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하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사과를 받아야겠다는 듯 폴리우스는 목소리를 다시 한번 높였다.
“다미안 자식만 문제가 아니야. 어떻게 약혼자를 두고 다른 남자들이 낫다는 둥 비교를 할 수가 있어?”
나는 여상하게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당신도 클라라 마르티스 영애나 조세핀 잉그다 영애…… 또 누구더라. 다른 여자들하고 날 비교하고 다녔잖아요?”
“폴리우스 영식께서는 참 복이 많으십니다. 클로틸드 영애께서는 결혼하면 참 좋은 부인이 되실 것 같아요.”
“하하, 멜라니는 좋은 여자지만 요리는 조세핀처럼 못 할 것 같군요. 뭐만 하면 아프다고 눕지 않습니까.”
음, 그때만 그런 것이 아니지. 비교한 일은 또 있었다.
“클라라 마르티스 영애는 다 좋은데 가문이 좀 처져서……”
“그렇지만 멜라니처럼 가문의 힘 덕에 고개가 빳빳한 것보다 낫지 않습니까? 저는 역시 상냥한 여자가 좋더라고요.”
세어도 세어도 끝이 없군.
예전에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 안절부절못하면서 폴리우스에게 더 좋은 여자가 되려고 애썼다.
‘모두 부질없는 노릇이었지.’
나는 턱을 치켜들며 팔짱을 꼈다.
“당신은 해도 되고 왜 나는 하면 안 되는데요?”
“정말 질린다. 지금 네 잘못에 내 과거까지 끌어오면서 똑같다고 말하는 거야? 그냥 잘못했다고 말하면 안 돼?”
오, 항상 본인만 착하고 나는 나빴지. 평소에 자신에게 접근하는 다른 여자들에게는 그러지 못하면서 이럴 때만 단호하다.
“폴리우스, 당신과 나는 크게 다르죠. 당신은 약혼녀인 나를 비교한 거지만, 난 전 약혼자를 말한 거니까. 우린 파혼한 사이잖아요?”
“사과하기 싫어서 이상한 소리 하는 건 그만해. 멜라니 너답지 않아.”
“나는 당신에게 이별을 고했어요, 폴리우스 벨데르트. 당신의 여성 편력을 참을 수가 없어서.”
폴리우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헤어졌다니, 누구 마음대로? 난 절대 못 받아들여!”
“못 받아들이면 어쩌려고요? 저번에 이어서 두 번이나 말해 줬는데 얼마나 멍청한 것인지 모르겠군요.”
나는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에 냉정하게 말했다.
“난 이제 당신 약혼녀가 아니니까 내가 누구를 입에 담든 상관하지 말아요. 다음부터 공작성에 멋대로 찾아오지도 말고.”
“하. 내가 아픈 사람 도와줬다고 이렇게 변해? 그동안 본모습 숨기느라 힘들었겠네. 네가 이렇게 독한 여자인 줄 몰랐어.”
독하다고? 그렇겠지. 나는 여태까지 항상 폴리우스에게 싫은 소리 한 번 안 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소설을 통해 제삼자의 시선에서 나를 봤어.’
그동안 아무리 호구로 지냈어도 남자 하나 때문에 가문을 말아먹고, 나에게 잘해 주신 아버지에게 대못을 박는 미래를 안다면 달라질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전생의 나도, 멜라니 클로틸드도 순종적이기만 한 여자랑은 거리가 멀었다고.
‘이게 진짜 나야.’
폴리우스에게 좋은 모습만 보여 주고 싶다는 강박을 벗어던진 지금이.
“더 독해질 수도 있는데, 원한다면 보여 줄까요?”
나는 도발에 말려드는 대신 고개를 기울이며 입꼬리를 올렸다.
“이제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닌데 나한테 반말 쓰는 건 그만두죠. 솔직히 공작가와 백작가는 격이 다르지 않나? 물론 당신은 평범한 백작가 영식이 아니기도 하고.”
이 정도면 예전처럼 분에 못 이겨 자리를 박차고 떠날 줄 알았는데…… 폴리우스는 뜻밖에 고요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멜라니 클로틸드 너, 나 없이는 문제가 생길 몸인 거 몰라?”
“뭐라고요?”
“네가 먹어야 하는 그 강력한 진통제들, 하나같이 부작용이 엄청난 것들이라며. 지금 두 다리로 서 있으니까 그래도 살 만한가 보지?”
순간 뒤통수를 세게 맞은 것 같았다.
“어차피 넌 나를 찾아오게 되어 있어. 내가 좋은 말로 사과할 때 받아 줬으면 좋았잖아. 내가 너를 축복해 주지 않는다고 마음이 바뀌면 어쩌려고 그래?”
그래도 한때, 폴리우스는 내가 모든 걸 바쳤던 사람이었다.
고통에 못 이겨 발작을 일으키는 내 모습을 한두 번 본 게 아니면서 지금 아픈 걸 가지고 협박하는 건가?
“내가 너에게 그동안 너무 잘해 줬지? 착한 남자가 화나면 무서운 법이라는 걸 알았으면 좋겠네.”
