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화연가 (103)화 (103/126)

연조는 막사 내부를 쭉 둘러봤다. 술에 거나하게 취한 원휘왕의 목소리가 지금도 선연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원휘왕의 진심을 들었던 건, 그가 죽기 전 해의 일명절이었다. 평소보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임금은 그녀를 이런 천막에 따로 불러다 놓고 연무를 감상했다. 단둘만 있었기에 혹여나 사고가 생길까 불안에 떨며 동작도 몇 번 틀렸건만, 왕은 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오히려 홀린 듯 실언을 뱉고야 말았다.

‘할아비가 손자에게 뿌리 깊은 이기심을 남겼으니 그 죄는 백성이 질 텐데. 과욕의 연쇄를 끊어야겠지.’

상대가 일개 계집아이라는 생각에 방심한 걸까. 나이가 어리다고 듣지 못하는 건 아니었는데도 왕은 그날 위험한 진심을 흘렸다. 공녀는 이 이야기를 세상 밖으로 꺼내는 순간 목숨을 보전할 수 없으리라는 걸 직감했다. 연조는 가슴에 왕의 목소리를 묻어 두는 한편, 자신이 연모하는 남자가 이기적일 리 없다고 단정했었다.

‘그 말을 조금 더 새겨들었어야 했을까.’

옛일을 후회하는 것만큼 헛된 일은 없기에 공녀는 치미는 고소를 조용히 삼켰다. 그 사이 대군은 부쩍 얼굴이 달아올라 있었다. 수치심이었을까, 분노였을까. 혹은 둘 다인지도 몰랐다.

단우결은 몹시 목이 탔는지 술병을 잡아채듯 들어 술잔에 콸콸 따라 단박에 들이켰다. 그래도 모자랐는지 다시 술병을 집어 드는 걸 연조는 몸을 세워 겨우 저지할 수 있었다.

“너무 빨리 드시면 몸이 상합니다. 그 전에, 대감. 이제 소녀의 물음에 답해 주셔요.”

단우결이 눈짓으로 묻자 여자가 침착한 얼굴로 물었다.

“원휘왕의 병증으로 대감께서 식을 도맡아 진행했던 건국제를 기억하시지요.”

“물론. 그날 내 도움으로 공녀의 연모가 시작됐다 알려 주기도 했으니까.”

“허면 소녀가 올린 춤이 봉황무인 것을 알고 계셨습니까.”

숨 막힐 듯한 정적이 막사를 채웠다. 연조는 혹여나 원녕의 표정이 바뀔까 살피기 위해 숨 쉬는 것도 잊고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곧 대군이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연조가 도달하지 못하리라 장담했던 어떤 진실에 근접한 게 의외라는 듯. 이윽고 아이를 달래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뗐다.

“그대를 멈추지 않았다면 나뿐만 아니라 공녀 역시 일개 대군에게 임금의 춤을 봉납했다며 벌을 받았을 거다.”

“…알았다는 말씀이시군요.”

“공녀에게 언제나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는 것뿐이야.”

“…예.”

“헌데 이 사실을 그대가 혼자 알았을 리는 없고. 누가 알려 주었을까.”

회유하는 어투였지만 말 속에 숨은 위협이 칼날을 세우고 있었다. 연조는 더는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아 눈을 꽉 감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죄다 참담했다. 거짓 위로를 건네 놓고 그것이 최선이라 말하는 것부터 무시하는 발언까지 모두다.

‘얼마든지 더 일찍 알려 줄 수 있었잖아.’

어느 과거의 봄날, 연모의 이유를 묻는 원녕에게 연조는 고운 홍조를 물들이고 대답했었다. 자신을 구해 준 건국제 날 마음이 시작됐노라고. 그때 그녀에게 알려 줬어야 했다. 그날의 행동은 연조만을 위한 호의가 아니라 결국은 자신을 위한 방어책이었음을.

하지만 대군은 침묵을 택했고 연조는 슬프지만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안다. 자신이 제갈가의 공녀인 이상 호의를 받는 게 여러모로 편하고도 효용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도 망할 연모 덕에 대군부는 제갈가로부터 많은 이득을 챙겼다. 이 얼마나 이용하기 편리한 은애인지.

‘이번에도 제갈이라는 성씨가 발목을 잡는구나.’

가무를 전승해야 한다는 이유로 발목이 부러질 만큼 춤을 췄던 어린 날에도, 거짓 연정을 억지로 이어온 오늘 역시. 연조는 여전히 제 성씨가 밉고 지겨웠다. 하지만 가장 싫은 건 스스로였다. 언젠가 포목점에서 서문산산이 말한 대로, 주어진 상황에 안주하며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만 해 대는 제갈연조 바로 자신.

