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화연가 (84)화 (84/126)

마지막 힘을 끄집어내, 노신의 야윈 팔뚝을 움켜쥐었다. 함공왕의 죽음을 그토록 안타까워하던 태의령이라면 승산이 있지 않을까. 아니, 단 한 명이라도 진범을 찾아낼 의지가 있는 자가 있다면 그 존재만으로도 큰 위안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남자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가까스로 잡은 동아줄마저 썩어 있었다는 절망감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속절없이 허물어지는 내게 태의령은 귓가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며 속삭였다.

“전하, 아직은 때가 아니옵니다. 몸을 낮추옵소서.”

“허나 지금이 아니면 늦는 것도 있습니다. 영영 의미를 잃는 것도 있단 말입니다.”

목소리가 물 먹은 것처럼 약해졌지만 태의령은 또다시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찾는 것이 진실이라면 늦음은 없사옵니다. 정의를 믿는 자들은 일격을 가할 때를 기다리는 법이지요. 하여 세가의 가주들을 비롯한 뜻있는 중신들 역시 지금은 나서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노신의 말에 그제야 미처 다 보이지 않았던 다른 사람들의 표정이 눈에 차기 시작했다. 창백하게 굳어 있는 아버님을 필두로 침통한 표정의 독고 가주와 혼란스러워 보이는 제갈 가주가 있었다. 그 뒤에 쭉 서 있는 자들의 얼굴을 하나씩 눈에 담자 나도 모르게 작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슬픔이 꼭 파도 같구나.’

좌절과 통탄, 분노가 뒤섞인 얼굴들이 파문이 일어나듯 일렁거렸다. 아마도 나 역시 그들과 같은 표정을 짓고 있으리라.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마구 요동쳤던 심장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나는 본래 인내심도 없고 끈기도 부족하다. 그러나 평우찬을 시해한 범인을 찾기 위해서라면 이 세상에 바닷물이 마를 때까지 기다리고 준비할 거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는 얕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긍정이 신호라도 된 건지 원녕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비이 전하께서는 아직 왕실 장례 절차에 익숙하지 않으실 테니 제가 진행을 도맡겠습니다.”

“창녕 대군에게도 말했지만 국법으로 따지면 품계는 내가 위입니다. 번거롭겠지만 절차를 알려 주시면 직접 행하지요.”

사실 단우결보다 더 높은 품계에 있다는 걸 강조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다만 억울하게 세상을 등진 임금을 위해 장례 절차라도 모자람 없이 차려 주고 싶은 마음이었을 뿐. 하지만 대군은 이를 다르게 받아들였는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대답했다.

“분명 비이의 신분은 대군보다 우위에 있으나 차기 국왕보다는 아래이지요. 폐하께서 서거하신 지금, 이 왕실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자는 바로 저입니다.”

눈이 크게 떠졌다. 당혹스러움이 아닌 일종의 충격 때문이었다. 단우결은 너무나 당당하게 자신을 차기 국왕이라 말했다. 물론 왕이 죽은 지금, 보위에 오를 인물을 대군부에서 찾는다면 단우결이 가장 적합한 인물이긴 하다. 어떻게 보면 원회왕 이후로 꼬여 버린 적통 승계를 다시 바로잡는 기회가 될 수도 있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예정이지, 저렇게 공표할 건 아니지 않나?’

동시에 어떤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현시점에서 왕의 죽음으로 가장 이득을 볼 자는 누구인가. 바로 다음 왕위를 이을 자가 아닌가. 본디 왕좌가 자신의 것이라고 바득바득 우기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설마, 아니겠지.’

진범이라는 단어와 단우결의 얼굴이 일치한 순간 재빨리 머리를 흔들어 털어 냈다. 벗으로서의 정이 모두 사라진 원녕 대군이었지만, 막상 왕을 시해한 범인이라고 생각하니 차마 부정하고 싶었다. 게다가 상대는 그냥 왕이 아니라 같은 진 씨의 피가 흐르는 자기 숙부다. 아무리 왕위에 눈이 멀었어도 천륜을 거스르는 일이 말이 될까.

‘아니. 단우결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자신을 부정했지만 머릿속 생각까지는 막아낼 수 없었다. 한 번 인물을 특정하니 모든 정황이 과녁에 맞힌 듯 뚜렷해 졌다. 쉽게 구할 수 없는 귀한 맹독, 후사가 없는 왕의 죽음, 평소 독고가를 좋게 보지 않았던 대군부, 그리고 국장을 서두르려 했던 그의 태도까지. 단순하게 생각해 보면 답은 간단했다. 시장에서 노는 아이들에게 물어봐도 쉽게 나올 만큼.

‘하지만 죄를 캐묻기에는 명백한 증좌가 없다.’

임금이 시해당할 때 어디 있었느냐고 물어 봤자 아랫것들이 입을 맞춰 주기만 하면 쉽게 빠져나갈 수 있을 거다. 무색 무취의 독 역시 단우결을 범인으로 몰고 가기엔 부족함이 따랐다. 거기에다 그의 말대로 현시점, 왕궁 내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사람은 원녕 대군이다. 심증만으로 덤볐다간 오히려 이쪽이 역풍을 맞을 거다.

‘결국 태의령 말대로 지금은 기다려야 하는 수밖에 없나.’

이제는 너덜너덜해진 입술을 다시금 짓씹었다. 만약 범인이 정말 단우결이라면 자신이 죽인 상대의 장례를 성대하게 치러 줄 리 없었다. 왕의 저승길까지도 제대로 꾸려 줄 수 없다는 죄책감에 가슴이 미어졌다.

“알겠습니다. 대군 말에 따르지요.”

허나 지금은 태의령의 말대로 허리를 낮출 때였기에. 눈을 내리깔며 짧게 대답했다. 그러자 단우결은 나의 기를 완전히 꺾었다고 생각했을까. 상중이었음에도 그는 흡족한 얼굴을 감추지 못한 채 잠시 스치듯 웃음을 머금었다. 그러나 재빨리 침통한 표정으로 얼굴을 바꾸고는 군중들을 향해 엄히 명령했다.

“서둘러 국장에 필요한 삼부를 꾸리고 관련된 모든 안건은 대군부로 가지고 와라.”

침실에 있던 모든 이들이 ‘예, 대감’ 하고 고개를 조아렸다. 그들을 따라 머리를 숙이기는 싫어서, 이제는 영영 마지막이 될 평우찬의 얼굴만 조용히 응시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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