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전에 말씀드렸던 구상안 말인데요……”
멜라니는 자신이 계획한 영상석 사업의 구상안을 다미안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현대의 OTT 서비스에서 영감을 얻긴 했지만, 이 시대의 기술력으로 인터넷을 구축해서 스트리밍을 하는 건 무리였고.
최종적으로 멜라니는 OTT 서비스를 오프라인으로 옮긴 느낌의 타협안을 내놓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영상석은 DVD 플레이어 같은 단말기가 필요하지 않으니까 진입 장벽도 낮았고, 공간의 제약에도 받지 않았다.
“또, 배송 서비스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직접 극장에 들르지 않아도 된다는 영상석의 최대 장점을 극대화하려는 전략이죠. 전에 한 번 말씀드렸지만, 클로틸드 상단이 유통망은 훌륭하답니다. 그걸 이용하면 될 거예요.”
사람들은 평소에 멜라니를 보며 창백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미안 마탑주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몸이 좋지 않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전에 말씀드린 개념인 ‘알고리즘’은 고객의 취향에 걸맞은 영화를 추천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요.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아요. 고객의 취향을 알고 있으면 훗날 영상을 제작할 때 가장 선호에 부합할 영상물을 만들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지금 멜라니의 눈은 그 누구보다 반짝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그의 앞에 건강하기 짝이 없는 다미안보다 더.
“저는 영상석에 연극을 담고, 배송을 하는 걸로만 끝나고 싶지 않거든요.”
“그럼……”
“네, 맞아요. 저는 검은 달에서만 볼 수 있는 영상물도 자체 제작하고 싶어요. 극장에서 볼 수 없고, 영상석으로만 볼 수 있는. 영상석에 걸맞은 영상물이요!”
멜라니는 현대의 영화, 드라마 같은 영상물 제작을 계획하고 있었다.
영상물을 만들면 단순히 영상석 제작, 유통의 역할에만 머무르지 않게 된다.
“이런, 제가 방금 전에는 너무 흥분해서 목소리가 높아졌네요. 죄송합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오히려 보기 좋았습니다.
다미안은 속으로만 대답했다.
‘영상석은 극소수의 귀족들이 정말 중요한 순간에만 쓰는 용도였는데.’
다미안의 집안인 벨데르트 백작가에서는 극단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다미안 역시 연극을 꽤 자주 보고, 제작진과 만나 보기까지도 했다. 연극무대의 뒷모습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런 다미안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발상이, 그보다 더 생생한 열정이 멜라니에게는 있었다.
그래서일까, 좀 감화되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영상석을 넘어, 연극이라는 문화를 귀족이 아닌 다른 사람들까지 대상으로 삼은 것도 놀랍군.’
멜라니는 영상석에 쓰이는 마력석의 품질을 낮춰 대중화하자는 전략을 밀고 있었다.
“마탑주님의 생각은 어떠세요?”
“저 역시 기발한 생각인 것 같습니다.”
다미안은 잠시 침묵했다가 입을 열었다. 스스로 느끼기에는 무미건조하던 평소의 목소리보다 생기를 띤 것도 같았다.
원래 성공에 대한 집착만 있을 뿐, 딱히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던 자신인데.
의견을 물어보니, 뭐라도 대답해야지 싶은 마음에……
‘게다가 내 편을 들어 줬었지.’
지난번 카페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폴리우스를 좋아하는 한 영애가 찾아왔었다. 그 영애에게 한 멜라니의 말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불륜으로 태어난 사생아 마음 따위, 본처 아들의 입장에서는 안 궁금할 것 같은데요. 차라리 다미안 마탑주님 마음을 헤아리는 게 정상적이지 않나요?”
그리고 무작정 편을 드는 게 아니라, 자신의 편에 서서 처지를 헤아리기까지 한 것도.
마탑의 마법사가 보냈던 연락은 짤막한 것이어서 일찍 돌아갈 수 있었지만, 차마 그 말을 듣고 바로 멜라니의 앞에 설 수가 없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괜찮아요. 자리를 비운 건 그렇게 긴 시간도 아니었고.”
아마 상대는 자리를 비운 것을 양해해 준다는 의미로 받아들였을 거고, 실제로 의도한 것도 맞았지만……
“벌써 시간이 다 되었네요. 그럼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시죠. 힘들긴 하지만 앞으로가 참 기대돼요. 마탑주님도 그러시죠?”
“……네.”
원래는 폴리우스의 약혼녀, 사교계에서 평판이 좋지 않은 공작 영애. 그 정도의 인상일 뿐이었던 전혀 엮일 일 없던 상대.
그 상대와 지금 서로 미래를 이야기하면서 함께 있다는 게 신기했다.
