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그, 그래요?”
그리고 두 사람이 머뭇거린 건 한순간이었다.
에잉턴 후작 내외는 내가 물어봐도 된다는 말을 꺼내자 이내 안심하더니 질문을 퍼부었다.
“밥은 잘 먹나요? 어릴 적에도 입이 짧아서 제대로 먹지 않았는데. 한창 자라날 시기에도 음식을 남기고는 했었거든요. 솜씨 좋은 주방장이 만든 것인데도.”
“너무 바쁘게만 지내지는 않나요? 오늘 보니 건장해 보이기는 하는데. 그렇다고 해도 사업 벌이는 속도가 대단해 보여서.”
“마탑은 잘 돌아가나요? 능력에 부쳐 하는 건 없나요? 어린 나이에 수장이 되어서 마법사들이 잘 따르긴 하는지.”
진짜로, 질문을 퍼부었다……
나는 질문을 기억하는 것도 힘들어서 하나씩 물어보라고 할 뻔했다.
가까스로 꾹 눌러 참았지만.
아니, 아까 그렇게 과묵하시던 두 분은 어디로 가셨나요?
“다미안 마탑주님은 바쁘게 지내세요. 저도 좀 쉬엄쉬엄하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하는데, 남들이 없을 때도 일하는 것 같아서……”
“마탑은 굉장히 잘 돌아갑니다. 어린 나이에 마탑주가 되셨는데요. 모든 마법사들이 다 존경해요. 마탑주님을 볼 때는 눈빛이 다르답니다.”
“제가 봐 온 다미안은 책임감 없는 사람이 아니에요. 사업 파트너로서 함께 일하면서 누구보다 성실한 사람이라는 걸 잘 안다고 자부합니다.”
사업을 하면서 코너에 몰렸을 때, 당황스러운 일을 맞닥뜨렸을 때. 그는 외면하고 싶은 상황에서도 도망가지 않았다.
이런저런 칭찬을 늘어놓으니 에잉턴 후작 내외는 처음의 걱정스러워하던 것과는 달리 그래도 안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럼 저도 두 분께 한 가지 말씀드려도 될까요?”
“그래요, 이렇게 성실하게 대답해 줬는데 당연하지요.”
망설임이 없었다면 거짓말.
하지만 나는 아까 계약 기간 동안은 이왕 약혼녀로서 최선을 다하기로 한 것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두 분의 마음도 이해하지만…… 다미안이 벨데르트 백작저를 뛰쳐나간 것만 생각하지 말고 나가게 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많은 생각을 했는지 헤아려 주실 수 있나요?”
에잉턴 영지에 도착하기 전, 최악의 상상보다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에잉턴 백작 내외가 몇 년 만에 보는 손자에게 냉담한 건 사실이었다.
“본인의 어머니가 고통스러워하며 버티던 걸 누구보다 잘 알았을 사람이 다미안이잖아요.”
다미안은 백작가에서 뛰쳐나올 때 사춘기의 소년에 불과했는데.
나는 다미안을 소설을 통해 알던 순간부터 대체 왜 악역이라고 부르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다미안이 벨데르트 백작의 아들이긴 하지만, 돌아가신 부인의 아들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떠올려 주셨으면 좋겠어요……”
“…….”
“맨손으로 뛰쳐나온 어린 소년이 어떻게 까다로운 마법사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지, 사업을 하면서 뛰어난 성취를 거뒀는지 두 분도 익히 아시리라 생각해요. 저라면 장하다고, 기특하다고…… 아니, 사실 마탑주로서 성취를 거두지 않았어도 이런 말을 해 주고 싶을 것 같아요.”
나는 고개를 떨궜다.
“어려운 상황에서 참 잘 버텼다고……”
사실, 내가 다미안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하고 싶었던 말을 전부 토해 낸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시원하긴 한데……
에잉턴 후작 내외가 내 말에 어떤 감정을 느낄지 모르겠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아무리 다미안이 벨데르트 영지에 미련이 있다고 해도 그렇지, 물길을 만들겠다고 냉정하게 연락 한번 안 한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숙이고 들어가야 했다면 내가 말렸을 거야.’
싱겁게 끝나서 망정이지…… 아니, 딸이 죽었다지만 어린 손주를 그냥 내버려 두다니.
아비가 벨데르트 백작 같은 인간인데. 연락 한 번을 안 하고.
“…….”
그리고 에잉턴 후작 내외는 이런 내 모습을 묘하게 바라보았다.
‘내가 다소 건방지게 굴었는데도 아무런 말이 없어. 역시 두 분은……’
나는 아까부터 짐작하던 사실을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실 에잉턴 후작님과 에잉턴 후작 부인. 두 분께서는 다미안을 미워하시지 않는 거 아닌가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에잉턴 후작 내외는 시선을 떨구더니 힘겨운 목소리 대답했다.
“딸이 남긴 아이를 어떻게 싫어하겠어요……”
에잉턴 후작 부인이 눈을 질끈 감았다. 에잉턴 후작이 옆에서 말을 받았다.
