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백한 한 마디에 나를 따르던 귀족들의 한탄 섞인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가주! 이렇게 포기하시는 겁니까?”
“가주까지 이리 나오실 줄은 몰랐소이다!”
아버지는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는 듯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여기 모인 모두 기억할 텐데. 서문가는 언제나 폐하의 의지를 따른다고. 나는 그 말을 지금도 지키고 있을 뿐이오.”
“허 참!”
“이거 원 뭐가 어찌 돌아가는지….”
도통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사방에서 비난이 들끓었다. 거세지는 야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버지는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두 분의 즉위식과 혼례식은 신이 앞장서 준비하겠나이다. 윤허해 주소서.”
시종일관 자신을 보며 불쾌감을 감추지 않던 서문의곤이 납작 엎드리자 단우결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자신의 승리에 도취한 듯 더없이 진한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장인이 그리해 준다면야, 더할 나위 없겠지.”
‘내가 벌린 판이지만 참 토할 것 같네.’
3류 잡극도 아니고 이런 상황을 견디기가 무척 힘들었다. 손을 맞잡고 있는 단우결이 옆에 있지만 않았어도 진짜 헛구역질을 했을지도 모른다.
‘뭐가 어찌 됐든 지금은 이 상황을 마무리 짓는 게 중요해.’
울렁거리는 속을 정리하며 가까스로 자신에게 되뇌었다. 호안의 무탈함이 확인되는 대로 어떻게든 아버지를 만나 원녕을 엄벌할 증좌를 어떻게 공표할지 논의해 볼 생각이었다. 그 역시 선위가 거짓임을 간파했으니 반격을 가할 묘안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 원녕이 혼란스러움으로 가득한 사람들을 쳐다보며 크게 말했다.
“오늘은 모두 퇴궁 해도 좋다. 허나 짐과 비에게는 즉위식 날까지 처리해야 할 일이 많으니 함께 궁에 머물겠다.”
모든 희망이 가라앉는 순간이었다. 자연스럽게 자신을 ‘짐’이라 칭한 단우결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나를 인질 삼으려는 것 같았다. 내가 궁에 머무는 이상 누구도 쉽게 자신을 거스르지 못할 거라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심란함에 맞잡은 손을 움찔거리자 깜빡하고 잊은 걸 기억해 낸 듯 대군은 능청스럽게 덧붙였다.
“또한 그간 왕궁이 소란스러웠던 만큼 안전을 위해, 사병들은 궁에 남아 호위를 계속할 테니 모두 그리 알도록.”
주위가 위험한 공기로 가득 찼다. 내가 궐에 인질로 잡혀 있는 데다 사병까지 보강된 궁은 단우결만의 난공불락 요새가 되어 버리고 말았으므로.
아버지 역시 짧은 순간 불쾌한 듯 눈썹을 찡그렸지만 이내 평소대로 무표정을 유지했다. 대신 그는 자연스럽게 턱을 들어서 나와 눈을 맞췄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라는 듯 굳건한 눈빛이었기에 조금이나마 어수선해진 마음을 다독일 수 있었다.
교차하는 시선을 끊어 내기라도 할 작정인지 대군이 내 앞을 막아섰다. 남자는 독을 품은 나비처럼 곱게 눈을 접어 올린 채로 더없이 다정한 음색으로 말을 건넸다.
“자, 이제 영화궁으로 함께 가자.”
온화한 목소리가 왠지 모르게 음험했다. 임금의 정비만이 머물 수 있는 영화궁이 왠지 창살 없는 감옥 같이 느껴져 착잡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