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멜라니에게 수배되어 클라라가 연결해 준 마법사가 만든 영상석 자체는 쓰레기지만, 거의 가동하지 않아서 마력석은 고스란히 살아 있었다.
빚 대신에 이걸 가져가면 클라라는 오히려 이득이었다.
지금 마력석은 공급이 거의 없다시피 한데, 예전 가치대로 매겨서 가져갈 수 있으니까.
그간 폴리우스의 옆에서 사랑하는 시늉을 한 결과치고는 굉장히 좋았다.
“폴리우스, 넌 눈치가 없냐? 쯧쯧, 너 같은 놈 따라다니던 내가 바보지.”
“크, 클라라. 너 지금 무슨……”
“클로틸드 영애가 가장 먼저 너한테 탈출하고, 그다음이 나야. 지능 순으로 네 어장에서 벗어났고, 끝까지 못 벗어난 잉그다 영애는 추락한 거야!”
클라라는 시원하게 웃었다.
여태까지 폴리우스의 앞에서 귀여운 척, 순수한 척하느라 보이지 못하던 호탕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폴리우스에게 가운뎃손가락을 세웠다.
“멍청아, 이거나 먹어.”
클라라는 까르륵거리며 사업장을 벗어났다. 믿었던 마지막 물고기에게도 버려진 폴리우스는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클라라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던 거야?’
생각해 보면 이상했다.
어느 순간부터 클라라는 질투도 하지 않았고, 자신이 하는 말에 무조건 좋다는 식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폴리우스를 정말 사랑하고 걱정한다면 가끔은 쓴소리도 하고 말렸어야 하는 거 아닐까.
‘하지만 나는, 클라라가 해 주는 달콤한 말들에 취해서……’
폴리우스는 어지러움을 느끼며 벽을 짚었다.
생각해 보면 사업을 별 준비 없이 무리하게 시작한 것도, 건물을 갑자기 팔아 치운 것도 클라라의 말이 계기였다.
‘설마 처음부터 나를 이용한 건가?’
그렇다면 대체 언제부터 덫에 빠져 있던 거지?
‘상대를 믿는 내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장난을 쳐?’
폴리우스는 시야가 캄캄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토록 천진하게 웃던, 자신을 사랑하는 척하던 소녀에게 당하고 말다니.
왜 다미안 같은 놈은 잘나가고, 착한 남자인 자신은 여자에게 버림받았는가.
너무 순수한 남자는…… 나쁜 남자와는 달리 이렇게 고초를 겪을 수밖에 없는 걸까.
신이 있다면 제게 이럴 수는 없다.
‘아니야, 아직…… 아직 기회는 남았어.’
폴리우스는 머리를 부여잡고 생각했다.
‘아직 청혼서가…… 청혼서가 남았어.’
자신은 아직 정식으로 조세핀과 약혼하지 않았고, 멜라니와 파혼하지 않았다. 청혼서는 아직 벨데르트 가문에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폴리우스는 굳은 결심을 하고 백작가의 서재를 두드렸다.
“아버지, 멜라니의 약혼 상대를 저로 정해 주십시오.”
조세핀과 약혼을 한다고 사람들 앞에서 말하기는 했다.
하지만 정식으로 잉그다 후작가에 청혼서를 넣기 전에 일이 터졌고, 서류상으로 폴리우스는 조세핀과 아무것도 연결된 것이 없었다.
사람들이 조금 숙덕거리는 건 피할 수 없겠지만…… 어차피 멜라니와 처음 약혼한 것은 폴리우스였다.
“그 여자는 다미안하고 약혼했는데 무슨 말을 하는 거냐?”
하지만 벨데르트 백작은 심혈을 기울여 떠올린 생각에도 심드렁하게 굴었다.
헛소리라고 생각하는 걸 숨기지도 않는 노골적인 태도에 폴리우스는 기분이 상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들인데 최소한 이야기를 들어 보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 아닌가.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다는 걸 알기에 더더욱 기분이 가라앉았다.
‘처음으로 되돌려야 해.’
자신이 이런 취급을 받게 된 건 멜라니와 헤어지고 나서부터다.
그때부터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했다.
폴리우스는 애써 침착한 척 말을 이었다.
“벨데르트 가문에 넣은 청혼서니까, 누구와 누구라는 정확한 언급이 없지 않습니까.”
가문과 가문 사이에 오가는 청혼서 뿐이다. 어차피 귀족 간의 결혼은 그런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멜라니가 상대를 다미안으로 바꾸겠다는 깜찍한 생각까지 했고 말이다.
“가당치 않은 말 하지 말고-”
“다미안은 아버지의 등에 칼을 꽂을 놈입니다.”
