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화연가 (96)화 (96/126)

예상과는 너무나도 다른 길을 걷게 된 나를 위해, 한 사람의 가신인 서문 가주로서가 아니라 아버지로서 마지막 말을 건네고 싶었던 거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이를 부르듯 ‘산아’ 하고 입술을 떼야 했으리라.

“예, 아버님.”

어쩐지 시큰해지는 콧등을 애써 모른 체하며 공손히 대답했다. 지난 19년간 그래 왔듯. 우리에게 서로를 이렇게 부르는 기회는 이제 두 번 다시 남아 있지 않겠지. 제 뜻이 굴절 없이 전해진 것을 안 아버지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왕도를 걷게 된 걸 후회하지 않느냐?”

“예. 전혀.”

“왕좌는 네 생각보다 훨씬 삭막하고 위험한 자리다. 앞으로 많은 날을 외로워하며 너 자신을 몰아세울 테지. 단 하루도 쉽게 잠드는 밤이 없을 것이고, 번민하고 불안해도 티를 내지 못해 속이 곪아 썩을 거다.”

이게 지금 책봉을 앞둔 딸에게 할 소린가. 어느새 뭉클한 마음은 쏙 들어가 버렸다. 예전처럼 뾰로통한 표정으로 볼을 부풀리며 툴툴거렸다.

“그리 염려스러우셨다면 진즉 말리지 그러셨어요.”

“네가 역사에 길이 남을 훌륭한 왕이 되리라는 걸 믿기 때문이다. 다른 어떤 놈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아버지는 아마도 ‘다른 어떤 놈’이 있을 대군부 쪽으로 흘끗 고개를 돌렸다. 지난번 함공왕의 칙서가 발표된 이후로 원녕과 아버지의 사이는 걷잡을 수 없이 틀어져 버리고 말았다. 약간은 홀가분한 표정으로 그가 목소리를 낮췄다.

“다른 건 고사하고 네가 군부인이 되지 않아 천만다행이다.”

그러면서 ‘설마 아직도 제 어미가 되는 임금과 부부의 연을 맺고 싶다는 미친 생각을 하지는 않겠지.’라며, 혼잣말 이라기엔 제법 큰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버지의 말마따나 같은 피가 흐르지는 않아도 근친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단은 내 입으로도 안심을 시켜 줘야 할 것 같아 양껏 어르는 말투로 대답했다.

“아버님. 만약 소녀가 대군과 혼약을 올린다고 한다면 딱 두 가지 경우뿐입니다. 거짓이거나, 아니면 소녀가 둘이거나.”

“…그러하냐.”

“예. 목에 칼이 들어와도 혼인하지 않을 것이니 걱정하지 마셔요.”

아이같이 씩 웃으며 말을 맺자, 짧은 미소가 그의 입술에 잠시 머물렀다가 사라졌다.

잠시 우리 사이에는 정적이 들어섰다. 아버지는 한 손을 내밀어 의복 소매 속에 감춰진 내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손등을 토닥토닥 어루만졌다. 아주 먼 옛날, 잠이 오지 않는다고 칭얼거리면 오랫동안 침상 옆에 앉아 등을 토닥여 주던 손길과 몹시 닮아 있었다. 소리 없이 입을 떼다 다물기를 여러 번, 마침내 그에게서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좋은 왕이 되어야 한다.”

바위보다도 무거운 말이었다. 한때 이 나라에 미래가 없다고 판단해 제국에 넘길 것까지 생각했던 심정을 헤아리자면 더더욱. 엄숙해지는 공기에 잠시 침묵하다 자신 있게 확답했다.

“소녀의 모든 걸 걸고, 그리하겠습니다.”

그제야 아버지는 모든 걱정을 내려놓은 듯 맑게 웃었다. 내실에는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다만 손등과 손바닥이 서로 다독이는 소리만 빗소리에 섞여 오래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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