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에도 괴로워한 흔적이 역력한 이 침실 때문인 걸까.

마음이 조급해질수록 생각이 잔 나뭇가지처럼 잘려 나갔다. 이때 초조한 안색을 읽었는지 멀찍이 서 있던 원녕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범인은….”

“독고 공자가 아닌 것은 확실하지요.”

날카로운 표정을 지으며 다급하게 남자의 말을 잘라 냈다. 다시금 얼굴이 조금 굳다가, 이내 아이를 어르듯 대군이 나긋한 음색으로 말했다.

“예. 허나 전하, 범인을 특정하실 수 있겠습니까.”

독고영을 범인 후보에서는 제외했지만 그렇다고 진범이 누구인지를 찾은 것은 아니었다. 상선은 모든 의문을 껴안고 죽어 버렸고 시해 방법은 인과관계를 찾기 어려운 음독이다. 해답을 찾기가 너무나 어려웠다.

“…아니요.”

절망 어린 음색으로 툭 한마디를 내뱉었다. 너무도 답답했다. 스스로에 환멸까지 날 지경이었다. 왕실 교육관들에게 칭찬을 받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지아비가 될 사람의 억울한 죽음도 풀어 주지 못했다. 실로 자명한 무능이며 치욕이었다.

“허면 이제 침실은 정리하고 국장부터 치르는 게 좋겠습니다.”

‘뭐라고?’

단우결의 말에 눈에 핏발을 세웠다. 바람을 가를 것처럼 고개를 홱 돌려 원망스러운 눈동자로 빠르게 일갈했다.

“지금 사건을 덮자는 말씀이신 겁니까! 이곳을 정리하면 모든 증좌가 사라집니다. 범인도 도망가고요!”

“증좌는 보이는 것이 전부입니다. 전하께서 모두 보셨으나 진범을 찾지는 못하셨지요.”

“하지만!”

“…전하.”

반론하려 입을 열었지만 단우결이 조용한 음색으로 나를 불렀다. 그의 얼굴은 속상함과 안타까움이 언뜻 서려 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제 아비에 이어 숙부까지 잃은 가엾은 대군이라고 생각하겠지. 그러나 나는 저 얼굴이 오직 지어낸 것임을 안다.

“범인을 잡는다는 자기만족으로, 언제까지 폐하를 이곳에 뉘어 고통받게 만드실 겁니까.”

순간 뒤통수를 세게 맞은 듯 정신이 멍해졌다. 범인을 색출하고자 하는 일이 평우찬의 억울함을 풀어 주는 것이 아닌 나 자신의 만족을 위한 것인가.

‘왕을 시해한 범인을 찾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발바닥부터 하염없이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애써 잡아 두던 정신이 와르르 무너져 버리고 토할 것처럼 온 신경이 곤두섰다. 덜덜 떨리는 손을 잠재울 생각도 감히 하지 못한 채 주위를 천천히 둘러봤다. 긴장과 초조함 탓에 고개가 삐걱거렸지만 사람들의 감정을 대충 읽을 수 있었다. 독고영을 범인으로 신나게 몰 때는 언제고 이제는 모든 흥미가 깨져 버렸는지 대부분 사건이 어서 마무리되길 바라는 눈치였다.

‘아아, 진평우찬은 이제 왕이 아니구나.’

함공왕의 몸뚱이는 존체의 가치를 잃고 하나의 시체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빨리 수습해야 하는 일종의 일감으로. 힘이 없는 임금의 죽음이란 이토록 허망한 것이었다. 이제까지 권력의 힘을 이토록 뼈저리게 실감한 적이 있던가.

너무나 억울했다. 억울하고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사람들을 향해 소리 지르듯 말했다.

“나라의 지존께서 시해 당하셨는데 어찌 진범을 잡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범인을 잡지 않겠다고 한 것이 아니라, 현시점에서는 찾을 수 없기에….”

창녕이 한마디를 거들었지만 굴복할 수 없었다.

“찾지 못한다고 굽힐 일입니까! 이 궁을 뒤지고, 안 되면 온 나라를 뒤지고, 그래도 안 되면 대륙이라도 뒤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

심장을 산 채로 꺼내도 이보다 아프지 않을 것이다. 감정이 몹시 격해졌기에 숨을 쉬기가 벅찼다. 머리가 핑핑 돌아 중심 잡기가 어려워 살짝 휘청거리니, 바로 옆에 있던 태의령이 곧바로 나를 부축해 줬다.

겨울 바람이라도 맞은 것처럼 온몸이 후들거렸다. 무엇이라도 붙잡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거의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노신을 보며 중얼거렸다.

“태의령. 도와주세요, 제발.”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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