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어휴, 그쪽은 우리가 <13번째 기사>를 무대에 다시 올리지 않은 걸 영광으로 알아야 할 거야. 그렇죠?”
“아하하……”
그러다 제작진 중 하나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
“그렇다면 저희가 좀 더 나은 연극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이번 작품 예산을 조금 늘려 주시면……”
“아니, 고작해야 신생인 다미안이랑 멜라니 상대로 질 것 같아요? <13번째 기사> 때랑 똑같은 예산인데.”
“그게 아니라.”
“이제까지 <13번째 기사>만큼 대박인 건 다시 안 나왔잖아요. 그런데 내가 여기서 더 예산을 늘릴 수 있겠어요?”
“그, 예산이 부족해서 연출이며 장비가……”
“인간적으로 돈 탓하지 맙시다. 사실 열정과 노력이면 안 될 것도 없잖아요.”
“…….”
하지만 그 <13번째 기사>는 십여 년 전 연극.
지금은 돈의 가치가 떨어졌는데 그때와 예산은 그대로라니.
다른 극단은 더 나은 장비를 사들이고 있는데, 벨데르트 극단은 그 자리에 머무르고 있는 것도 슬펐다.
아니, 작품의 수준은 둘째 치고 안전 문제도 문제였다.
왜 삐걱대는 무대도, 낡아서 위험한 좌석도 신경 써 주지 않는 걸까.
폴리우스가 회의실을 나간 뒤, 제작진은 일제히 한숨을 쉬었다.
“폴리우스 도련님은 연극에 대한 이해가 없으셔. 그냥 <13번째 기사>에 대한 자만심만 있는 거지……”
“극단을 운영하는 게 다미안 도련님이셨더라면 조금은 달라지셨을까?”
“쉿, 조용. 그런 소리 함부로 하면 큰일 날 거야. 괜히 다미안 도련님 이야기 꺼냈다가 지금 일이 커진 거지 않나.”
“하지만…… 그분이 대단한 장비를 만들어서 빌려준다는 소리를 하니 부러워서 그렇지.”
“그건, 그렇지만.”
그리고 두 사람은 동시에 예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이 장비 너무 노후화되어서 고장 날 것 같은데…… 아버지께서 교체를 허락하지 않으셨다면서요. 제가 한번 부족하게나마 개량해 봤어요.”
“아니, 도련님께서요?”
“요즘 어머니께 마법을 배우고 있거든요.”
아직 어린 소년에 불과한 데도 극단 운영을 이해하고 있었고, 거기에 더 나아가 자신의 사비를 털어 장비를 고쳐 주기까지 했다.
다미안이 성인이 될 정도의 시간이 흘렀는데도. 그가 고쳐 준 장비를 아직까지 쓰고 있다니.
“나중에, 제가 크면 꼭 좋은 장비로 다시 맞춰 드릴게요. 죄송해요.”
다미안은 장비를 고쳐 주고도 오히려 사과의 말을 꺼내며 미안해했었는데.
폴리우스와 참 비교가 되지 않은가.
‘어릴 때는 폴리우스 도련님도 크고 나면 극단에 이런저런 일을 해 준다고 떠들었는데. 장비를 모두 고쳐 주겠다. 더 나은 연극을 만들게 지원해 주겠다……’
이후 그런 말들을 지키기는커녕 지금은 극단에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다미안 도련님은 계속해서 연극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구나.’
다미안과 폴리우스의 간극. 두 제작진은 동시에 똑같은 생각을 했다.
하지만 혹여 폴리우스가 들을까 입 밖에 꺼내지는 않았다.
어차피 십여 년 동안 바뀌지 않은 현실이 갑자기 바뀌지는 않을 거니까.
또 함부로 말을 꺼냈다가 혼나면 안 되니까.
그러고는 늦은 일정에 참석하기 위해 황급히 헤어져 버렸다. 씁쓸한 입맛을 뒤로하며.