폴리우스는 벨데르트 백작에게 단언하듯 말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폴리우스는 자신의 아버지가 무엇에 약한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벨데르트 백작이 흠칫한 사이를 놓치지 않고 이어 말했다.
“아직도 다미안이 아버지의 아들로 보이십니까? 아버지가 연회장을 나가자마자 나타나서는 멜라니를 채간 걸 잘 보셨잖아요.”
“…….”
“다미안은 분명히 집을 나갔어요. 자신은 벨데르트 사람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단 말입니다. 어쩌면 다미안이 멜라니와 약혼하는 건 다른 가문의 영식에게 빼앗기는 것보다 위험할지 몰라요.”
벨데르트 백작은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기껏 만나겠다고 젊은이들이나 가는 연회에 손수 갔건만, 다미안이 자신이 사라지고 나서야 모습을 드러냈다는 사실은 그에게도 보통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너는 이미 그 잉그다 영애 같은 멍청한……”
“정식으로 약혼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이 점은 아버지가 청혼서를 보내지 않으셨으니 더 잘 아실 겁니다.”
폴리우스는 벨데르트 백작이 다시 입을 다무는 것을 보며 그가 차츰 진지하게 자신의 말을 듣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게다가 제가 멜라니와 약혼하면, 잉그다 후작가의 이름이 따라붙는 것을 어느 정도 방지할 수 있을 겁니다.”
그 말을 내뱉어 놓고 폴리우스는 벨데르트 백작 앞에서 긴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멜라니에게 자신을 버린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 준다는 말을 내뱉어 놓고 이러고 싶지는 않았다.
‘조세핀이 그런 위험한 짓을 할 줄은 몰랐어. 나와는 아무런 상의도 없이, 감히 황실의 치부를 건드리다니.’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자존심을 내세울 때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클로틸드 공작 영애인 멜라니와 약혼하고, 다미안과 두 사람의 사이를 떨어뜨려 놓아야 한다.
“일리가 있구나.”
“그렇죠, 아버지?”
폴리우스는 아버지 앞에서 착한 아들인 양 천진하게 웃었다. 다미안과는 다르게 싹싹한 맛이 있다고 백작이 좋아하던 미소였다.
그러나 폴리우스의 말을 들은 벨데르트 백작은,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확실히 이 기회에 버릇을 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벨데르트 백작은 여태까지 다미안도 자신의 아들이라 여겼다.
가출하면서 성을 버린다느니, 벨데르트 따위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느니.
당신을 아버지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 같은 걸 하기는 했지만. 당연히 얼마 지나지 않아 귀가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야 멍청하게도 보석이나 값어치 나가는 물건 따위 하나도 들고 나가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다미안이 돌아오면 건방진 말을 지껄인 놈을 절대로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이라고 이를 갈았다.
그러나 짧은 시일 내에 돌아올 것이라 생각한 다미안은 일주일이 지나도 행방이 묘연했다.
“백작님, 다미안 도련님께서 정말 작정하고 나가신 모양인데요?”
“뭐? 돈도 한 푼 안 가지고 갔다더니 어떻게?”
집을 나간 지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몇 년이 넘어가자 벨데르트 백작은 그제야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애써서 찾지는 않았다.
어쨌든 크게 다치거나 납치되었으면 벨데르트 백작가에 연락이 오지 않았겠는가.
‘딱히 소식이 없는 걸 보니 망할 놈의 에잉턴 후작가에 있으려나.’
에잉턴 후작가는 죽은 백작 부인의 친정이었다.
“할아버지시지 않습니까. 다미안 벨데르트 영식이 어디에 계신지 아시나요?”
다미안의 행방이 묘연하자 누군가가 호기심에 에잉턴 후작에게 물었다.
그러나 에잉턴 후작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분위기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 빌어먹을 놈을 내가 왜? 어림도 없는 소리. 오히려 내 눈에 띄면 죽여 버리고 싶은 심정인데!”
“죄, 죄송합니다. 벨데르트 백작가를 나간 지 오래인데, 소식이 안 들리기에……”
뒤늦게 소식을 들은 벨데르트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생각해 보면 에잉턴 후작이 다미안을 받아 줬을 리 없다.
다미안의 외가에서는 예전부터 다미안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거기에 나약하게 후계자 문제를 확정 짓지 않고 무작정 가출했다며 더 싫어하게 된 것 같았다.
어린놈이 가문에서 아무것도 들고 나가지 않았으니, 그래 봤자 친척 집이려니 싶었는데…… 그러면 어디에 갔을까.
하지만 크게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공개적으로 집을 나가서 내게 망신 준 놈을 아들이라고 신경 써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