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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어장에서 탈출하겠습니다 (78)화 (78/90)

<78화>

우리에게 내어진 손님방은 그렇다 치자.

함께하자는 석찬은 공작 영애인 내가 봐도 놀랄 정도로 가짓수가 많고 호화로웠다.

시간도 얼마 없을 텐데 이 정도로 준비하다니……

‘다미안 마탑주를 싫어할 거라더니, 단순히 예의상 차린 음식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대단하지 않나?’

나는 에잉턴 후작 내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딸이 죽었는데, 손주에게 어떤 연락도 하지 않은 냉정한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물론 벨데르트 백작 부인이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다미안 마탑주가 가출했다는 걸 참작해야 하겠지만 말이야.

그렇다면 손주가 마탑주가 된 이후에는 왜 연락하지 않았을까?

“갑작스러운 방문 요청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건 에잉턴식 닭 요리인가요? 소스가 굉장히 맛있네요.”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군요.”

“가슴살인데도 뻑뻑하지 않고 부드러워요. 잡내도 나지 않고……”

“주방장이 힘을 줬나 보군요.”

“어…… 주방장님께서 대단하신 분인 것 같습니다. 역시 안목이 있으셔서……”

“고마워요. 하지만 내가 뽑은 건 아니랍니다.”

“하하, 그렇군요.”

나는 주방장이 이곳에 온 것도 참 행운이라느니, 에잉턴 영지가 훌륭해서 실력 있는 주방장이 있는 것이라는 말 따위를 생각하다가 그만두었다.

“…….”

“…….”

그러자 정적이 계속 흐른다.

내가 말하는 걸 관두자 식당에는 식기 소리만 달그락거렸다.

이것이 과연 손주와 외조부모의 식사 자리가 맞는가.

내가 머리를 굴리며 대체 어떻게 해야 물길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꺼낼 수 있을까 고민하던 때.

“에잉턴 영지의 강에서 물길을 끌어오고 싶습니다.”

다미안 마탑주는 바로 본론을 꺼내 버렸다.

그러자 그럭저럭 온화한 것 같았던 에잉턴 후작의 목소리가 바로 높아졌다.

“내가 왜 벨데르트 영지에 좋은 일을 해 줘야 하지?”

아하하…… 솔직히 벨데르트 백작에게 좋은 일 같은 거 해 줄 리가 없지.

딸이 죽은 게 백작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이건 예상한 일이다.

“오히려 이번에 넥크스 영지에서 물길을 막은 게 통쾌한데. 이 일로 벨데르트 백작이 괴로워하면 좋은 일이지 않느냐?”

“…….”

“너 설마, 아버지라고 그래도 벨데르트 백작을 싸고도는 건 아니지? 네 어머니를 생각하면 절대……”

“아하하, 진정하세요. 마탑주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실 리 없잖아요.”

갑자기 격해지는 분위기가 당황스럽다. 나는 건방지지 않아 보이려 애쓰며 대화를 끊었다.

“다미안은…… 벨데르트 백작을 위해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나는 순간적으로 다미안 마탑주라고 말하려던 것을 뒤늦게 얼버무리며 말했다.

가족의 앞에서 나서는데, 어중간한 호칭으로 부르면 내가 괜히 나서는 것처럼 보일까 봐 본능적으로 그랬다.

“벨데르트 성 따위는 필요 없다고 뛰쳐나갈 때는 언제고, 왜 이제 와서 벨데르트 영지에 좋은 일을 하려는 거냐?”

“영지 간의 알력으로 고생하는 건 영지민들이잖아요. 영지민들은 죄가 없어요.”

“허, 벨데르트 영지민들을 신경 쓴다고?”

영지민들이 눈에 밟혀서 굳이 연을 끊으려던 벨데르트 영지에 다시 돌아온 다미안 마탑주다.

그런데 여기 오기 전에 생각하던 것처럼 날 선 말투는 아니라고 해도…… 다미안 마탑주에게 하는 말의 내용이 좀 신경 쓰인다.

에잉턴 후작 내외는 나에게 굉장히 예의를 갖춰서 대하고 있긴 했지만 말이다.

“저 역시 백작 부인께서 고생하신 건 진심으로 안타깝다고 생각하고, 벨데르트 백작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여깁니다.”

“클로틸드 영애가 우리 집안에 얽힌 이야기를 그리 잘 알 것 같지는 않은데요.”

“그래도 다미안에게는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병을 앓으셨던 백작 부인께 깊은 공감이 되어, 감히 아들을 남겨 두고 떠나는 벨데르트 백작 부인의 심정을 헤아려 보았습니다.”

“…….”

“두 분께서는 다미안의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시니 조금만 이야기를 들어 주실 수 있을까요.”

다미안을 가는 눈으로 보던 에잉턴 후작 내외가 말을 멈췄다.

