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현사의 사미승 (2)
002화 심현사의 사미승 (2)
평소와 다름없이 산 중턱 수련장에서 검술 52개 동작을 펼치고 있을 때였다.
인기척에 고개를 돌려 보니 보현이 팔짱을 끼고 해인을 지켜보고 있었다.
“스님. 오셨어요.”
“수련에 집중하는 건 좋다만 주변의 상황을 파악하지 못할 정도라면 문제가 있구나. 내가 오는 걸 전혀 모르는 눈치던데 그래서야 네 몸인들 지킬 수 있겠느냐?”
“히히··· 이미 스님인 줄 알고 있었지요.”
“오호! 그래?”
해인은 호흡을 헤아리는 수가 많아질수록 감각이 예민해져서 10장 이내의 움직임은 대부분 느낄 수 있었다.
10장이라면 장정 18명이 일렬로 누워 있는 거리이다.
해인의 걸음으로 다섯 호흡을 뛰어가야 도달할 거리를 감지한다는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호흡이 길어지니까 감각도 좋아졌구나. 그렇다면 그 거리만큼 단숨에 공격할 수 있겠느냐?”
“그게 말처럼 쉬워요?”
“귀를 씻고 잘 들어라 이놈아. 자고로 검객이라면 호랑이처럼 강한 심장을 가져야 하고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거침없이 움직여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네 몸을 지킬 수 있느니라.”
“스님. 그런 검객이 과연 존재하기나 해요?”
칼을 들었을 때 흔들림 없는 자세를 가져야 하는 건 이해하겠는데, 그물을 비껴가는 바람처럼 움직인다는 말은 도무지 와닿지 않았다.
사람의 몸이 어찌 작은 그물에도 걸리지 않을 정도로 움직일 수가 있겠는가.
“그런 이가 예전에 존재했으니까 이런 말이 나왔을 테지.”
“지금은요?”
“내가 속세에 있을 때만 해도 조선에 그런 신기의 검술을 펼치는 검객이 없었다만.”
“스님. 제가 과연 그런 경지에 오를 수 있을까요?”
“태식호흡을 150까지 헤아린다면 가능하다.”
“설마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세요?”
“너는 벌써 100을 헤아리지 않았느냐? 지금 그 정도의 성취를 보였다면 150도 결코 불가능한 건 아니다.”
말이 150이지, 지금 100을 헤아리는 것도 죽을 둥 살 둥 매달렸기에 가까스로 도달한 경지였다.
그런데 거기에 더해 150을 헤아릴 만큼 숨을 참는다는 건 죽으라는 소리나 같았다.
해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보현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이놈아. 네가 몸을 아끼느라 아직 극한으로 몰아붙이지 않아서 그런 게지. 한계까지 몸을 혹사시켜 보거라. 그러면 헤아리는 숫자가 불쑥 늘어날 거다.”
“스님은요?”
“90을 헤아리는 데 그쳤다만. 내가 수련을 계속했다면 능히 150은 도달했을 것이다. 그러나 태식호흡의 숫자보다는 얼마나 오랫동안 수련했느냐가 더 중요하다.”
아무래도 보현의 말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90을 헤아리는 것도 사실 범인으로서는 넘기 어려운 벽이었다.
그것도 배꼽 아래에 힘을 갈무리한다는 일념으로 참는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던가.
해인이 워낙 어려서부터 산을 탔고 태식호흡이 유독 몸에 잘 맞았기에 100을 넘길 수 있었던 게지.
해인이 못 미더워하는 표정을 짓자 보현은 당장이라도 대련할 듯 팔을 걷어붙였다.
“이놈. 나와 붙어 볼 테냐?”
“스님. 그러다가 다치세요.”
“어허! 이놈이 자만심에 빠져서 눈에 뵈는 게 없구나.”
“아이 참. 제가 잘나서가 아니라 바닥이 고르지 못해 스님께서 발목이라도 삐끗할까 봐 그러는 거예요.”
“좋다. 네 마음이 갸륵해서 오늘은 그냥 넘어가마.”
“네. 스님. 헤헤헤···.”
비록 불퉁거리기는 하나 해인이 속을 어찌 모르겠는가.
때로는 엄한 아버지처럼 때로는 자상한 엄마처럼 키웠으니 자신에게 기대고 응석을 부리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세속의 모든 인연을 끊고 욕심마저 갖지 말아야 할 출가자이지만, 그렇다고 기르고 가르친 정은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을 부모처럼 따를 때면, 다 컸어도 품 안에 답삭 안고 엉덩이를 두드려 주고 싶었다.