“영애가 벨데르트 백작 닮은 부분만 보지 말아 달라고 했지만, 원래부터 당연히 그랬어요. 애초에 저 애는 우리 에멜다를 더 닮았어. 벨데르트 백작을 닮았으면 저따위로 자랄 수 없지.”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이번에 미리엘 황후와 만나 결혼 제도를 개선했다는 소식을 꺼냈다.
아직 이곳까지는 안 전해졌을 것 같아서 말이다.
이제는 가문과 가문이 아니라, 개인 대 개인으로 혼담이 오간다는 것.
“그냥……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았어요. 벨데르트 백작 부인은 원래 지금의 벨데르트 백작이 아니라 백작의 형님 되시는 분과 결혼할 작정이었다면서요.”
그리하여 이제는 불행한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만약 가문과 가문의 혼담이라는 악습이 없었다면…… 벨데르트 백작 부인도 지금 벨데르트 백작 같은 인간과 만나서 고통받지 않으셨겠죠.”
과연, 에잉턴 후작 내외는 내 말을 듣고는 놀라워했다.
그러나 덧붙인 내 말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래서 다미안은 악습 때문에 자신이 태어나서 어머니가 고통받았다고, 두 분이 손자인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럴 리가……!”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에요!”
에잉턴 후작 내외는 내 직접적인 말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러나 바로 대답한 것과는 다르게 그 뒤의 말은 머뭇머뭇 간신히 흘러나왔다.
“처음엔 백작 때문에 딸이 죽었다는 게 원통해서 여러 사람이 있는 곳에서 오해할 만하게 화내기도 했지만……”
“그저…… 우리는 사랑하는 딸이 죽은 충격이 커서 주변을 살피지 못했어요.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그 후론 용기가 나지 않았을 뿐이에요.”
“…….”
“딸이 살아 있을 때는 걔가 너무 힘들어해서 걔 위주로 챙겼고…… 다미안은 상대적으로 담담한 모습이기에 괜찮은 줄 알고……”
억지로라도 에멜다를 데려왔어야 했다고 후회하던 날들.
다미안을 보게 되면 똑 닮은 딸이 계속해서 생각날까 봐, 잠시 머뭇거리긴 했다.
“그래도 에멜다가 죽었을 때는 다미안을 에잉턴 영지로 데려오려고 했어요. 어떻게 그 어린애를 벨데르트 백작가에 혼자 내버려 둘 수 있겠어요.”
“하지만…… 데리러 가겠다는 연락이 가기도 전에 다미안이 이미 집안을 뛰쳐나갔더랩니다.”
“아마…… 우리가 본인을 싫어하는 줄 알아서겠지요. 그걸 생각하면…… 정말로……”
딸에 이어 손자까지 제대로 보살피지 못했다며 에잉턴 후작은 이를 악물었다.
“……다미안 마탑주님께서 가출한 데에는 자신이 에잉턴 영지로 가면 혹 영지 간에 싸움이 붙을까 걱정한 것도 있다고 했어요.”
“뭐라고요?”
“손자인 자신마저 데려오면 정말로 에잉턴 후작가가 벨데르트 영지를 향해 그 원망을 쏟아 낼까 봐……”
“어린애가 왜 그런 생각을…… 자신만 신경 쓰기도 족할 나이에.”
에잉턴 후작의 턱이 바르르 떨렸다. 냉정해 보이던 그의 얼굴이 무너졌다.
나는 따지는 어조로 들리지 않도록 애쓰며 조심스레 물었다.
“마탑주가 된 이후에는 다미안이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되셨잖아요. 그때는 왜 찾지 않으셨나요?”
“그 이후에는 너무 늦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마탑주가 되어서 친한 척한다고 생각할까 봐……”
나는 위로하듯 말했다.
“그렇지만 다미안은 두 분께서 어린 시절에 준 견습 지팡이를 아직도 가지고 있던걸요.”
“그게 사실입니까?”
“네. 저도 마탑에 있는 마탑주님의 방에 갔다가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이에요. 아무도 그게 두 분께서 주신 거라는 걸 몰랐거든요.”
아마 에잉턴 후작 부부를 싫어한다면 매일같이 보는 제 방에 견습 지팡이를 두지도 않았을 터.
내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후작 부부의 낯빛이 환해졌다.
“영애가 아니었더라면 이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을 거예요.”
두 사람은 한결 안심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들려오는 이야기를 듣고 굉장히 걱정했거든요. 다미안이 누구에게도 곁을 내주지 않는다느니, 쉽게 만날 수도 없다느니. 대단한 사람이라 말하는 걸 수도 있겠지만……”
동화 속에 나오는 괴물의 삶 같지 않느냐며. 에잉턴 후작 부인은 낮게 읊조렸다.
그 누구와 친해지지 않아 상처받지 않는 건 좋겠지만.
동시에 누군가와 가까워져 얻는 기쁨은 모르지 못할 것이 아니냐고.
“하지만 오늘 클로틸드 영애가 함께 와 준 모습을 보고 한시름 덜었어요. 다미안을 신경 써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