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화연가 (108)화 (108/126)

“그대는 억울하지도 않소?”

속상함은 나무라는 목소리로 변해 있었다. 송곳처럼 날카로웠지만 어딘가 뭉툭함을 느꼈을까. 주이환은 차분한 웃음으로 조용히 대답했다.

“하고 싶은 걸 다 하지 않았습니까. 폐하와 이 나라를 지켰으니.”

“허나….”

“게다가 저는 이미 전쟁을 원하는 폐하의 뜻을 한 번 거역했습니다. 두 번의 항명은 곧 반역이기에, 신은 아무 미련이 없습니다.”

당사자가 담담하면 듣는 이가 되려 가슴이 미어지는 법 아닌가. 금친왕의 입 꼬리에 걸린 미소가 애처로워 심장 부근이 아릿했다.

애초에 욕심이라고는 나와 관련된 것밖에 부려 본 적이 없는 남자다. 그에게서 원하는 답을 끄집어낼 것이 아니라 이번엔 내가 한 걸음 더 다가가야 할 때임을 직감했다.

짧은 심호흡을 한 번 내어 쉬었다. 어느 때보다 눈빛을 단단히 동여매고 한 마디씩 말을 끊었다.

“나는 있소, 미련. 그것도 아주 많이.”

“예?”

“또한 이 미련만은 일평생 놓지 않을 생각이오.”

금친왕의 얼굴에 물음표가 드나들었다. 갈팡질팡 길 잃은 아이같이 남자의 눈동자가 쉼 없이 흔들렸다. 내 미련에 대해 어떤 추측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예상을 한 자신을 용납할 수 없다는 듯 희망과 자책이 얼굴에서 엇갈리듯 반복됐다.

‘참 요령도 없지.’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가슴 한편에 모닥불을 지핀 듯 포근해졌다. 눈에 콩깍지가 낀다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일까. 끊임없는 연정으로 괴로워하는 그가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흔들리는 눈동자, 떨리는 속눈썹, 혈색 옅은 뺨과 얇은 입술까지 모두 껴안고 싶을 만큼. 숨이 밭아질 만큼 벅차오르는 애정에 저절로 미소 지으며 말했다.

“짐의 반려가 되어 주겠소?”

남자의 얼굴이 크게 흔들리더니 이내 바위처럼 굳었다. 마치 숨 쉬는 법을 잊은 것처럼 한참이나 미동이 없었다.

조금 벌어진 입에서 어떤 탄식이 나오다가 바람처럼 사라졌다. 괴로움을 억누르기라도 하듯 그는 눈을 콱 짓이겨 감았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거센 격랑을 감내하는 것이 느껴져, 나 역시 긴장감에 어깨를 굳혔다.

‘당연히 고개를 끄덕일 줄 알았는데?’

예상 밖의 전개에 무안한 나머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주이환의 얼굴빛을 다시 살폈을 때, 그의 얼굴엔 흐린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폐하를 도운 사례라고 하기엔 너무 큰 상입니다.”

구혼을 거절당할까 봐 내심 불안했었기에 그의 대답을 듣자마자 맥이 탁 풀려 버리고 말았다. 연심 어린 구혼이 사례로 취급되는 건 아무래도 영 기분이 나빴기에, 나도 모르게 빈정거리는 말투가 툭 튀어나왔다.

“그대는 내가 고마운 마음에 아무에게나 부군 자리를 내미는 사람처럼 보이는 거요?”

주이환은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이내 특유의 눈웃음을 지으며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숙였다. 하지만 고운 눈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꿈을 좇길 포기한 방랑자와 같이, 어딘가 젖은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폐하. 염봉 전투 당시, 신위대가 제시간보다 늦게 도착한 이유를 아십니까.”

“도성을 가로지르지 못하고 은밀하게 이동해야 했기 때문이라고 들었소.”

“예. 바로 그것이 제 위치입니다. 소신은 죽어서도 영영 이 나라의 적장일 겁니다.”

“아니 그건….”

“이제 겨우 정세가 안정돼 가고 있지 않습니까. 적장을 국서로 삼는다는 소식이 들리면 또다시 나라가 혼란에 휩싸일 겁니다.”

마지막 말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반발이 염려되지 않는 건 아니다. 진가의 핏줄도 아닌 여왕이 그것도 적장을 부군으로 맞는 것은 어쩌면 왕위가 흔들리는 위기가 될 수도 있으니까. 낯빛을 흐린 채 반박하지 않자 주이환은 금세 다정한 음색을 보탰다.

“소신은 검입니다. 저를 품으시려다 제 칼날이 도리어 폐하께 흠을 낼까 봐 두렵습니다.”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가 자그마한 실소를 터뜨렸다. 자신을 검으로 지칭하는 금친왕의 말 때문이었다. 어쩌면 꽃 같은 사람을 반려로 얻을 수도 있었다. 더 쉽고, 더 조건도 좋은 꽃으로 얼마든지 고를 수 있으리라.

‘하지만 이번에도 나는 역시 검인가.’

자신의 선택에 웃음이 흘렀다. 한결같은 취향이라 이번 생의 팔자는 나 역시 검이며, 주변 역시 온갖 뾰족한 것들로 가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릇 연모란 쇠 냄새 가득한 이 운명 역시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기에.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자신감 넘치는 미소로 화답했다.

“짐의 품은 고운 비단 천이 아니라 단단한 쇠 갑주요.”

