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아파서 곤두섰던 신경이 느슨해진다.
누군가가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건 큰 힘이 된다는 사실이 새삼 깨달아진다.
다미안의 마력이 포근하게 나를 감싸 온다. 나는 내 병 특유의 증상이 이전보다 가라앉는 걸 느꼈다.
“앞으로는 틈이 날 때마다 마력을 추가로 넣어 드리겠습니다. 그게 좋을 것 같네요.”
“네……”
다정한 목소리가 마저 물어 왔다.
“그럼 멜라니는 아침은 거르시는 겁니까? 점심도?”
“아무래도 소화가 안 될 것 같아서요.”
“그러면 확실히 안 먹는 게 낫지요.”
안심된다.
나도 잘 몰랐지만, 성녀를 앞두고 잠을 설친 나를 자책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런 상황에서 설렌다니 뭐 하는 짓이냐고 말이다.
하지만 다미안이 있으니 다 잘될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든다.
나는 아까보다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고마워요. 그럼 저는 쉬고 올게요.”
그리고 나도 다미안을 챙겼다.
“제가 없더라도 다미안은 꼭 아침하고 점심 먹어요. 알았죠?”
“알았습니다. 제 걱정은 마십시오.”
어느덧 안정되어서 방으로 돌아왔다. 아까 내 방에서 내려올 때보다 안정된 걸음걸이였다.
헤네시아를 만날 서커스가 시작되는 건 저녁 여덟 시.
그전까지 충분히 쉬어야 했다.
그때까지는 자책도, 설레는 것도 금지.
‘오늘은 몸을 회복하고 성녀를 만나서 어떻게 할지 계획이나 다시 검토하자.’
그래도 다행이지 않은가.
성녀를 찾으면 뭐라도 해 볼 수 있다.
남은 축제 날 동안 다미안과 함께하지 못해서 물론 아쉽다.
하지만 그 아쉬움도 오늘로 마지막이어야 한다.
그래, 치료를 받아서 다 낫는 날까지만 버티자.
나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싱숭생숭했던 어젯밤과는 다르게 안온한 느낌이 나를 감쌌다.
* * *
편안한 마음으로 쉬었더니 몸과 정신이 개운해졌다.
예전에 진통제를 먹었던 때보다 훨씬 상태가 좋은 걸 보니, 다미안의 존재가 나에게 도움이 된 게 틀림없다.
‘다미안은 정말 여러모로 나에게 도움을 주는구나.’
나는 조금 더 밝은 목소리를 내며 다미안을 만나러 갔다.
“와, 숙소에 선풍기가 있어서 여름 오후에도 편하게 잤어요. 대중화는 성공인가 봐요.”
“다 멜라니 덕분이지요.”
“어머, 저는 다미안 덕분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가벼운 농담이 오고 가자, 처음에는 나를 걱정하는 듯 진지한 얼굴을 했던 다미안도 어느새 표정이 풀어졌다.
우리는 그 길로 숙소를 나왔다.
서커스는 여덟 시였지만, 시간도 남았고 내 몸 상태가 괜찮으니 조금은 구경해도 될 것 같았다.
여름이긴 하지만 습도가 낮아 선선하고, 아직은 해가 지지 않아 어둡지 않은 풍경.
걸음을 옮기던 우리는 우연치 않게 종이가 바람에 부딪혀 날리는 소리를 들었다.
“소원 종이를 적는 곳인가 본데요?”
우리는 자리에서 멈췄다. 사람들의 수많은 소원들이 휘날리고 있었다.
[부자 되게 해 주세요]
[아빠가 생일 선물로 장난감 줬으면 좋겠다]
[우리 딸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하길]
소원 종이는 축제 장소에서도 귀퉁이에 자리해 있었다. 그래서 우리가 어제도 못 본 걸 테고.
하지만 이제야 발견한 게 신기할 정도로 소원 종이는 끝이 없었다.
종이를 걸 줄이 부족해 추가하는 직원이 보였다. 확실히, 아득할 정도로 많았다.
[키 한 뼘만 더 크자]
[사업 번창]
[살 빠지는 게 소원]
나는 사람들의 소원을 죽 보며 피식 웃었다. 사람들의 욕망이란 저마다 다양하구나 싶었다.
소원을 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느껴지는 것도 흥미로웠다.
“멜라니, 우리도 이걸 쓰고 가는 건 어떻겠습니까?”
뜻밖에도 다미안이 먼저 나에게 제안했다.
원래 무언가를 하자고 권하는 건 보통 내 역할이었는데 말이다.
무튼, 나도 흥미가 있었던지라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나. 무슨 소원을 빌고 싶었기에 그러지?’
다미안의 소원이 궁금해졌다.
나는 소원을 쓸 종이를 받고서는 내 소원은 신경 쓸 생각도 않고 다미안 쪽을 흘깃 보았다.
‘미신 같은 거 안 믿게 생겼는데.’
사업과 마법이 아닌 다른 것에는 관심도 없던 다미안인데 말이야.
최대한 자연스럽게 다미안의 소원을 알아내기 위해 나는 은근슬쩍 옆으로 붙었다가, 괜히 딴청을 부리기도 했다.
그리고 결국, 나는 다미안이 종이에 쓴 소원을 보았다.
[멜라니가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나에 관한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본인을 위해서, 아니면 적어도 가족을 위해서 소원을 빌었는데.
그 소원을 나를 위해 썼다는 게…… 기분이 묘해졌다.
‘어, 조금 감동받은 것 같다.’
순간 울컥했거든. 가슴이 찌잉 울린다는 게 이런 건가.
나는 다미안의 소원을 모르는 것처럼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다미안의 소원을 본 덕에, 나도 종이에 적을 게 생겼다.