함께할 사업뿐만이 아니라, 약혼 이야기까지. 정말 총체적인 미래를 말이다.
불행한 부모를 보고 자라 결혼 생활에는 아무런 기대감이 없었던 그가. 약혼 이야기가 나오면 단숨에 잘라 버렸던 자신이……
아무리 계약이라지만 약혼 이야기가 나온 상대와 계속해서 만나고 있다니.
‘비록 감정 같은 건 없는, 서로의 필요에 의한 계약 약혼일 뿐이겠지만.’
두 사람은 서로 결혼까지 가지 않는다. 이미 서로가 필요에 의해 만난 사이라는 걸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결실을 맺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서 만나는 관계가 편하다는 것에 약간의 감흥이 일었을 뿐이다.
‘계약 약혼, 진행한다고 해도 그리 나쁘지 않을지도……’
* * *
계절이 바뀌었다는 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프하이젠 제국의 7월은 그다지 더운 편도 아닌데. 밖에는 잘 나가지도 않는 마법사들까지도 옷차림이 가벼워졌다.
하지만 나는 무심코 그들의 옷차림을 따라 했다가 감기가 걸릴 뻔했다. 가끔 일에 집중하다 보면 내가 추운지 더운지도 신경 쓰지 못할 때가 있다.
‘이제 또 며칠이 지나면 8월이 된다니. 시간의 흐름이 너무 빨라서 당황스럽다.’
그동안 나는 여러 가지로 바빴다. 다미안 마탑주와 정식적으로 계약서를 작성하고 영상석 사업에 대한 전반적인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영상석 구독 서비스를 하는 사업체의 이름을 ‘검은 달’로 명명하고 로고까지 구상한 후 함께할 직원들도 뽑았다.
물론 아직 모든 것이 시작 단계에 불과하다는 걸 안다. 아직도 만나야 할 사람이 많고, 체결해야 할 계약도 산더미였다.
해야 할 일은 많은데 몸뚱어리는 한 개고 병 때문에 몸이 좋지 않은 게 원망스러웠다. 직원을 뽑아도 나밖에 하지 못하는 일이라는 게 있었다.
나는 마법사들과 기술 개발을 주로 하는 다미안 마탑주와 달리 마케팅과 문화 쪽을 맡았다.
‘오늘은 영상석에 들어갈 연극 계약을 마무리 짓고, 계약에 동의한 연극 중 하나는 영상석 녹화에 들어가는 중요한 날이니까. 바쁘게 움직여야 해.’
최근 무리해서 피곤한 몸을 겨우 움직인 나는 주섬주섬 서류를 챙겨서 아침 일찍 밖을 나섰다.
영상석 출범을 위한 연극 계약이 쉽지 않았던 처음에 비하면 놀랄 만한 발전이었다.
처음에는 정말 쉽지 않았다.
“영상석이라니. 그게 뭡니까?”
“연극을 녹화해서 영상석으로 판다고요……?”
“판매 수익을 떼어 주겠다고요?”
“그게 돈이 얼마나 되나? 괜히 귀찮은 일만 생길 것 같은데.”
극단 주인들은 영상석에 연극을 담는다는 이야기에 희한하다는 반응을 했다.
긍정적인 반응을 내비치는 곳은 드물었다.
내가 클로틸드 공작가의 영애가 아니라면 내 이야기를 들어 보려고 하지도 않았겠지. 그나마 내 위치 때문에 어린 영애가 별짓을 다 한다는 듯 고개라도 끄덕이는 것이다.
“아아…… 좋아 보이긴 합니다만. 저는 역시 연극은 극장에서 보는 게 맞다고 생각해서요.”
“제가 나이가 들다 보니 꽉 막혀서. 허허, 어린 아가씨와는 조금 다른 생각이 드네요.”
하지만 예상한 바였다.
소설에서도 폴리우스는 냉담한 반응에 영상석용 콘텐츠 계약을 하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으니까.
“아니, 제가 보기엔 분명 성공한다니까요? 제발 한 번만 다시 생각해 주세요!”
하지만 난 폴리우스처럼 별 체계적인 설명 없이 감정에만 호소하거나 막연한 가능성을 제시하지 않았다.
“연극에 관심이 있지만, 극장에 오는 것을 불편해하는 사람들의 수요를 잡는 겁니다. 제가 예상하기에는……”
처음부터 잘 짜인 사업 설명서를 준비해서 내밀었으니까.
“그리고 보시다시피, 이건 마탑과 제휴해서 만든 마법 아티팩트인데……”
영상석이 낯선 산업이라는 것을 고려해, 영상 샘플을 만들어 보여 주기도 했다.
