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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화연가 (106)화 (106/126)

하지만 죽은 자는 돌아오는 법이 없고, 후회를 되풀이하는 것은 오롯이 산 자의 몫이기에. 어느 때보다 무거운 심정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원녕 대군은 선왕을 시해하고 그의 왕좌를 무효로 하려 했으며, 정당한 왕위 계승권을 가진 나를 협박해 역모를 꾀했으니 그 죄가 실로 막중하오. 죽음으로 죄를 갚았으나 충분치 않으니, 왕족의 성인 진씨 성을 박탈하고 영구히 왕실 위패에서 제외될 것이며, 시신 또한 왕의 능에 묻히지 못할 것이오.”

“예, 전하.”

가신들이 일제히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장내를 쭉 훑어보던 나는 여전히 창백한 안색의 제갈은상을 쳐다보며 말했다.

“단우결은 더는 진씨 성의 왕족이 아니므로 제갈연조의 왕족 시해의 죄는 묻지 않겠소. 허나 멋대로 국법을 어기고 단우결에게 독살이라는 안락한 형벌을 내렸으니….”

주위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숨소리 하나도 넘어가지 않는 침묵이 이어진 가운데, 내 목소리가 또렷하게 궁성을 울렸다.

“오늘부터 제갈가는 세가의 명예를 내려놓고 일반 귀족으로 강등될 것이오. 이에 수반되는 모든 특권과 재산들은 왕실에 귀속시키니, 제갈 가주는 어명을 따르라.”

가주는 눈을 한 번 크게 뜬 다음 소리 없이 내리감았다. 원했던 사형 선고를 받지 못해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때로는 죽음보다 삶이 더 큰 형벌이 되는 까닭에, 그녀를 몰아세운 가주에게 연조를 대신해 벌을 내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 역시 어떤 자격도 없으면서.

씁쓸한 마음을 정리하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망설임 없는 눈빛으로 궁성에 모인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닷새간 무효화되었던 진평우찬의 지위를 다시 함공왕으로 복위시키고, 선왕의 칙서에 따라 나 서문산산의 즉위식 역시 다시 치르도록 하겠소.”

“천세를 누리소서, 폐하!”

수많은 사람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깔끔하고도 정당한 절차였기에 의혹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때 콧등에 차가운 것이 하나 내려앉았다. 문득 고개를 드니 흐렸던 하늘에서 진눈깨비가 흩날리고 있었다. 한쪽 하늘이 걷혀 햇빛이 스며들었는지 먹색 눈송이가 희한하게도 반짝거렸다.

“…사계지찬산….”

나도 모르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함공왕이 단검에 새긴 찬란한 눈송이가 도성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눈가가 시큰해져 오래된 습관처럼 턱을 높게 들어 올리고는 구름 사이를 올려다봤다.

‘폐하, 지켜보셨지요? 이제 다 끝났습니다.’

그를 향해 다짐처럼 되뇌던 말을 하늘에서 들었을까. 때맞춰 내리는 눈발이 그의 대답인 것만 같아 가슴속이 아릿하면서도 따뜻했다. 짓눌렸던 죄책감을 내려놓고 이제야 나는 가슴을 편 채 그의 위패를 마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눈송이는 비에 섞여 쌓이지 않고 금세 녹아 버렸지만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렸다. 햇빛을 담은 눈결이 꼭 축제날 흩날리는 빛 무리처럼 반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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