“당신……”
“멜라니, 이게 다 너를 생각해서 그러는 거야. 그런 만큼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거고.”
폴리우스는 그대로 응접실의 문을 열고 나갔다.
‘헤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건 사랑하기 때문 아닌가? 그런데 사랑하는 여자에게 이렇게 대한다는 게 말이 되나?’
내심 내가 한 말에 폴리우스가 충격을 받고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었다.
난 미움받기 싫어서 폴리우스에게 항상 순응했으니까. 고개 한번 저은 적 없었으니까.
내가 다른 여자와 있는 게 불만이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으니까 폴리우스도 문제점을 몰랐을 수 있다고.
그래서 내가 강하게 나오면…… 조금은 행동을 고칠 거라고. 나를 잃기 싫다면 그럴 거라고.
그런데 아니었다.
폴리우스는 날 사랑해서 헤어지기 싫은 게 아니었다.
‘다른 여자와 한 침대에 있는 걸 들켰으면서도 숙이지 않는 건 역시 내게 그의 축복이 필요한 걸 알아서……’
폴리우스는 내가 자신을 저버릴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거다.
내가 평생 모든 것을 바친 사람은 이런 남자였다.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듯이 머릿속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런데 멍하니 있던 나를 깨우는 목소리가 있었다.
“아가씨, 제가 생각하기엔 먼저 사과하시는 게 맞으실 것 같습니다.”
내가 사과하지 않으면 폴리우스에게 고통을 줄여 주는 축복을 받지 못하니까 걱정하는 거겠지.
“고마워. 하지만……”
“솔직히 이번 일은 아가씨께서 철이 없으셨습니다. 폴리우스 영식께서 많이 상처받으셨을 겁니다.”
돌아보니 그곳에는 화를 애써 삭이는 호위 기사의 모습이 있었다. 폴리우스의 몇 안 되는 미담을 듣고는 그에게 과잉 충성을 바치는 이놈.
‘이건 또 무슨 말이야.’
그러고 보니 잊을 뻔했군.
‘감히 공작성의 문을 함부로 열어 주다니?’
충성은 지켜야 할 사람에게 바쳐야지, 왜 엉뚱하게 다른 집 영식에게 바친단 말인가.
그놈의 주인공 버프.
“먼저 찾아왔을 때 받아 주시는 게 자존심이 덜 상하는 길이기도 하고……”
“그래, 경도 그동안 참 수고가 많았지.”
갑작스러운 내 칭찬에 호위 기사의 눈이 커졌다.
“예? 감사……”
“하지만 오늘 자로 자네는 해고야. 아, 기사실에 들러서 처벌은 받고 가게. 퇴직금과 추천서는 당연히 없고. 어쩌면 기사 작위마저 박탈될지 모르겠군.”
풀어졌던 호위 기사의 표정이 다시 다급해졌다.
“아, 아가씨.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허락도 받지 않고 외부인을 들여 내 안전을 위협하다니. 참으로 유감이야.”
“저는 그게 아니라!”
나는 호위 기사를 보며 웃었다. 그리고 문을 열고 신호를 보내 다른 기사들을 불렀다.
사색이 된 그는 허겁지겁 변명을 덧붙였다.
“저, 저는 아가씨의 행복을 위해서 폴리우스 영식과 화해시켜 드리려 한 것뿐인데!”
“그걸 보고 쓸데없는 오지랖이고 주제넘다고 하는 거야.”
전 약혼자를 다른 곳도 아닌 내 방에 보내? 폴리우스가 눈 돌아가서 무슨 일이라도 저질렀으면 어쩌려고?
나는 환하게 웃으며 손짓했다.
“끌고 가.”
“아가씨이이!”
응, 귀찮은 놈은 일단 하나 처리했고.
폴리우스도 지금 당장은 회피하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헤어진 걸 받아들이겠지.
주위에 여자들이 그렇게 많으면서 싫다는 나는 놓아주지 않으려는 모습 참 아름답다. 끝까지 이용해 먹겠다 이건가.
내가 만나려고 할 때는 그렇게 만나 주지도 않았으면서 말이야.
‘일단 내 주위부터 정리를 해야겠어.’
난 폴리우스와 관련된 내 일상을 하나하나 바로잡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보낸 것에 비하면 약소하기 이를 데 없는 그의 선물을 버리고, 성의마저 별로 없는 편지도 불태우고, 그와 함께 가려고 준비했던 여행 계획을 취소했다.
‘무엇보다 폴리우스와 얽힌 재산이 있나 확인해야 해.’
지금까지는 주로 현금만 주었기에 큰 문제가 없었으나 최근 폐광산을 거래했다.
혹시나 해서 전문가를 불러 거래 관련 서류를 검토하니, 내가 빚을 갚아야 한다는 문제만 있을 뿐 폴리우스가 구매한 광산은 오롯이 내 것이었다.
폴리우스가 대출이 안 나온다는 이유로 내 명의를 쓴 것이 다행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는 폐광으로 보이는 이 광산에서 사실 마력석이 나온다는 걸 알지.’
내가 그와 파혼한 이상 이제 폴리우스가 마력석으로 부귀를 누릴 일은 없다. 그렇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폴리우스와 얽힌 것들을 정리한다는 말을 들은 집사가 넌지시 말했다.
