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득하게 옭아매는 미소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대군은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려 더없이 다감하게 추립아, 하고 불렀다. 잠시 뒤 ‘악!’ 하고 날카로운 비명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솜털이 곤두설 만큼 익숙한 목소리였다. 심장이 쿵쿵거리며 쉼 없이 요동쳤다. 머리가 하얗게 굳으며 ‘설마’를 반복했지만, 이윽고 내실의 문이 열리고 추립이 들어오자마자 나 역시 절규 같은 비명을 토할 수밖에 없었다.
“호안!”
비장군의 뒤에는 호안이 큰 검상을 입은 채 피를 철철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이럴 땐 머리보다 몸이 더 빠른지라, 발은 어느새 그녀를 향해 내달렸지만 단우결이 막아섰다.
“무슨 짓을 한 거요! 의원을, 제발 의원을 좀…!”
호안에게 손을 뻗으며 필사적으로 곁을 향해 가려는 나를 대군은 차갑게 막았다.
그녀의 상태는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했다. 창백한 얼굴로 눈을 가늘게 뜬 채 옅은 신음을 뱉는 게, 바로 의원을 부르지 않으면 숨이 꺼질 것만 같았다. 죽어 가는 사람을 앞에 두고서도 원녕은 더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에겐 100명의 가신보다 호안의 목숨이 더 값지겠지요. 자, 이제 어찌하실 텝니까?”
울음 같은 한숨이 터졌다. 어떻게 호안의 목숨과 왕위를 고를 수 있다는 말인가. 가혹하기 그지없는 요구에 고개를 마구 저었다. 그때 호안이 흐린 호흡으로 겨우 말을 보탰다.
“폐… 하… 절대… 안 됩… 아니… 안… 안돼….”
그러면서 자신의 소매 끝을 있는 힘을 다해 움켜쥐었다. 순간 호안에게 맡겨 두었던 단우결을 고발할 증좌들이 떠올랐다. 대군이 새롭게 발표한 칙서가 가짜라는 걸 입증하지 못하는 지금,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는 건 왕족을 시해했다는 죄목뿐이기에.
‘하지만 사병들이 여길 에워싸고 있는 이상 힘들게 모은 증좌들을 뺏기거나 없앨 수도 있어.’
즉위식만 넘기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 얼마나 안일하게 믿었던가. 이럴 줄 알았다면 조금 더 면밀히 대군부를 주시해야 했다. 아니면 시기상조인 감이 있었어도 대군부를 발고할 날을 앞당겼어야 했다. 아니면 또, 또….
‘이런 후회가 다 무슨 소용이야. 호안이 죽어 가고 있는데.’
답답함에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이제까지 얼마나 많은 고비를 함께 넘겼나. 짧은 순간마다 그녀의 도움이 아니었더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다. 실질적인 도움뿐만 아니라 호안은 나를 왕으로서 믿어 준 사람이기도 했다.
[잘될 거예요. 뭐든 다!]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씩씩하게 말한 게 바로 오늘 아침이다. 백성 하나도 살리지 못하는 게 무슨 왕이고 임금인가.
[좋은 왕이 되어야 한다.]
귓가에 환청처럼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말에 나는 모든 걸 걸고 그렇게 하겠노라 약조했었다. 그 약속을, 지금 지켜야 할 때다.
한번 마음을 먹고 나자 폭풍우 쳤던 마음이 고요해졌다. 단 하루뿐이었지만 호안에게 만큼은 나는 임금이었다. 그걸로 충분하지 않은가.
‘잠깐만. 아버님의 말?’
즉위식 직전 아버지와 나눴던 대화가 번개처럼 머리에 꽂혔다.
[만약 소녀가 대군과 혼약을 올린다고 한다면 딱 두 가지 경우뿐입니다. 거짓이거나, 아니면 소녀가 둘이거나.]
몸을 타고 흐르는 전율에 신경까지 짜르르했다. 아버지를 안심시키려 농담처럼 던졌던 말이 이렇게 돌아올 줄 누가 알았을까. 아버지가 이 말을 기억하고 있을지 확신은 없지만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지금은 단단하게 붙들어야 했다.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대군을 쏘아보며 말했다.
“알았으니 의원을 불러 주시오.”
“정말입니까?”
호안의 얼굴은 절망과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반면 단우결은 자신이 해 놓고도, 정말 호안 때문에 물러설 것이라 예상하지 않았는지 눈을 가늘게 떴다.
마음이 몹시 급했다. 숨이 옅어져 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한 마디의 말다툼할 시간도 아까웠다. 주먹을 꽉 모아 쥐며 더없는 분노와 혐오를 가득 담은 채 또박또박 대답했다.
“대신 호안에게 나쁜 일이 생기면… 그땐 진짜 가만 안 둔다.”
만약을 가정하는 말임에도 ‘죽는다’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그 정도로 두려운 일이기도 했고. 법도 같은 건 깡그리 무시하고 반말로 이를 갈자 그제야 단우결은 믿음이 간다는 듯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대군은 추립에게 의원을 부르라 명하고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자, 그럼 모두에게 이 기쁜 사실을 알리러 나갈까요?”
마음 같아서는 뺨을 후려갈기고 싶었다. 그럴 수 없음에 울분을 겨우 삭이며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천천히 내밀었다. 이윽고 우리는 손을 맞잡은 채 천천히 위령궁 밖으로 걸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