“호오, 이렇게 보니까 생각보다 괜찮긴 하네요.”
“영상석은 커다란 축제 때나 가끔 보는 건데, 이렇게 작게 개발하다니. 정말 대단하네요. 그렇다면……”
그리고 그들이 건네는 질문 하나하나에 성의 있고 분명하게 대답했다.
나는 건드리기만 하면 영상석 사업에 대한 설명이 술술 나올 정도로 공부하고, 또 공부했다.
어린 고위 귀족 영애가 심심해서 사업을 한다는 편견을 벗으려 일부러 말투도 가다듬고, 여유 있고 노련한 인상을 주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내 노력은 결실을 맺어서 오늘 이렇게 계약에 성공했다.
“크흠, 그렇지 않아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수두룩하긴 했으니까요.”
사람이 몰려들어 관객을 더 받고 싶어도 받지 못하는 인기 연극도.
“안 그래도 사람 없는데…… 추가 수익이 생긴다면 좋지.”
“여기가 접근성이 안 좋아서 그렇지, 연극의 질은 뛰어나다니까요? 보면 무조건 좋아할걸.”
연극의 작품성에는 자신이 있지만 홍보가 잘되지 않아 인기를 얻지 못한 연극도, 수월하게 계약할 수 있었다.
어쨌든 추가로 돈을 벌 수 있다니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아,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 연극은 무조건 안 됩니다.”
“계약금을 드린다고 하더라도요?”
그리고 내 설명을 혹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돈을 내밀었다.
물론 계약금을 받는 대신 수익 배분율 조정을 했지만, 상대는 더 좋아했다.
“영상석 산업 같은 게 잘 먹힐지는 모르겠지만…… 돈을 주신다고 하니. 감사하게 받아야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영상석용 콘텐츠 계약은 순조롭게 진행 중이었다.
하지만 나와 함께 극단을 돌아다니면서도 여전히 의문을 가지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연극을 직접 보러 오지, 굳이 값비싼 영상석으로 보려는 사람이 있을까요?”
사전 조사를 위해 함께 온 마탑의 마법사였다. 그는 내가 내미는 계약금의 규모를 보며 걱정 어린 표정을 지었다.
콘텐츠를 모은답시고 계약금을 주다가 오히려 손해 보는 것 아니냐는 타당한 질문이었다.
“괜찮아요. 그들의 수익 배분율을 낮췄으니 길게 보면 우리는 오히려 이득이에요.”
이건 사실 이미 소설에서 한 번 성공한 사업이었다. 폴리우스를 통해 검증이 끝났지.
‘그런데 폴리우스는 마력석 광산과 영상석이라는 훌륭한 사업 아이템을 가진 것치고는 이익이 너무 적었어.’
폴리우스는 초반에 영상석을 낯설게 여기는 사람들을 쉽게 설득하지 못했다. 게다가 콘텐츠 역시 그다지 모으지 못해서 처음에 영상석을 접했던 사람도 쉽게 떨어져 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엔 주인공 버프를 받아서, 나와 또 다른 어장 속 물고기들이 도와준 덕분에 어찌어찌해 냈지만…… 굳이 그 미련한 답보를 흉내 내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폴리우스처럼 주인공도 아니니 대단한 행운은 따르지 않을 거야. 그러니 준비를 더더욱 열심히 해야 해.’
그래도 폴리우스보다 성공할 자신은 있다. 영상석을 나처럼 바라고, 생각한 사람도 없을 테니까.
‘윽, 오늘 너무 무리했나. 머리가 어지러워.’
계약 마무리를 한다고 이곳저곳 돌아다닐 것을 대비해 약을 왕창 먹은 후폭풍이 몰려오나 보다.
만약 성녀가 나타나는 시기를 알지 못했다면, 부작용이 올 걸 알면서도 약을 이렇게 먹지 못했을 거다.
인간 진통제인 폴리우스가 없으니 더더욱.
‘하지만 당분간의 몸은 좀 상해도 돼. 성녀가 다 고쳐 줄 거야. 그럼 이만 약속 장소로 가 볼까?’
그렇게 극단과의 계약을 마치고 움직이려는 그 순간…… 반갑지 않은 얼굴을 만났다.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말이다.
“어머님, 정말 이게 마음에 드세요?”
“호호, 정말 좋구나!”
폴리우스의 어머니인 밀라 부인과 스칼렛의 생일 파티에서 나에게 시비를 건 조세핀 잉그다 영애.
내 앞에 나타난 건 사이가 좋아 보이는 두 사람이었다.
“어머…… 이게 누구야? 이런 곳에서 마주치다니. 대단한 우연이네.”
“그러니까요. 클로틸드 영애를 여기서 볼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