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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어장에서 탈출하겠습니다 (77)화 (77/90)

<77화>

자신이 임신했을 때부터 이어진 불륜.

대놓고 사생아와 정부를 집 안에 들이는 행동.

그 충격에 벨데르트 백작 부인은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린 후에는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몸을 추스른 벨데르트 백작 부인은 다미안을 후계자로 확정 지으려 노력했다.

그렇지만 벨데르트 백작은 그런 백작 부인을 잘 만나 주려고 하지도 않았다.

밀라 부인과 폴리우스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걸 이유로 대면서 말이다.

그러나 다미안이 보기에 두 사람은 딱히 걱정할 필요도 없어 보였다.

“당신은 어쩜 그렇게 멋져요? 세상 최고의 남자예요!”

“저는 아버지가 있어서 너무 좋아요! 다른 건 다 필요 없어요!”

밀라 부인과 폴리우스는 벨데르트 백작에게 사근사근하게 굴었다.

벨데르트 백작의 약한 부분을 참 잘도 채워 준다 싶었다.

하지만 다미안과 백작 부인은 그럴 수가 없었다. 아니, 그러기 싫었다.

그렇게 꼿꼿하게 있으면 있을수록 더 벨데르트 백작은 그들을 죽은 제 형과 비슷한 부류라고 할 거라는 걸 아는데도……

보란 듯이 정부와 사생아를 데려와 예뻐하는 벨데르트 백작의 마음에 들고 싶지 않았다.

에잉턴 후작 내외는 그런 딸이 안타까워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놈은 자신이 능력 없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제 형의 약혼녀였던 너에게 상처를 주면서 질 낮은 충족감을 느끼는 거다!”

“당장 이혼은 어렵겠지만 우선 에잉턴 후작저로 오렴. 네 속이 더 썩어 문드러지기 전에!”

하지만 벨데르트 백작 부인은 굳건했다.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첫날 그 인간들이 왔을 때 쓰러진 걸로 족해요. 다미안을 후계자로 못 박기 전에는 절대로 못 나가요. 저와 다미안이 벨데르트 영지 밖을 나가면 괜히 트집거리를 쥐여 주는 셈이 될 테니까요!”

그러나 벨데르트 백작이 강경한 탓에 다미안이 후계자가 되는 일은 지지부진했다.

그리고 결국 그보다 먼저 다미안의 어머니가 죽었다. 가지고 있던 지병이 갑자기 악화된 탓이었다.

대놓고 정부를 들인 남편, 혼외자식을 더 예뻐하는 모습, 정부와 시시덕거리는……

예민한 성정인 백작 부인에게는 힘들었으리라고 다미안은 담담하게 짐작했다.

“저는 어머니가 없는 곳에서 굳이 더 있을 까닭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뛰쳐나갔다. 가문의 것을 아무것도 가지고 싶지 않아 맨손으로.

바깥에 뛰쳐나간 어린 소년은 신분을 숨긴 채 마탑의 입학시험을 통과하고, 끝끝내 마탑주가 된 후에도 성을 밝히지 않았지만.

우연히 마탑에서 그를 본 고위 귀족 몇몇이 그를 알아보면서 소문이 퍼졌다.

그러나 행방이 묘연했던 손주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안 후에도, 에잉턴 후작 내외는 다미안 마탑주를 찾지 않았다.

“아마 제 딸이 가문에 끝끝내 버티면서 벨데르트의 후계자를 만들려고 했는데, 뛰쳐나간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셨을 겁니다.”

그저 자신의 딸이 있던 자리를 정부 따위가 차지하는 것을 못 본다며 벨데르트 백작 부인이 되는 것 정도만 막을 뿐, 딸이 남기고 간 손주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저는 이렇게 부족한 인간입니다.”

“아뇨, 그런 상황에서 안 삐뚤어지고 잘 자란 걸 보면 대단하다고 해도 될 것 같은데. 아버지가 싸고돌고, 어머니도 같이 있는 폴리우스의 인성을 보세요.”

끝없이 자기 연민에 빠져 있는 인간과는 다르게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냉정하지 않은가.

“마탑주님이야말로 자기 자신을 좀 더 칭찬해 주면 안 되나요?”

돌아가신 백작 부인이 한때 마탑에 들어가는 꿈을 그렸다고 하지만, 그리 대단한 마법사는 아니었다고 들었다.

그런데 어머니에게서 배운 간단한 마법을 스스로 발전시켜서 그 어려운 마탑에 합격하고 마탑주까지 되지 않았나.

“그건……”

“진짜 대단한 건데. 뭐, 머리라도 쓰다듬어 드릴까요?”

나는 분위기가 처지지 않게 가벼운 농담을 던졌다.

하지만 모처럼 머리를 잘 매만졌으니 흐트러트리기에는 아깝지 않은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자존감 낮은 사람들은 자신이 별로 한 거 없다고 하고, 운이 좋았다고 한다던데.