풍랑처럼 휘몰아치는 감정에 공녀는 속눈썹을 바르르 떨었다. 질끈 감긴 눈을 천천히 뜨며 여자는 세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녀에게는 할 일이 있었다. 적어도 자신에게 ‘이만하면 됐다’라고 칭찬할 일 하나 정도는 하고 싶었으므로. 연조는 이슬처럼 청초한 미소로 말했다.

“누구인지는 답할 수 없으나 진실을 알았으니 족합니다.”

“나를 좀 더 원망할 줄 알았는데.”

의외의 연속이라는 듯 대군은 눈을 가늘게 떴다. 자신이 아는 제갈연조라면 배신을 당했다며 울고 부수고 야단을 떨어도 이상하지 않았기에.

“이제 곧 즉위식인데 원망을 해서 무엇하겠습니까. 한 잔 올릴 테니 이로써 소녀 역시 모든 마음을 접겠습니다.”

공녀가 천천히 술병을 들어 잔에 가득 채우자 단우결이 얕은 미소로 술잔을 받아 들었다. 안 그래도 어떻게 마무리를 지을까 귀찮던 차에 장본인이 알아서 연모를 거둬 준다니 더 없는 이득이었으므로.

‘그보다 누가 공녀에게 진실을 알려 줬는지 궁금하군.’

연조는 답할 수 없다 했으나 대군은 본능적으로 그 사람이 제 걸림돌이 되리라는 걸 감지했다. 재수가 없으면 돌부리도 바위가 될 수 있는 게 사람 일 아닌가. 공녀를 잘 구슬려 불안의 싹을 제거해야겠다고 마음먹으며 술잔을 입에 털어 넣은 그 순간.

“윽!”

남자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확 일그러지며 신음을 뱉었다. 서둘러 목구멍에 손가락을 넣어 즉시 토해 내려고 했지만, 그보다 빨리 입에서 왈칵 핏덩이가 터져 나왔다. 자신이 넘긴 것이 독임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가슴을 으스러뜨리는 고통이 퍼진 다음이었다.

“설마… 네가…!”

가까스로 맞은편을 쳐다보았을 때 그는 연조의 얼굴에 냉소가 흐르는 것을 확인하고는 범인을 확신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점점 둔해지는 머리 사이로 자신과 같은 술을 마셨던 연조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는지.

“도대체… 감히… 어떻게….”

고통에 허덕이며 대군은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입가에 닦지 못한 핏물이 뚝뚝 떨어져 술잔을 빨갛게 채웠다. 불같은 노기로 남자는 연조의 멱살이라도 쥐려고 손을 뻗었지만 벌써 힘이 얼마 남아 있지 않아 허우적거리기만을 반복했다. 연조는 몸부림치는 남자를 고요한 눈으로 응시하며 말했다.

“대감이 선왕께 그리하셨듯 소녀 역시 특별한 독을 준비했습니다. 일정량 이상을 먹어야만 치명상에 이를 수 있는 독이지요.”

여자의 대답을 듣자마자 더 많은 핏덩이가 쏟아져 내렸다. 온몸의 신경줄이 타는 작열감에 마치 생지옥에 들어간 듯했다. 온몸을 인두로 지지는 것 같아 대군은 신음조차 쉽게 뱉을 수 없었다.

공녀는 조롱이라도 하듯 다정한 음색으로 말을 건넸다.

“많이 아프지는 않으시지요? 독이 퍼진 후 가장 빨리 죽음에 이르게 하는 약이랍니다.”

산 채로 뼈를 녹이는 고통을 누가 많이 아프지 않다 할 수 있을까. 숨을 쉴 때마다 고통이 진해졌기에 시원한 심호흡 한 번도 하지 못하고 헐떡거렸다. 입을 벌릴 때마다 진득한 핏줄기가 쏟아지길 반복했다.

“허… 허커… 큭!”

“쉬이. 너무 애쓰지 마세요. 곧 편안해지실 테니. 이 정도의 고통이 소녀가 한때 사랑했던 자에게 베풀 수 있는 마지막 호의입니다.”

여자의 말대로 점점 눈이 감겼다. 점점 까맣게 굳어 가는 머리로 단우결은 생각했다. 이제 겨우 시작인데. 아니, 사실 시작도 하지 않은 셈인데. 그토록 원하던 왕좌를 손에 넣고 꼿꼿하던 연정마저 부러뜨렸건만.

“어… 어째… 서….”

서문 가주도, 심지어 적국의 장수도 아닌. 쓰고 버릴 용도의 제갈연조 따위가 자신의 목숨을 해할 수 있는지. 원녕은 억울했다. 점점 어눌해지는 발음까지도 미치도록 분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이 와중에 내장이 모두 찢기는 고통이 너무도 끔찍했다.

