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의 어장에서 탈출하겠습니다 (75)화 (75/90)

<75화>

‘너무 해이해졌다. 정신 차려, 나!’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떠올린 탓에 끙끙거리고 있노라니, 다미안 마탑주가 나를 보며 말했다.

“혹시 몸이 안 좋습니까?”

“아뇨, 괜찮은데……”

“제가 드린 아티팩트는 진통 효과만 있을 뿐, 병 자체를 치료하는 건 아니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사실 다미안 마탑주는 내가 벨데르트 영지로 향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럴 만도 했다.

저번에도 내가 부득부득 우겨서 지방까지 갔는데, 결국 돌아오는 길에 쓰러지지 않았는가.

하지만 어차피 나는 벨데르트 영지에 볼일이 있었다.

‘성녀, 헤네시아를 이 부근에서 봤다는 사람이 있었어.’

원작에서처럼 덧없게 죽을 생각은 없다.

나는 성녀에게 치료를 받아 시한부인 목숨을 연명해 나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소설에서 성녀가 나타나 그 힘을 각성하는 것은 나중의 일.

거기다 그녀를 위기에서 도와주는 건 폴리우스의 역할이지만, 나는 두 사람이 원작처럼 각별해지게 두지 않을 거다.

아무리 소설이 틀어져, 폴리우스가 예전 같지 않다지만 성녀와의 만남같이 강력한 사건은 그대로 진행될지도 모르는 일.

나는 정보 길드에 의뢰해서 성녀의 행방을 꾸준히 쫓고 있었다.

이름은 헤네시아, 신비로운 청은발의 미인.

‘원작에서는 제국 남부 쪽에서 만나서 그쪽을 중심으로 뒤지게 했는데, 벨데르트 영지에서 본 사람이 있다니.’

원작의 정보에 얽매인 게 아니었다면 진즉에 찾았을 것이다. 나는 혀를 찼다.

‘나라고 몰락 귀족인 성녀가 먼 거리를 이동할 줄 알았겠어. 소설에서는 궁핍한 살림의 그녀가 대체 무슨 이동 수단을 써서 제국 남부로 간 건지 모르겠네.’

어쨌든 원작과는 달리 성녀에게 은혜를 입히는 건 폴리우스가 아니라 내가 될 예정이었다.

요정의 축복을 가진 폴리우스와 헤어지고도 이제는 다미안 마탑주 덕분에 진통제를 쓰지 않아도 괜찮았지만, 그래도 병 자체가 완전히 치유된 것은 아니니까.

진통제로 인한 후유증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저번처럼 쓰러지지는 않겠지만, 병 자체는 꾸준히 진행 중.

어차피 치료받을 거, 하루라도 빨리 건강한 몸이 되고 싶다.

그래야 사업도 더 자유롭게 할 수 있을 테니까.

물론 지금도 소설에 나온 것처럼 몇 달 뒤에 죽을 것 같은 몸 상태는 아니긴 한데.

‘마탑주님이랑 같이 있으면 기분이 꽤 괜찮아서 그런가. 몸 상태도 괜히 좋은 느낌이라니까.’

그렇지만 다미안 마탑주는 계속해서 힐끔거리며 내 상태를 확인했다.

으음, 하긴 저번에 쓰러졌을 때 아버지가 괜히 이 사람에게 화내긴 했지. 봉변을 당했으니 신경 쓰일 만도 하다.

“괜찮아요, 여기 마탑주님이 주신 아티팩트도 있잖아요.”

나는 계속해서 품에 가지고 다니는 아티팩트와 차고 있는 팔찌를 흔들어 보였다.

“덕분에 진통제 부작용에서는 벗어났는 걸요. 진통제를 퍼먹었던 그때처럼 쓰러지지는 않았을 거예요.”

“괜찮다고 하더니, 그때도 역시 진통제를 많이 복용하셨던 겁니까.”

“아하하…… 아니, 한 번 많이 복용하고 다음 날은 안 먹는 게 효율이 좋기도 하고.”

내가 하려는 말은 이게 아니었다. 왜 화살이 이쪽으로 오는데?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다시 밝게 웃으며 대화 주제를 돌렸다.

“어쨌든 마탑주님께서 주신 아티팩트, 정말 좋다고요.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별것 아닙니다. 그냥 제 마력이 들어간 정도고……”

“별거 아니긴요! 제가 이 아티팩트를 차고 다닌 이후로 얼마나 살 것 같은데요! 병도 병이지만 진통제 부작용도 얼마나 무서웠는데요.”

내가 몇 번이고 아티팩트로 인해 내 삶의 질이 달라졌는지, 당신이 내게 해 준 일이 얼마나 대단한지 찬양하고 나서야 다미안 마탑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외에는 별 기능이 없지 않습니까. 호신용 기능도 있으면 좋을 텐데.”

“아니, 그건 좀 아니죠.”

나는 예전에 인질을 구하러 갈 때 다미안 마탑주가 내게 칭칭 둘러 준 호위 아티팩트들을 생각하며 정색했다.

