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화연가 (93)화 (93/126)

“누가 그걸… 살아 있는 삶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남자의 목소리에 물기가 얼룩졌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기에 더없이 착잡한 마음이었다. 그러나 진실은 알려야 했으므로 말을 멈출 수는 없었다.

“대군은 그대의 어미가 살아 있는 한 그대의 충심이 자신에게 귀속되리라 여겼던 거다. 하여 말 그대로 목숨만 계속 이을 수 있는 약을 쓴 것일 테지.”

“…어떻게… 어떻게 이런….”

고장 난 것처럼 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추립은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오랜 시간을 믿고 따랐던 원녕이 자신의 뒤통수를 이렇게 후려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테니까. 나 역시 혹시 하는 마음에 노모가 먹던 약을 검토해 보지 않았더라면 모르고 지나갔을 것이다.

‘병을 고칠 만한 약재나 의술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어머니를 통해 추립을 회유하려 했던 것이 이상하게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렇다고 정말 노모의 목숨을 쥐고 흥정을 하는 건 사람으로서 할 짓은 되지 못하니까. 조금 고민한 뒤 어려운 얼굴로 입을 뗐다.

“짐의 뜻에 따라 움직이라고는 말하지 않겠다. 다만 충심을 저버린 대군의 의지를 꺾는다고 생각해다오. 그대 어머니의 병세는 서문가가 최선을 다해 보살필 것이다. 허나 대군처럼 생명을 늘려 주겠다는 약조는 할 수 없어.”

“…신에게 무엇을 원하시나이까.”

가까스로 입을 연 추립의 동공엔 생기가 없었다. 그를 회유하게 된다면 이제 거의 다 왔다는 생각에 기쁜 줄로만 알았는데. 막상 일이 이렇게 되니 어딘가 마음 한쪽이 씁쓸했다.

‘하지만 기회를 놓칠 수는 없어.’

아린 마음을 다잡고서 굳은 얼굴로 말했다.

“모든 일의 배후에 대군이 있었다는 걸 만천하에 드러내라.”

“제 주군께서 꼬리 자르기에 능한 분이라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알다마다. 허나 그대가 마음먹고자 한다면 대군을 발고할 증좌 같은 건 쉽게 확보할 수 있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지.”

짧게 코웃음을 치며 말하자 남자는 당혹감에 물들며 고개를 조아렸다. 결국 모든 건 추립의 의지에 달린 일이었다. 조금 망설이는 얼굴로 그가 다시 물었다.

“소신이 언제까지 답을 드리면 되겠습니까.”

“즉위식이 끝나는 대로. 불순 분자를 궁에 남겨둔 채 국정을 다스릴 수는 없는 일 아니냐.”

순간 비장군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안타까운 듯, 한편으로는 비웃음처럼 느껴지는 눈빛이 도발적이었다. 마치 임금으로서의 왕운을 시험하려는 듯이.

숨겨진 그의 저의를 읽기도 전에 서둘러 표정을 바꾸며 추립이 공손히 대답했다.

“허면 즉위식이 끝난 뒤 소신의 답을 드리겠나이다.”

남자의 말에 어딘가 꺼림칙한 기분을 뒤로하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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