“녀석하고는··· 네 재능이 뛰어나다고 이 정도에 안주하지 말고 더 정진하라는 말이다. 어차피 불제자의 길로 들어설 팔자가 아니라면 속세에 나가서 괄시라도 받지 말아야 될 게 아니냐.”
보현은 해인을 속세에 내놓자니 벌써부터 걱정이 앞섰다.
15년 전이었던가?
아랫마을에 다녀오던 첫째 제자 일심이 갓 돌이 지났을 아이를 안고 온 게 해인과의 첫 인연이었다.
일심은 고갯마루를 지날 무렵 길에 쓰러진 아낙네와 그 옆에서 악을 쓰며 울고 있는 아이를 발견했는데, 아낙네는 이미 숨이 끊어진 후였다.
12살짜리 동자승이 시신을 봤으니 오죽했겠는가만 그 와중에도 아기를 챙겨온 게 다행이었다.
겁에 질려 그냥 왔다면 아기는 산짐승이 채갔을 거였다.
정신이 반쯤 나가 있는 일심을 진정시키고 고갯마루로 달려간 보현이 여인의 시신을 수습해 주었다.
해인이 심원사의 식구가 된 건 그때부터였다.
필시 귀한 집 자식이 아닐까 싶게 해인은 커갈수록 귀티가 났다.
덩치가 커지고 세속 나이로 열일곱이 되자 파랗게 깎은 머리통에도 불구하고 헌헌장부가 따로 없었던 것이다.
죽은 아낙이 어미인지는 몰라도 보개산 자락까지 홀몸으로 움직였다면 필시 무슨 곡절이 있었을 터.
보현이 한참 과거를 더듬고 있을 때 해인이 불쑥 물었다.
“스님. 몸이 강해지면 정말 괄시를 받지 않아요?”
벼슬을 해야 괄시를 받지 않지만 천민과 동급으로 취급받는 중이 무슨 수로 벼슬을 하겠는가만.
그런데 무술이라도 할 줄 알면 괄시는 받지 않고 살 수 있다지 않은가.
“양반들의 주구 노릇을 해야 하겠지만 밥을 굶지는 않을 게다. 조선 땅에서 민초들이 먹을 걱정 없이 산다는 것만도 어디겠냐.”
“양반들의 호위무사 같은 건가요?”
“주구가 된다는데 무슨 호위무사 타령이냐. 양반들 먼 길을 행차할 때 길잡이 정도라고 보면 된다.”
그 말에 해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속세로 내려가서 겨우 양반들의 수발이나 들어야 한다니까 왠지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럴 바엔 보현 스님의 곁에 남아 있는 게 백번 신관 편하다.
마음 내키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살고 싶기는 하지만, 보현 스님을 떠난다는 건 여태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고작 양반들 수발하려고 하산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럴 바엔 저는 스님을 모시고 절에서 살래요.”
“이놈이 언제는 당장이라도 산을 내려갈 것처럼 설치더니···.”
품에 남아 있겠다는 말에 보현의 얼굴은 헤벌쭉해졌다.
내려가 봐야 사고무친에 무술을 조금 하는 게 다인데, 어디서 뭘 먹고 살겠는가.
양반 댁 머슴 아니면 빌어먹기 딱 좋다.
“오냐. 그 마음 변치 말아라.”
“진짜라니까요?”
덩치는 커도 보현 앞에서는 언제나 응석받이다.
그런 해인의 반짝이는 머리통을 보현은 기특하다는 듯 쓰다듬었다.
바다가 만상을 비춤과 같이, 일체를 깨달아 아는 부처가 되라고 해인으로 이름 지었으나, 해인은 도무지 절간에 마음 두지 않고 바깥으로만 싸돌아다녔다.
가만히 앉아서 불경을 외우는 것보다는 몸 쓰는 걸 더 좋아한다는 걸 안 후로는 억지로 붙잡아 앉힐 생각을 접었었다.
유아 때 먹을 게 궁해 미음으로만 연명해서인지 병치레 또한 잦아서 몸이라도 강건하라고 역근경과 검술을 가르친 게 아이를 버려 놓은 게 아닌가 싶어 마음이 아려왔다.
“해인아. 혹시라도 만부득이 누군가를 징치할 일이 생기거든 검 끝에 약간의 온정을 남겨 두어라. 그 일로 인해 네 마음이 다칠까 염려되는구나.”
“스님.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누구를 해친다는 말이에요?”