주이환의 얼굴이 허를 찔린 듯 멍해졌다. 말을 잃은 그에게서 시선을 멀리 돌려 바깥 창문을 응시했다. 올 겨울의 막바지 눈이라도 오려는지 하늘에 잿빛 구름이 옅게 깔리기 시작했다.

함박눈을 맞을 도성의 백성들을 상상하자 빙그레 미소가 번졌다. 발걸음을 재촉하는 행상인과 눈덩이를 던지며 뛰노는 아이들, 손을 호호 불며 궁성을 지키는 문지기들까지. 여러 얼굴들을 떠올리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비단 검뿐만 아니라 무인의 활과 농사꾼의 쟁기, 나무꾼의 도끼 같은 날카로운 쇠도 모두 품어 내는 게 갑주 아니겠소. 그대 하나가 더 끼어든다고 내 품은 쉽게 찢어지지 않는다오.”

“…폐하는 그러하실지 모르나 대소 신료들이나 백성들이 반발한다면….”

“이미 지난 염봉 전투로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은 그대를 적장으로 여기지 않고 있소. 시간은 걸리겠지만 충분히 설득해 나갈 수 있소.”

먹구름에 햇빛이 한 줄기 스미듯 금친왕의 얼굴에 기쁨이 스쳤다. 창백했던 뺨이 어느새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동공에 더 없는 애틋함이 넘쳐흘렀다. 금친왕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한 걸음 더 다가가 속삭였다.

“짐이 그대에게 원하는 건 염려가 아닌 대답뿐이요. 당신의 마음이 지난날과 같은지.”

“저는….”

주이환은 말을 길게 늘였다. 내게 손을 뻗고 싶은 순간을 악물며 참았는지 주먹 쥔 손가락이 자꾸만 움찔거렸다.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그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어떤 각오가 필요했다.

금친왕을 곁에 두면서 나는 가끔 전쟁으로 잃은 두 친우의 얼굴을 떠올릴 것이다. 매년 종전 기념일이 되면 우리 사이는 남보다 서먹해 질지도 모른다. 백성이 흘린 피는 어쩌면 일생이 다 가도록 잊히지 않고 영원히 딱지가 지지 앉은 상처로 남아 있겠지. 하지만.

흐렸던 창밖에 어느새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모든 걸 하얗게 덮어 구분 짓지 않는 눈처럼, 결국 우리는 직위도 배경도 잊은 채 결국 한 운명으로 묶일 것이다.

조용히 손을 내밀어 그의 투박한 오른손을 감싸 쥐었다. 갑작스러운 손길에 주이환의 어깨가 크게 움찔거렸다. 여기저기 흉터와 굳은살이 잦은 손가락을 살살 쓸다가 슬며시 깍지를 꼈다. 꽉 붙든 손바닥에 온기를 전하며 조용히 말했다.

“나는 같소.”

“폐하….”

“이번 생애엔 이루어지지 않을 연모라고 생각했었지. 하지만 그대를 적이라 여겼던 짐의 오만은 이미 오래 전에 부서졌소. 그대를 죽음에서 지키고 손 뻗어 이렇게 움켜쥘 수 있는 곳에 닿을 수 있다면….”

금친왕의 숨이 꿀꺽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구혼한 것은 나인데 어째 그가 더 긴장한 것만 같았다. 휘청거리는 나뭇가지처럼 흔들리는 동공을 앞에 두고 다정스레 말했다.

“그대를 붙잡고 다시 놓아주지 않을 거요.”

긴장했던 남자의 분위기가 마지막 말을 끝으로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는 자유로운 왼손을 뻗어 천천히 내 볼을 쓰다듬었다. 이 순간이 꿈이라고 생각했을까. 엄지손가락으로 살갗에 닿는 손길이 무척이나 절박하고도 애달팠다. 몇 번이나 감촉을 확인한 뒤에야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 마음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음색은 떨렸지만 눈빛만은 지독히 다감했다. 당과를 좋아하는 내가 보아도 달큼함에 녹을 만큼.

깍지 낀 손을 다시금 단단히 고쳐 잡더니, 슬며시 들어 올려 내 손가락 마디마디에 살포시 입을 맞췄다. 겨울바람에 까칠해진 입술이 내 손에 상처라도 낼까 봐, 그의 입맞춤은 더없이 조심스럽고도 애처로웠다. 입술로 퍼지는 온기를 음미하며 그가 속삭였다.

“폐하께서는 죽음이 모든 연을 자른다고 하셨으나, 아마도 이 연정만큼은 끊어 낼 수 없을 겁니다.”

“…허면….”

“한없이 모자라고 미숙하나, 원하신다면 제 모든 걸 다 드리겠습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신은 영원히 폐하의 것입니다.”

꽃망울이 움트듯 미소가 터져 나왔다. 가슴이 기쁨과 사랑스러움으로 흘러 넘쳤다.

점점 얼굴이 가까워지면서 곧 입술에 그의 숨결이 맞닿았다. 단 한 명밖에 허락한 적이 없기에 주이환과의 입맞춤은 더없이 익숙하면서도 깊었다. 아낌없이 빼앗긴 숨이 달고도 질었다.

바깥은 아직 한겨울이기에, 깍지를 낀 그의 온도가 아직은 차갑기에. 여러 가지 이유를 덧대면서 우리는 세상에 단둘만 남은 것처럼 빈틈없이 맞물렸다. 마치 처음부터 짝이 맞게 태어난 것처럼 어느 한 부분도 채워지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밖에 내리던 눈이 완전히 그칠 때까지, 우리는 오래 미뤄 둔 입맞춤을 몇 번이고 이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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