나는 이때다 싶어 다미안 마탑주에게 눈짓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이미 어느 정도는 아시는 것 같지만, 그래도 설명을 드리자면 넥크스 영지가 벨데르트 영지로 향하는 물을 막았습니다. 아마 이번에 어찌어찌 협상을 진행한다고 해도 임시방편이겠죠. 그래서 아예 다른 곳에서 물길을 뚫으려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왜 벨데르트 영지에 좋은 일을 해야 하냐는 거다.”

그 질문에는 생각해 온 바가 있었다. 다미안 마탑주가 답했다.

“제가 벨데르트의 후계자가 되겠습니다.”

“!”

못난 사위의 영지에는 좋은 일 해 주기 싫어도 손자의 영지에는 좋은 일 해 준다고 하면 괜찮을 것 같았다.

“제가 다스리게 될 영지입니다. 어차피 나중에 또다시 불거질 일이라면, 빠르게 해결하고 싶습니다.”

“…….”

“부탁드립니다. 혹시 원하시는 게 있다면 제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들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다미안이 고개를 정중히 숙이며 부탁하자 후작 내외는 당황스러워했다.

“아니, 그렇게까지는.”

“부탁하러 왔으면서 뻔뻔하게 무작정 들어 달라 말할 정도로 염치없지는 않으니까요.”

“…….”

“괜히 싫어하는 손자의 얼굴을 다시 보게 해 드린 것도 죄송한 마당에요.”

에잉턴 후작 내외는 다미안 마탑주의 말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런 말은……”

그러더니 입을 다시 꾹 다물어 버렸다.

다미안 마탑주의 입에서 스스로 ‘싫어하는 손자’라는 말이 나온 건 열 받지만. 에잉턴 후작 내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듯해서 참고 있었다.

‘그런데 결국 아무런 말도 안 할 셈인가?’

한동안 침묵이 흘렀지만 결국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에잉턴 후작과 에잉턴 후작 부인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곧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말했다.

“물길이든 뭐든, 마음대로 해라.”

찝찝한 허락이었다. 다미안 마탑주는 감사하다는 말을 하자마자 곧바로 물었다.

“그럼 제가 무슨 일을 하길 원하십니까?”

“그런 건 됐고, 벨데르트 백작가의 후계자가 된다는 말이나 반드시 지키렴.”

결국 다미안이 벨데르트 백작가의 후계자가 되는 조건만으로 영지에 물길을 뚫는 걸 허락해 준 것이다.

사실 걱정하면서 온 것에 비하면 파격적인 조건이 아닐 수 없었다.

‘오랜 시간 설득할 각오로 왔는데…… 이렇게 싱겁게 끝난다고?’

나는 여기서 무언가를 느꼈다.

다미안은 에잉턴 후작 내외가 자기를 싫어한다고 말했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단 말이지.

일견 냉정한 듯이 굴지만. 결국 다미안의 말을 순순히 들어주었잖아.

말소리가 높아진 것도 잠깐뿐이고, 사실 석찬 내내 미워하는 손주를 대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내가 다소 건방지게 끼어든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예의를 갖춰 주고 말이야.

‘뭐랄까, 그건 손주가 싫어서 제삼자인 나를 외부인 취급하는 것과는 다른 느낌이었거든?’

나는 오늘 석찬에서 나온 대화를 곱씹다가 이내 털어 버렸다.

이제 에잉턴 후작 내외와는 마주칠 일이 없을 것 같고. 어차피 물길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여기에 온 목적도 해결되지 않았는가.

그래서 크게 신경 쓰지 않으려 했는데……

석찬이 끝난 지 얼마 되었다고, 나는 다시 후작 내외와 마주치고 말았다.

“방은 편하신가요?”

아니, 후작저가 얼마나 큰데 잠깐 산책하러 밖에 나왔다고 마주쳐?

그리고 아까까지만 해도 다미안 마탑주랑 같이 있었는데, 딱 나 혼자 있을 때 이렇게 만날 일인가?

“불편한 점은 없나요, 영애?”

우리 방금 헤어지지 않았나요. 굳이 안부 인사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적당히 대꾸하고 헤어지려 했지만, 에잉턴 후작 내외는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정적이 흘러넘치던 아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헛돌고 있는 느낌인데……’

하지만 그 부분을 내가 건드려도 될까.

‘다미안 마탑주와 에잉턴 후작 내외 사이에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고.’

무언가가 있다는 걸 알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나서기는 어려운 게 사실이었다.

‘나는 진짜 약혼녀가 아니잖아.’

언제 헤어질지 모르는 계약 약혼녀에 불과한데 이 이상으로 개입해도 되나 싶어서.

지금도 많이 참견하고 있는 것 같은데.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다미안 마탑주님과 외조부모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을지도 몰라.’

나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 이왕 계약으로 묶인 동안에는 최선을 다하자.

“혹시 다미안에 관해 궁금하신 게 있나요?”

“어, 어어어?”

에잉턴 후작 내외는 내 말에 소스라치듯 놀랐다.

그 모습을 본 나는 두 사람에게 부러 더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물어보셔도 돼요. 제가 대답할 수 있는 거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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