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의 어장에서 탈출하겠습니다 (65)화 (65/90)

<65화>

* * *

미리엘 황후는 점점 더워지는 공기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황후의 일정을 읊던 시녀장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황후 폐하, 지금이라도 행사를 뒤로 미루면 어떨까요?”

“그건 안 될 일이야.”

다른 사람은 다 눈치채지 못해도 그녀의 측근인 시녀장만큼은 그녀가 힘들어하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가뜩이나 황실의 수치가 건드려지지 않았나. 이런 시기에 약한 모습 따윈 모이기 싫네.”

“송구합니다, 황후 폐하.”

“자네가 미안할 것이 무어 있겠나. 날이 더운 게 자네의 문제도 아니고.”

미리엘 황후는 아직 한여름이 아닌데도 힘들어하는 자신의 몸을 망연하게 바라보았다.

제국의 중부에 위치한 수도가 그렇게 객관적으로는 덥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름에도 눈이 녹지 않는 곳에서 온 미리엘 황후에게는 지금의 더위도 눈이 핑 돌아갈 만큼 힘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고작 초여름에 불과하다니……’

미리엘 황후의 모국인 에스트리아 왕국은 북부에서도 싸늘한 기후로 유명했다.

한 연회에서 사랑에 빠져 프하이젠 황제와 결혼했고, 제국에 온 것까지는 후회하지 않았다.

결혼 자체도 서로 간에 이득이 되는 거래였으며 황제는 훌륭한 남편이었다.

프하이젠 제국 역시 모국과 문화가 비슷해 적응하는 데 어렵지는 않았다.

다만 유일한 문제가 있었다.

에스트리아보다 무더운 날씨였다.

처음에는 제국의 여름에 적응하려 기를 쓰고 움직였다.

하지만 몇 번 실신을 거듭한 이후 미리엘 황후는 괜한 호기를 부리지 않기로 했다.

그 안전한 선택이라는 게 가장 서늘한 궁으로 거처를 옮기고 열이 오른 땅에 몇 번이나 물을 뿌려 대며 단순히 눈만 뜨고 있는 수준이었지만.

“너는 이런 내가 오히려 이해가 안 가겠지. 그렇지 않느냐? 한여름도 아닌데 이렇게 꼴사납게 누워 있다니.”

“그렇지 않습니다, 황후 폐하.”

어떻게든 황후의 역할을 하겠다고 아등바등했으나, 미리엘 황후는 차라리 여름에는 가만히 있는 것이 주위 사람들에게 폐를 덜 끼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리엘 황후는 대륙 북부 특유의 고집스런 성격답게 약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어리광이라 여겼다.

더군다나, 그녀는 이곳에서 이방인이었다.

똑같이 대륙 공용어를 쓴다고 해도, 억양이며 몇몇 어휘는 제국과 굉장히 달랐다.

“역시 북부 사람이셔서 그런가요?”

“외국에서 오신 분이라……”

다른 사람에게는 지나가듯 한두 마디 던지는 말일 뿐이어도, 미리엘 황후에게는 계속해서 듣는 말이었다.

미리엘 황후는 제국에 온 지 삼 년도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매끄럽게 제국 표준어를 구사했다.

그것도 제국 귀족들의 어휘와 똑같이.

수도에 머무르는 시간이 적은 지방 귀족들이 아직까지 사투리 억양을 고치지 못하는 것에 비하면 경악할 만한 성과였다.

그런 황후의 성품을 알고 있었기에 시녀장은 미리엘 황후가 늘어져 있는 것을 결코 게으름이라 여길 수 없었다.

“황후 페하, 하리미네스 일정을 가을로 미루거나 아예 취소하는 것을 재고해 주십시오.”

“말했지 않은가. 나는 이제 제국에서 죽어야 하는 몸이야. 언제까지 여름이라고 어리광을 부릴 수는 없어. 이미 충분히 행사 일정도 느리게 진행되고 있고.”

그랬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는 행사의 간격을 느슨하게 잡고 있었다.

한 번 가문에 방문하면 그다음 날은 앓다시피 하며 종일 누워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황후 폐하……”

잉그다 후작가가 황실의 수치를 건드리는 영상석 만든 게 얼마 전.

시기가 시기이니만큼, 더욱 강인한 모습만 보여 주고 싶다는 황후의 마음을 알기에 시녀장은 더 이상 말리지 못했다.

“됐고, 이제 내가 방문할 가문은 얼마나 남았지?”

“네, 아까 말한 가문들 다음에는 클로틸드 공작가입니다.”

“열흘 뒤라고 했지? 부디 야외가 아니었으면 좋겠군.”

열흘 뒤면 날씨가 더 뜨거워질 것이 뻔해서, 시녀장은 희망 사항을 말해 보았다.

“최근 클로틸드 영애가 영상석 사업을 한다 하니, 그것을 보여 주려면 실내일 가능성이 높을 것 같습니다.”

처음 의도는 다르게, 하리미네스 주간은 서로의 이해관계에 의해 이루어졌다.

황가는 가문에 방문해 서열을 나누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했고, 귀족들은 황실과 접점을 만들어 이득을 보았다.

“그래,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구나.”