“저기…… 폴리우스 영식의 어머니신 밀라 부인께서 말입니다.”
그래서 폴리우스의 어머니가 나를 이용해 하려던 짓도 빠르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 * *
폴리우스의 어머니는 벨데르트 백작의 아이를 낳았지만 백작 부인이 아니었다. 백작 부인이 죽고 난 후에도 정실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를 그저 밀라 부인이라고만 불렀다.
“흥, 허울뿐인 지위. 실질적으로는 내가 백작 부인인 거 아냐?”
강한 척해 보아도 치솟는 불안함을 견디기 어려울 때면 자신의 권력을 눈으로 확인하는 게 최고였다.
“성함을 말씀해 주시면……”
“내 며느리 될 애가 클로틸드 영애야. 공작의 하나뿐인 외동딸이라고, 응?”
“밀라 부인을 몰라뵙다니! 죄송합니다, 신입 직원이 실수를 했군요. 제가 단단히 교육하겠습니다.”
그녀에게 이름을 물은 직원을 혼내며 나타난 다른 남자는 허리를 숙이다 못해 절을 할 지경이었다.
벨데르트 백작에 의해 폴리우스는 백작 부인의 아래로 입적되었지만, 그렇다고 폴리우스가 벨데르트 백작가의 후계자인 건 아니었다.
그래서 밀라 부인은 신분이 높은 멜라니의 이름을 파는 것을 더 즐겼다. 그쪽이 훨씬 명성이 높으니까.
밀라 부인은 자신을 반겨 주는 직원들을 보며 한껏 권력의 힘을 느꼈다.
“흥! 나도 못 알아보는 안목으로 제대로 된 물건이나 들여놨겠어?”
밀라 부인은 보란 듯이 옆에 있는 의상실로 향했다.
“어서 오십시오, 밀라 부인!”
입구에 서 있던 의상실의 직원은 과장 되게 예의 바른 인사를 했다.
힐긋 곁눈질하니 아까 전 밀라 부인을 몰라본 직원이 안타까움에 발을 동동 구르는 것이 보였다.
‘멍청하기 짝이 없군. 나 같은 사람을 몰라봐?’
보란 듯이 최고의 매출을 올려 더더욱 속이 문드러지게 해 주리라. 그렇게 되면 자신을 못 알아본 직원은 두고두고 혼이 나겠지!
“정말 잘 어울리십니다. 이런 드레스는 아무도 소화 못 할 거예요!”
“어머, 아부는.”
밀라 부인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우아하게 칭찬을 받아들이려 애썼지만 그러기엔 칭찬을 너무 좋아하는 그녀였다.
“새로 들어온 이 보석은 어떠세요? 보시다시피 크기며 세공하며 너무 화려해서 아무에게 권하는 건 아닌데 부인께는……”
“어머.”
결국 밀라 부인은 직원이 권하는 물건들을 모두 사겠다고 결정했다.
그녀는 멜라니의 앞으로 외상을 달려고 했다. 아무리 벨데르트 백작이 자신을 아낀대도 백작 부인이 아닌 이상 주는 돈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뭐, 이러면서 멜라니가 나에게 점수도 따고 좋은 거지.’
그런데……
“저, 죄송하지만 클로틸드 영애께서 더 이상 외상을 다는 걸 막으시겠다고……”
“뭐라고? 그럴 리가 없어!”
자신을 못 알아본 자들의 콧대를 눌러 줘야 하는데, 이게 무슨 망신이람! 아까 그자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비웃을 걸 생각하면 머리가 띵해졌다.
그뿐만이 아니다. 만약 이 일이 소문 난다면 역시 정부 출신이니 뭐니 악독하게 깎아내리는 무리에게 빌미를 주고 말 것이다.
‘뭔가 착오가 있는 게 분명해!’
부끄러움에 오히려 더 화를 내며 의상실을 나섰다.
‘얼른 멜라니를 만나서 일을 해결해야겠어.’
그 길로 밀라 부인은 클로틸드 공작성으로 향했다. 멜라니에게 아랫사람을 어떻게 단속했길래 이런 일이 생겼느냐고 한 소리를 할 예정이었다.
‘그러면서 사과의 의미로 보석을 더 받아야지.’
그러나 그녀를 박대하는 건 의상실과 보석상의 직원만이 아니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내가 멜라니의 시어머니 될 사람인데! 이렇게 날 막아도 되는 거야?”
무려 클로틸드 공작성에서도 그녀는 예상외의 취급을 받았다!
“그 멜라니 영애께서 출입을 불허하셨습니다.”
자신을 막고 선 기사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렸다. 그 모습이 묘하게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아 밀라 부인은 얼굴을 붉혔다.
“이게 대체!”
가게에 이어 무슨 망신이람! 밀라 부인이 가빠지는 숨을 애써 참는데, 기사가 덧붙였다.
“그리고 아가씨께서는 폴리우스 영식과 헤어지셨다고 들었습니다만.”
“뭐?”
밀라 부인은 저도 모르게 벌어진 입을 황급히 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