“검을 든 자는 언젠가는 그 검으로 인해 험한 꼴을 볼 수밖에 없느니라. 힘이 있으면 반드시 그걸 휘두르고 싶은 게 중생이니라. 만약에 그런 때가 닥친다면 네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지 말고 부처님 말씀을 한 번 더 되새겨 보라는 말이다. 네 검을 올곧은 일에만 사용했으면 싶구나.”
“스님. 저는 함부로 검을 사용하진 않을 거니까 염려 마세요.”
“속단하지 마라. 속세의 사람들이 얼마나 욕심 많고 잔인한 구석이 있는 줄 넌 아직 모른다. 네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과연 힘이 있음에도 곱게 넘어갈 수 있겠느냐?”
“그럼요. 아무리 험한 일을 당해도 관음경 몇 구절 읊조리면 마음을 충분히 다스릴 수 있어요.”
해인은 보현이 쓸데없는 소리만 늘어놓는다고 속으로 투덜거렸다.
말을 많이 했더니 수련했을 때보다 배가 더 고파져서 보현이 얼른 절간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내 말을 꼭 새겨들어야 한다. 네 놈이 마음고생을 않고 편히 사는 길이다. 알았느냐?”
“알았다니까요. 절대로 그럴 일 없을 거니까 얼른 내려가세요.”
하루 이틀 들은 얘기도 아니어서 이젠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였다.
도대체 속세가 어떻기에, 속세에서 무슨 일을 당했기에 그 좋다는 벼슬길도 마다하고 출가를 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속세라고는 아랫마을이 전부인 해인으로서는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속세가 아랫마을 같다면야 무슨 걱정이겠는가.
온갖 아귀다툼을 벌어지는 곳이기에 순진한 아이가 마음고생이라도 할까 걱정되어 하는 말인데.
* * *
보현이 내려가자 해인은 목검을 놓고 역근경을 펼치기 시작했다.
역근경은 달마대사의 사상이 접목된 격투술인데, 상대의 목숨을 앗는 치명적인 공격보다는 무력화에 주안점을 둔 무술이다.
불교 계율 중 ‘산 것을 죽이지 않는다.’는 불살생의 자비 사상이 가미된 것이어서 상대방에게 큰 충격을 주어 싸움을 그치게 하는 게 한계였다.
그 예로 손바닥 턱 치기와 큰 돌쩌귀, 짓찧기 등은 이기되 목숨은 빼앗지 않는 기술이어서 해인은 그게 늘 불만이었다.
생사가 걸린 싸움에서 자비심을 베푼다고 상대방이 고마워하겠냐는 거다.
오히려 우유부단한 모습으로 보여 상대방의 기만 세워 주는 꼴이 될 것이다.
그래서 해인은 역근경을 펼칠 때 급소만 골라 공격하는 품새로 변형시켜 수련하고 있었다.
치명적인 타격을 주기 위해 손과 발에 체중을 싣기도 하고 또한 빠르기도 가미했는데, 팔을 휘두를 때나 발을 놀릴 때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아마 보현이 봤다면 살기를 품었다고 크게 경을 쳤을 거였다.
‘이것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아. 직접 가격한다는 건 여러 가지로 불편해. 자칫하면 내가 다칠 수도 있고. 가까이 붙었을 때는 단연 검이야. 아니면 아예 근처까지 오지 못하게 활로 제압하든가.’
절간에만 있을 거면서 이렇게 살기 어린 수련을 하는 이유는 산군 때문이었다.
철원 도호부 일대에는 멧돼지뿐만 아니라 이따금 범도 나타났는데, 해인은 아직 범과 한 번도 맞닥뜨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얼마 전에 아랫마을에 들렀을 때 철원 도호부 마을 중에서 호환을 당한 사람들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었다.
철원 도호부에는 골이 깊고 능선이 긴 산들이 즐비해서 범이 나타나는 건 전혀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맹랑하게도 해인은 범을 만나면 치도곤을 내리라는 옹골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산군은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는 영물이지만 사람에게 해를 입혔다면 마땅히 제거해야 한다는 게 해인의 생각이었다.
범이 얼마나 은밀하고 날렵하게 움직이는지를 몰라서 이런 방자한 생각을 하는 거였다.
범을 지척에서 만나면 이제껏 수련한 검술과 역근경으로 제압하거나, 만약 다섯 호흡 거리인 10장 밖이면 각궁으로 상대하면 될 터.
참으로 가당치도 않은 생각이었다.
범을 괜히 산군이라고 부르겠는가.
잘난 궁수 여럿이 어울려야만 가까스로 상대할 수 있다는 산군을 홀로 상대하겠다며 욕심을 부리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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