[다미안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해 주세요]
다미안. 당신이 나를 위해 소원을 적었으면, 그럼 당신은 누가 건강과 행복을 바라 주나요.
그러니까 내가 다미안을 위해 쓰는 수밖에 없잖아.
나는 최대한 표정이 드러나지 않도록 입술을 꾹 물었다.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 * *
소원을 적은 뒤, 다미안은 내게 두 끼를 내리 굶었으니 부드러운 음식을 먹는 게 어떠냐 권했다.
그리고 굉장히 건강한-무슨 맛인지 모르겠다-음식을 자신도 함께 먹었다.
“다미안은 다른 거 먹어도 되는데요.”
“아, 저도 마침 먹고 싶었습니다.”
축제다 보니 자극적이고 느끼한 음식이 길거리에 즐비했다.
이런 건강식을 찾는 것도 힘들었다.
분명 저 음식들은 맛있고 평소에 먹기도 힘든 걸 텐데. 다미안은 묵묵히 나와 함께 스푼을 들었다.
“허허, 둘이 참 잘 어울려요. 결혼은 했수?”
“아직입니다.”
음식을 파는 할머니는, 나와 다미안이 잘 어울린다며 내내 흐뭇하게 웃었다.
그러다 내게 은근슬쩍 다가와서는……
“청년이 아가씨를 참 사랑하나 봐. 보는 눈에서 꿀이 떨어져, 응?”
“……그래요?”
부끄러운 말을 들었다. 다미안의 귀에는 안 들렸으면 좋겠다.
아직은 때가 아닌걸.
굳이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는 다미안의 모습을 봐도, 속으로만 좋아할 때다.
나는 다시 부풀어 오르려는 감정을 착실하게 누르며, 이내 점포에서 나왔다.
* * *
원작에서 사건이 터진 건, 축제 마지막 날 해가 완전히 저문 후였다.
공작가의 힘으로 압박을 넣어 축제를 취소하게 할까도 고려해 봤지만.
확실한 증거도 없는 상황에서 오히려 수상하게 보일 것 같아, 우연히 일어난 사고를 막는 방향으로 정했다.
하지만 그 수많은 인파 속에서 사고 현장을 어떻게 찾고, 헤네시아를 비롯한 사람들을 어떻게 구한단 말인가.
그 고민은 다미안이 쉽게 해결했다.
“변이 마물의 마력이 변할 때 쫓으면 됩니다.”
변이 마물이 일반적인 마물과 다른 건 평상시에는 마력이나 위험성이 안 느껴지다가 갑자기 각성한다는 것.
그래서 더 위험했고.
물론 변이 마물이 각성하는 건 아주 짧은 순간.
누구든 변이 마물이 각성하기 전에는 미리 잡을 수 없다는 게 정설이라 난 걱정했지만, 다미안은 담담한 표정으로.
“저는 할 수 있습니다.”
라고 말했다.
생색을 내거나 잘난 척하는 것도 아니라, 그냥 나직하게 말이다.
하지만 오히려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지 말하지 않는 그 모습에서 더…… 새삼 다미안이 괜히 마탑주가 아니라는 게 실감됐다.
나는 먼저 서커스장 주변을 조사해 보기로 했다. 하지만 서커스장 주변에는 특이점이 없었다.
그래서 미리 구해 둔 축제 지도로 마물이 나올 가능성이 높은 곳을 추려 다미안과 조사해 보기로 했다.
다미안은 아까 얘기한 방법으로 숨어 있던 마물을 큰 난동을 부리기 전에 찾아냈다.
“키이익!”
다미안의 공격에 갑자기 각성해 날뛰는 마물 때문에 주변 사람들은 소스라치듯 놀랐다.
“갑자기 이게 뭐야!”
다리 힘이 풀려 넘어지는 건 물론이고, 기어가서라도 도망치려 했지만 그조차 못하는 사람도 수두룩했다.
그러나 다미안이 가볍게 손을 튕기는 것만으로도 무수하게 쏟아지는 빛의 창 덕분에 마물은 제대로 날뛰지도 못한 채 꿰뚫려 다미안에게 제압되었다.
“가, 감사합니다!”
빠르게 정신을 차린 사람들은 다미안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보냈다.
그사이 나는 헤네시아를 찾으려고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그녀는 없었다.
그 뒤로 우리는 여러 곳을 다니며 변이 마물을 처치하고 헤네시아를 찾으러 돌아다녔다.
변이 마물이 나타난 장소들은 참 교묘했다.
이렇게 떠들썩한 축제 가운데에서도 숨을 곳이 있었네 싶을 정도였으니까.
나는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도록, 다미안에게 가까이 다가가 소곤거렸다.
“그런데 이번처럼 네 마리의 마물로 근방이 초토화될 수 있을까요?”
“그 정도는 아닙니다.”
분명 원작에서 말한 사고의 규모는 대단했다.
‘변이 마물 때문에 레이넨 시가 거의 멸망하다시피 했다고 쓰여 있었는데……’
하지만 지금까지 나타난 마물의 수는 많아야 네 마리 정도였다.
원작에서 폴리우스가 헤네시아를 구한 곳은 도대체 어디일까……
그런데 갑자기 다미안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멜라니.”
그러고는 나를 끌어당겨 제 품에 안았다.
“어?”
내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다미안은 나를 끌어안고는 옆의 담벼락을 박차더니 하늘로 날아올랐다.
순식간에 집 몇 채쯤 되는 거리가 빠르게 지나갔다.
“설명하고 움직일 시간이 없었습니다.”
다미안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나타났습니다, 새로운 마물이.”
나는 그 말에 허공에서 레이넨 시 아래를 바라보았다.
쿠과과과광!
그리고 동시에 엄청난 굉음이 연거푸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