왜 본인이 한 노력은 생각하지 않는 거야.

어머니를 잃은 어린 소년이 맨손으로 마탑주가 된 건 대단한데.

소설 속의 악당이면서 왜 이리 여리고 착한지.

아무리 생각해도 폴리우스가 왜 주인공인지 모르겠다.

나는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다미안 마탑주님은 너무 착해서 탈이에요.”

“……뭐라고요?”

다미안 마탑주는 내 말에 대놓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마탑주님은 태어나면서 잘한 일이 있어요. 벨데르트 백작하고는 그다지 안 닮았잖아요. 어머니의 예쁜 부분만 닮아서 기특하네요.”

“그게 기특합니까?”

“그럼요. 벨데르트 백작을 닮았으면 폴리우스 같았겠죠.”

“…….”

내 아무 말 대잔치에 다미안 마탑주의 말문이 막혔다.

흐음. 한동안 나한테 꽤 적응한 듯했는데,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다미안 마탑주는 곧 정신을 차리고 똑 부러지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말에 논리가 없으십니다.”

“그럼 마탑주님이야말로 자기 자신을 비하하는 말이 정말 옳다고 생각해요? 진심으로?”

“그건.”

“그런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 게 대단한걸요. 어깨 당당히 펴고 다니세요. 마탑주님은 정말 잘했어요.”

하지만 다미안 마탑주는 순순히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열심히 한다고 성공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운이 좋았던 것뿐입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귀족 영식으로 태어났고, 어머니 역시 예전에 마법을 배우신 적 있었으니까요.”

“음…… 혹시 답이 정해져 있나요? 마탑주님이 마탑의 수장이 된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을 들어야 만족하실까요?”

다미안 마탑주는 쉽지 않은 인물이었다.

폴리우스가 똑같은 성취를 이뤘다면 들숨에 자기 자랑, 날숨에 남 후려치기를 했을 텐데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

“누가 그런 말을 마탑주님한테 하셨나요?”

“…….”

“그건 정말 마탑주님 본인의 생각이 맞나요?”

나도 나 스스로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인 생각들을 많이 했었다.

폴리우스가 하란다고 어머니가 남긴 상단을 담보로 대출까지 받은 멍청이, 아버지에게 대못을 받은 후레자식, 클로틸드 공작가의 수치……

하지만 제삼자의 입장에서 소설 <서자인데 내가 제일 잘 나가!>를 보니 말이야.

정말 한심하고 답답하기도 했었지만.

자책만 해서 바뀌는 건 없었고, 나는 스스로를 믿고 다시 일어나는 수밖에 없었다.

“에잉턴 후작님과 후작 부인이 그래서 다미안 마탑주님을 안 좋아하실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마탑주가 된 것도 별거 아니고, 그래서 더 큰 성공을 거둬야 한다고?”

“…….”

“제가 전에 같이 성공해 보자고 했죠. 성공 좋아요. 그런데 그 성공이 어느 정도야 만족하실 건가요?”

다미안 마탑주가 성공에 집착하는 걸 이용해서 계약 약혼을 하자고 한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게 조금 찔리지만.

“모든 사람이 마탑주님을 좋아할 수는 없겠죠. 마탑주님의 성취도 별거 아니다 다 운이다 깎아내리는 사람도 많이 만나 보셨겠고.”

하지만 다미안 마탑주의 가정사를 자세히 들으니 폴리우스에게 한 방 먹여 주자는 말을 한 게 옳았나 싶은 생각도 들고.

“물론 운이 작용하는 영역도 분명히 있고,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모두 성공하지도 않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마탑주님이 한 걸 인정해 주면 안 되나요?”

“…….”

“만약에요…… 제가 마탑주님과 똑같은 환경에서 자랐다고 하면 저한테도 그런 말을 하실 건가요?”

다미안 마탑주는 고민도 않고 바로 대답했다.

“아니요.”

그리고 자신의 대답에 자신이 더 놀라는 눈치였다.

“그렇잖아요? 제가 본 마탑주님은 굉장히 너그러우신 분인데 저한테 너그러우신 것만큼 본인한테 너그러우시면 안 될까요? 저는 마탑주님이 참 좋거든요.”

내가 배시시 웃자 다미안 마탑주는 어색하게나마 따라 웃었다.

내 말에 대답은 없었지만 그가 수긍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 * *

다미안 마탑주와의 대화 이후로도 두 시간쯤 더 달렸을까. 마침내 마차는 에잉턴 후작저에 도착했다.

나는 다미안 마탑주의 말도 있었기에, 꽤 긴장하고 있었다.

외가라고 하지만 몇 년이나 왕래가 없었고, 너무 갑작스럽게 방문하겠다고 연락했으니까.

허락받은 게 다행이구나 싶었거든.

‘그런데…… 이 휘황찬란한 접대는 다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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