* * *
며칠이 지나고, 프린츠 마법사를 만난 것도 흐려지던 무렵.
나는 직원이 가져온 서류를 검토하다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잠깐, 영상석 품질 건드린 사람 누구예요?”
원래 영상석 기술 쪽은 다미안 마탑주가 해결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력석이 필요한 일은 나에게도 보고가 들어왔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마력석이 내 광산에서 캐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중화를 위해서 가격을 낮추려고 자투리 마력석으로 쓰기로 했는데, 왜 상급 마력석으로 바꿔서 올라온 거죠?”
“클로틸드 대표님. 그게……”
단가 차이가 수백 배가 난다. 그렇다고 상급 마력석이 내구도가 좋은 것도 아니다.
영상의 품질은 좋아졌지만 화면의 크기가 큰 게 아닌 이상 큰 차이도 없다.
다미안 마탑주가 거르긴 했겠지만, 만약 이대로 진행되었다면 얼마나 큰일이었을지 아찔하다.
“당장 대표실로 오라고 하세요.”
나는 영상석 사업을 시작한 이래 가장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들어온 마법사를 보면서 이를 악물었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또 보네요, 프린츠 마법사.”
전혀 반갑지 않다. 그쪽도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 왜 이따위로 굴지?
이제는 대표님이라고 잘 부르고 언뜻 보면 꽤 예의 바른 태도인 것 같지만. 그럼 뭐 하나.
가장 중요한 일에서 나와 다른 직원들을 제대로 무시했는데.
“왜 마력석을 상급으로 주문했죠?”
프린츠 마법사가 회의 때 대중화를 추구하는 방향을 싫어하는 건 알고 있었다.
한데, 기술 개발에만 신경 써야 하는 마법사가 왜 남의 영역까지 넘보느냔 말이다.
프린츠 마법사는 그제야 자신이 왜 불려 왔는지 깨닫고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 건은 마탑주님께 보고가 가는 줄 알았는데……”
“지금 그게 중요한가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낮아졌다.
“자투리 영상석으로 해야 대중화가 된다고 이미 회의에서 결정한 사안이에요. 프린츠 마법사는 본인이 맡은 일에만 신경 쓰면 됩니다.”
“…….”
“지금 영상석은 큰 행사에서나 사용되고 있어요. 검은 달은 연극과 같은 영상물을 영상석으로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게끔 보급하려는 거고요.”
“하지만 마탑의 이름이 달린 것이 아닙니까. 품질이 낮은 걸 내보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것까지 고려해서 나와 다른 마법사들이 이미 이야기를 끝낸 거라고요.”
하지만 프린츠 마법사는 앵무새처럼 같은 이야기만 반복했다.
“마탑의 것은 무조건 최고여야 합니다.”
아아, 이 마법사 우월주의자 같으니라고.
마탑이 곧 자신이고, 자신이 곧 마탑인 거다.
내가 아니라 마법사가 아닌 다른 직원들도 무시하는 기색이더니, 마법사가 아니었으면 죽었겠군그래.
“물론 추후에는 고급화 라인을 선보이는 것도 생각하고 있어요.”
“그럼 고급화 라인만 하시죠.”
“대중성도 필요하다고 제가 여태까지 말한 건 무엇으로 들었나요?”
“하지만 마탑의 물건이 싸게 나가면, 마탑 자체가 쉽게 보일 수 있지 않습니까?”
“그건 프린츠 마법사의 생각이죠.”
“그렇다면 대중화야말로 클로틸드 대표님만의 생각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말이 통하지 않는군. 나는 들으라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골치가 아파져서 관자놀이를 눌렀다.
“단가 걱정을 하시는 건 알겠지만 품질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나뿐만이 아니라 여러 직원들이 함께 회의해서 결정한 거예요. 프린츠 마법사처럼 독단적으로 군 게 아니라는 소립니다.”
나는 그 말을 증명하기 위해 다른 직원들을 내 방으로 불렀다.