그 커다랗고 무거운 것들, 평상시에는 절대 들고 다닐 수 없는……

“손목이 오히려 아프다니까요. 그리고 평상시에는 호위 기사를 대동하고 다니니까 괜찮아요.”

다미안 마탑주는 뭐라 반박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내가 강경하게 나오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역시 준비를 서둘러야……”

“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니, 그렇게 말하니까 궁금하잖아.

나는 내 귀가 왜 방심했는지 답답해하며 다미안 마탑주를 추궁하려 했다.

“마탑주님, 영애님. 벨데르트 영지에 도착했습니다.”

마침 영지에 도착해 버려서 다미안 마탑주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말이다.

“으……”

분하다, 분해.

하지만 다미안 마탑주는 금세 마차에서 내려서는 내게 말끔한 얼굴로 손을 내밀 뿐이었다.

“내리시지요, 영애.”

“어쨌든 벨데르트 영지까지 왔는데도 저는 저번보다 상태가 굉장히 좋다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래도 중간중간에 꼭 쉬셔야 합니다.”

“휴, 엄청난 잔소리……”

그렇게 아웅다웅하며 마차에서 내리니, 무도회에서 보았던 가신이 마중 나와 있었다.

“아이고, 다미안 도련님 오셨습니까. 준비가 미흡해서 죄송합니다.”

“괜찮네.”

“어서 이리로…… 아, 클로틸드 영애께서도 오셨군요.”

일단 정식으로 영지에 방문한 게 아니라서 좀 조용조용히 들어가야 했다. 그래서 젤던 남작의 도움이 필수였다.

‘괜히 폴리우스나 벨데르트 백작이 알았다가는 귀찮아질 수 있으니까.’

그나저나 몇 번 듣긴 했지만, 다미안 마탑주가 도련님이라고 불리니 생경한 기분인걸.

‘조금 귀엽다.’

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무척이나 잘생기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고지식하고 냉담해 보이는 인상인데 꼭 꼬마 취급하는 것처럼도 들리잖아.

하지만 언제까지나 이렇게 노닥거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미안 마탑주와 함께 얼굴을 가리는 후드를 쓰고 영지를 돌고 있노라니, 처음 즐겁던 기분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건 너무 심각한데.”

농업의 기본은 물이다. 그러나 비옥한 평야를 가진 것으로 유명한 벨데르트 영지는 가물어서 허덕이는 모습이었다.

“이게 다 이웃 영지에서 물길을 막아서 그렇습니다.”

젤던 남작은 낮은 목소리로 짓씹듯 말했다.

일견 차분해 보이던 그의 얼굴이 오만상으로 일그러졌다.

“이렇게 된 지 오래되었는데, 위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나?”

“네. 이대로라면 올해 농사는 거의…… 망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참담한 모습이었다. 이러면 확실히 이웃 영지와 빨리 물길 문제를 해결해야 할 텐데.

“하지만 이걸 구실로 벨데르트 백작님과 폴리우스 도련님은 이웃 영지에 끌려다니고만 있습니다. 협상을 하려는 건지, 아니, 애초에 시도를 제대로 하긴 하는 건지.”

젤던 남작은 최대한 차분하게 영지의 상황을 설명하려 해도 잘 안 되는 모양이었다.

보통은 이런 상황에서 이웃 영지를 욕하는 게 먼저인데, 먼저 벨데르트 백작과 폴리우스의 욕이 나오는 건.

“그런데 이 와중에 세율까지 올리다니요!”

“……세율을 얼마나 올렸는데요?”

“여러 명목을 대긴 했지만, 대략 2배가량 됩니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지금 이웃 영지 때문에 농사가 제대로 안 되는 걸 뻔히 알 텐데.

이 상황에서 세금을 올리다니 제정신인가? 도움을 못 줄망정?

“농사는 주변 상황에 많은 영향을 받으니 이참에 사업을 하겠다고 하는데, 솔직히 붉은 해 영상석 사업은 다 망하지 않았습니까. 남은 빚을 갚는 거죠.”

“영상석 사업으로 돈을 벌었을 때 세금을 감면해 준 것도 아니면서!”

그래, 그럴 줄 알았다. 폴리우스는 씀씀이가 컸다.

주된 돈줄인 나와 조세핀, 클라라까지 끊겼으니 말할 것도 없지.

‘그걸 영지민 세금에서 충당하려 들다니.’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이웃 영지와 담판은 못 지을망정 세금이나 올리고 있다니.

듣는 내가 열받는데 당사자들은 오죽할까.

‘괜히 가신인 젤던 남작이 연회까지 나서서 다미안 마탑주님에게 매달린 게 아니구나.’

얼마나 호소할 곳이 없으면 이러겠어…… 영주가 저 모양인데. 나는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웃 영지에서 횡포를 부리는데 황실에 진정서는 냈는가?”

“그건……”

그런데 여태까지와는 다르게, 젤던 남작은 바로 대답을 내뱉지 않고 주저했다.

그리고 순간 흐르는 묘한 분위기.

‘어라?’

내가 벨데르트 관련 사람이 아니어서 그런가.

어째 나한테 왜 끼어드느냐고, 배타적으로 구는 것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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