그러니 미리엘 황후는 자신이 차라리 이용당해 주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다음 가문 역시 실외의 티타임이었다.

기존 귀족들이 황후에게 큰 반응을 일으키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비슷한 것들의 연속이라니.

최선인 것일까. 안일한 것일까.

아니면 대륙 북부 촌놈들은 나긋한 꽃을 보여 주면 좋아한다는 편견일까.

하리미네스 주간이 끝에 다다를수록 미리엘 황후의 몸은 더욱 나빠졌다.

“당신에게 미안하군요. 나 때문에 더운 제국에 와서……”

“어차피 모든 황족은 결혼해야 합니다. 프하이젠 제국보다 더 남쪽이 아닌 게 어디인가요. 또한, 늙은 국왕의 후처가 아닌 것도 감사할 일이지요.”

미리엘 황후는 남편인 황제가 미안해하는 것을 다독이고서 오늘도 출발했다.

‘그래도 조금 우습기는 하군. 날씨가 좋으니 실외에서 차를 마시자는 말이.’

미리엘 황후의 관점에서 날씨가 좋은 것은 오히려 제국의 겨울이었는데 말이다.

클로틸드 공작저에 방문한 당일.

미리엘 황후는 상대가 명문가니 어떤 대접을 받을까 궁금한 것보다 실외인지 실내인지 더 궁금해했다.

“황후 폐하, 응접실로 모시겠습니다.”

그리고 마중을 나온 클로틸드 영애는 미리엘 황후를 실내로 이끌었다.

역시 시녀장의 말대로 영상석을 보여 줘, 이후에 황후도 본 영상석이라는 문구를 달고 홍보할 작정인 모양이었다.

대놓고 황후의 이름을 노리는 결과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괜찮았다.

실외에서 봤던 꽃차나 특산품과는 달리, 미리엘 황후는 실내의 티타임이라 좀 너그러운 기분이 되었다.

“부디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군요.”

클로틸드 영애는 황후를 접대하는 영애나 귀부인들이 그렇듯 격식 있게 차려입고 예의 바른 모습이었다.

다만 다른 점 하나는……

‘숄을 팔에 걸치고 있어?’

다른 귀족들은 화창하다고 흐뭇해하는 날씨에 조금 의아한 차림이긴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미리엘 황후는 별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클로틸드 영애의 인도에 따라 응접실에 들어섰는데……

“…….”

어라?

황후는 응접실의 문을 열자마자 맞닥뜨린 시원한, 아니, 시원하다 못해 차가운 공기에 당황했다.

그녀의 모국 에스트리아처럼 반가울 정도로 시린 날씨였다.

* * *

“두 마법을 합쳐서 방을 시원하게 만드는 방법은 아무도 생각 못 했을 겁니다. 대단하시군요, 클로틸드 대표님.”

멜라니는 아이스 마법과 윈드 마법을 한 마력석에 새겨 넣는 아이디어를 다미안 마탑주에게 전했다.

술식이 제대로 작동만 한다면 차가운 바람이 마법 아티팩트에서 나와 공기를 시원하게 식혀 줄 것이다.

방금 다미안 마탑주의 말은 담백한 칭찬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이 대단한 감탄사라는 걸 알고 있었다.

‘확실히 이런 걸 아무나 떠올리고 만들 수 있는 건 아니지.’

그러나 다미안 마탑주는 내 이야기를 듣자마자 마탑으로 향하더니 역시 내 기대에 만족시키는 선풍기와 에어컨을 만들어 냈다.

“정말 좋아요. 하지만 여기서 좀 더 온도 조절을 하는 건 어려울까요?”

“할 수는 있지만, 대량 생산이 어려워질 겁니다. 단가도 더 높아질 거고요.”

“괜찮아요. 제국의 여름은 꼭 에어컨이 있어야 할 정도로 덥지 않고…… 웬만한 사람들은 선풍기 정도면 될 것 같거든요? 에어컨은 저번의 홈시어터처럼 프리미엄 라인으로 갈 거예요.”

에어컨에 비해 선풍기는 생산이 간단해서 자투리 마력석으로도 대량 생산이 가능했다.

며칠 뒤, 앞으로 출시할 새로운 마법 아티팩트에 대한 소식을 들은 검은 달 직원들은 모두 나를 보며 박수를 쳤다.

“아이스 마법과 윈드 마법을 결합시켜 이런 물건을 떠올리다니, 대단하십니다!”

“역시 괜히 마탑주님께서 인정하신 분이 아니시군요!”

하지만 정작 검은 달에 차출된 마법사들의 눈은 점점 어두워져 갔다.

‘검은 달이 생긴 이후로 마탑의 마법사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좀 달라진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어쩐지 다미안 마탑주를 보는 눈빛과 비슷해진 것 같다. 꼭 악덕 상사를 보는 것 같은데……

그와는 별개로 날 대단하다고는 생각하고 있는 것 같으니 됐지. 뭐.

그러한 과정을 거쳐 미리엘 황후에게 에어컨을 선보이게 된 오늘.

예상했던 대로, 미리엘 황후는 응접실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방 안의 기온에 주목했다.

“이건……”

나는 느긋하게 미리엘 황후의 반응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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