곧 세 명의 직원이 내 방에 들어왔다.
나와 함께 영상석 사업의 방향성을 논의한 직원들이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의외로 평소에 소심하던 신입 직원이었다.
“저, 저는 대중화에 나서는 검은 달의 행보가 정말 마음에 들어요!”
그녀는 자투리 마력석으로 단가를 낮추고, 친근하게 접근하는 걸 누구보다 찬성한 직원이었다.
“평민들은 문화생활을 즐기기 힘들어요. 귀족분들이 계신 곳에 가기 쉽지 않으니까요. 물론 가장 큰 문제는 돈이 없어서이긴 하지만.”
그러면서 평민 출신인 그녀는 내가 공작 영애인데 먼저 말을 걸어 주고, 웃으며 인사해 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덧붙였다.
“클로틸드 대표님께서 더 많은 사람에게 연극을 보여 주기 위함이라고 하셔서 감동했어요. 많은 사람이 문화생활을 즐기면 좋겠다는 검은 달의 방침도 이해해 주세요.”
그리고 이어서 클로틸드 상단에서 온 직원이 뒤이어 의견을 냈다.
“고급화 라인도 생각을 아예 안 하는 게 아니라니까요. 영상석이 대중화되면 영상석 자체가 홍보될 거고,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다는 걸 느끼고 싶어 하는 사람도 분명 나올 거예요. 그런 사람들에게 고급화 라인의 제품을 팔면 되죠.”
그는 프린츠 마법사를 다소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고급 라인으로만 팔아서 접근성을 낮추는 것보다 그편이 낫다고 생각하는데요. 아아, 마법사님은 사어 같은 걸 쓰시는 분이라 생각이 좀 다르시려나?”
꽤 적극적인 성격인 그는 저번 총괄 회의 때 쓸데없이 프린츠 마법사가 어려운 단어를 쓰며 비마법사 직원들을 무시한 게 아직 마음에 남은 듯했다.
“단어 사용으로 꼬투리를 잡으시면……!”
“자자, 프린츠 마법사님. 저는 마법사님의 의견에 상당히 동의해요.”
그리고 세 번째 직원이 마지막으로 나섰다.
그녀는 대중화 노선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은 사람이었다.
세 번째 직원이 나서자 프린츠 마법사도 흥분을 가라앉히고 그녀의 말을 듣기 시작했다.
“기존에 마탑이 가진 이미지를 이용해서 소수의 사람에게만 접근성을 띠게 한 것도 저는 충분히 좋은 전략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시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이라도 다시……”
“하지만 대중화 노선이 좀 더 안전한 것 같기도 하고…… 단순히 돈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영상석을 보며 기뻐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인상 깊어서요.”
그녀는 처음에 말을 꺼냈던 평민 출신 직원을 보며 덧붙였다.
“다른 직원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요. 혼자서 하는 일은 아니잖아요.”
“하, 저도 나름 생각해서 그런 건데…… 제가 나쁜 사람이 된 것 같군요.”
프린츠 마법사는 여기서 더 말하면 자신이 나쁜 사람이 될 것 같다고 느꼈는지, 일단 순순히 물러났다.
세 번째 직원에게 기대를 건 모양인데, 그녀가 ‘다른 직원의 의견’ 운운하니 할 말이 없어진 모양이었다.
내가 독단적으로 결정한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도 했고.
결국 프린츠 마법사는 한숨을 쉬며 항복을 선언했다.
“죄송합니다. 의도야 어쨌든 아무런 말도 없이 제가 수정한 건 잘못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한 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일 뿐이었다는 걸, 얼마 뒤에 알게 되었다.
“프린츠 마법사가 다미안 마탑주님께 찾아갔다고요?”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아니, 나랑 얘기 다 끝내 놓고 다미안 마탑주한테 가다니.
그럼 내가 뭐가 돼? 대놓고 날 무시하는 거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