그러자 공녀는 방긋 하고 짧은 미소를 지었다. 정답이 너무도 쉽고 당연하다는 듯,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한 잔으로 마음을 접겠다 하지 않았습니까. 어떤 연모는 죽어야 끝나기도 하거든요.”

그녀의 대답이 귓가에 닿기도 전에 단우결의 몸이 힘없이 옆으로 쓰러졌다. 선왕의 모양새보다 더 험한 꼴로 남자는 눈을 뒤집고 경련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대군의 눈동자에 빛이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원녕의 실낱같았던 호흡마저 정적으로 뒤바뀌자, 연조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코 밑에 가져다 댔다. 미약한 숨결 하나도 손끝에 닿지 않는다는 걸 깨닫자 어느새 멈췄던 숨이 한꺼번에 내쉬어졌다.

눈물 같은 건 나오지 않았다. 다만 몸이 한없이 떨렸다. 뼛속까지 찬 기운이 치미는 느낌이, 꼭 죽은 대군의 혼백만이 이곳에 남아 자신을 괴롭히는 것만 같았다. 사람을 해한 이상 고통은 손 한 뼘에, 행복은 백 보 밖에 있을 것이다.

‘행복이라.’

공녀는 사막처럼 쓸쓸한 동공으로 눈을 감았다. 건국제의 진실을 말해 주던 날, 서문산산은 아낌없이 사랑해 주는 사람을 만나 행복해지라고 조언했었다. 연조는 조금 전 온몸을 까맣게 가린 주이환을 떠올리며 힘없는 자조를 머금었다.

‘아낌없는 사랑으로 너나 행복해져.’

왜냐하면 그녀의 말대로, 연모를 뺀 제갈연조는 아무것도 남는 게 없어서. 자신을 사랑하지 못한 만큼 온 마음을 다 바친 연모마저 가짜인 까닭에. 새롭게 품을 연정 역시 거짓일까 두려웠고 행복은 이미 먼 강을 건넌 뒤였다.

공녀가 바라는 건 단 하나, 내일 아침이 오지 않는 것뿐이었다. 죽어야 끝나는 연모가 있다는 말은 진심 중에서도 진심이었다.

천막 밖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와아’ 하는 많은 사람의 목소리와 함께 쇠끼리 서로 맞부딪혀 챙챙, 하는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금친왕의 군대가 이제야 도착한 모양이었다.

‘서둘러야겠다.’

눈을 뜬 연조는 술병을 들어 제 술잔에 가득 채웠다. 투명하게 찰랑거리는 게 꼭 눈물 같기도 했다. 여자는 술에 넣고 남은 독약을 꺼내서 남김없이 술잔에 다 쏟아부었다.

독배를 들이켜기 전, 공녀의 머릿속에 몇몇 사람들의 잔상이 휙휙 지나갔다. 엄하기만 한 아버지는 과연 이 죽음을 듣고 눈물 흘리려나. 서문산산은 의외로 오래 힘들어할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에야 조금이나마 오해를 풀게 된 그녀의 악우는 생각보다 마음이 무른 사람이니까.

‘또한 많은 사람에게 지탄받겠지.’

제 행동이 이기적인 것을 알았으나 제갈연조는 누구에게도 용서를 구하고 싶지는 않았다. 왕족이나 국법 따위는 알고 싶지 않다. 오직 연정만이 이 세상의 정의였고 삶의 이유였기에. 제 손으로 지은 연정이니 제 손으로 허물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하여, 이것은 다름 아닌 제갈연조의 복수다.’

그리고 복수의 죗값을 다시 목숨으로 치르는 것뿐이라고. 여자는 무덤덤하게 되뇔 뿐이었다. 때마침 술잔에서 흰 가루와 술이 만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공녀는 망설임 없이 술잔을 들어 한 번에 비워 냈다.

곧 단우결이 겪은 똑같은 고통이 가슴을 옥죄었지만, 연조는 무릎에 힘을 주고 간신히 일어났다. 그러고는 도성이 있는 쪽을 향해 몸을 돌려 봉황무의 도입부 자세를 취했다. 서문산산에게 바치는 처음이자 마지막 연무였다.

새가 절벽에서 날아오르듯 턱을 똑바로 올리고 두 손을 높이 들었다가 다시 천천히 내렸다. 휘몰아치는 고통에 팔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발꿈치를 높이 세워 크게 뛰어올랐다. 공중에서 몸이 붕 뜨는 걸 느끼며 연조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쿵, 하고 몸이 지면으로 떨어졌을 때는 공녀에게서는 한 줌의 숨도 남아 있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