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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선 제일 검이다-3화 (3/130)

심현사의 사미승 (3)

003화 심현사의 사미승 (3)

요즘 들어 해인과 종종 드잡이하던 멧돼지가 눈에 띄지 않았다.

일부러 찾아다니지 않아도 공터에서 수련하는 소리를 듣고 찾아오거나 하산길에 기다리곤 했던 놈이다.

새끼를 키우고 있는 자신의 영역에서 소란을 떠는 해인을 내쫓으려고 기를 쓰고 덤볐던 것이다.

‘이놈이 어딜 처박혀 있기에 꼼짝을 안 하는 거지? 또 새끼를 가졌나?’

매번 보이던 놈이 안 보이니까 오히려 궁금해지기까지 했다.

최근에는 된서리가 내릴 정도로 날씨도 추워져서 이제는 멧돼지를 잡아도 될 시기였기에 멧돼지의 출현이 더욱 기다려졌다.

호흡수를 늘리다 보니 허기도 빨리 찾아와서 멧돼지 고기로 보신을 해야 헛헛한 속이 덜하지 싶었다.

얼마 전 보현 스님의 당부도 있고 해서 호흡 수련에 몰두한 끝에 호흡수를 다섯까지 늘릴 수 있었는데, 그 부작용으로 허기가 더 빨리 찾아왔던 것이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검술 52식을 한바탕 풀어내고 역근경으로 몸을 풀고 있을 때였다.

머리가 쭈뼛 서는 느낌에 급히 목검을 들었다.

멧돼지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어서 모골이 송연했던 것이다.

아무리 멧돼지가 악에 받쳐 있다고 한들 이런 기운을 발산하기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보개산에서 이런 기운을 풍기는 짐승은 없다.

필시 멧돼지보다 강한 짐승이다.

그랬으니까 멧돼지가 자취를 감추었겠지, 아니면 이미 먹혀 버렸거나.

일단은 심현사 근처까지 맹수가 나타났다는 게 문제였다.

볼 것 없이 범일 가능성이 높았다.

범으로 단정 짓고 나자 긴장이 배가 되었다.

만약 범이 보개산에 자리를 잡는다면 앞으로 골치 아파진다.

보개산에는 유난히 산짐승들이 많아서 범이 쉽게 물러가지 않을 것이므로.

편전만 있었어도 원거리에서 공격할 수 있을 텐데, 하필이면 오늘따라 편전을 들고 오지 않았던 것이다.

근접전은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편전을 믿었기에 호기를 부릴 수 있었는데 말이다.

온갖 생각이 꼬리를 물고 있을 때였다.

강렬한 노린내가 공터로 풍겨 왔다.

사냥감을 노리고 접근하는 육식 동물은 바람을 안고 오는 게 정상인데, 오히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는 건 배가 불러 사냥할 마음이 없거나 자신의 영역이니까 알아서 자리를 피하라는 거다.

그러나 해인은 목검을 들고 노린내가 풍겨 오는 방향으로 자세를 잡았다.

잠시 후, 추측한 대로 노린내를 한껏 풍기고 나타난 동물은 몸길이가 족히 10자는 됨직한 범이었다.

등은 적황색이고 나머지 부분은 짙은 황갈색의 털로 덮여 있는데, 얼마나 잘 먹었는지 털에 기름기가 자르르 흘렀다.

이마에 왕(王)자가 새겨진 놈의 눈에서는 불똥이 뚝뚝 떨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범은 해인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느긋한 걸음으로 공터 어귀에 몸을 드러냈다.

범은 그저 다른 짐승보다 더 날렵하고 덩치 큰 짐승에 불과하다고 치부했는데, 막상 눈앞에 맞닥뜨리고 나니까 그렇지 않았다.

범의 눈동자를 보는 순간 절로 몸이 굳고 오금이 저렸던 것이다.

보현 스님이 말하기를 수련이 깊은 사람의 기세를 미물들도 알아본다고 했건만, 범은 해인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목검을 곧추세우고 잔뜩 긴장한 채 일각의 반의반도 안 되는 시간을 서 있었음에도 얼굴은 계절과 상관없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해인이 정신을 집중하여 목검을 겨눈 채 범을 노려보고 있자, 범이 뒷발로 바닥을 한바탕 긁으며 으르렁거렸다.

딱히 배가 고파 보이지는 않았다.

만약 배가 고팠다면 은밀히 접근해 바로 덮쳤을 것이지만 버젓이 눈앞에 나타났다면 호기심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방심할 수 없었다.

혹시 인육을 먹어 본 경험이 있는 놈이라면 다짜고짜 공격할 것이므로.

해인은 먼저 공격해야 할지를 놓고 고민하고 있었다.

공격이 곧 방어이기 때문이다.

선공을 날리면 사람이든 짐승이든 일단은 위축되기 마련인 것이다.

특히 짐승들은 자신보다 강한 동물이라고 판단되면 서슴없이 자리를 피하는 습성이 있다는 걸 알기에 먼저 공격을 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생각은 그리 길지 않았다.

목검을 곧추세운 후 미끄러지듯 범의 코앞까지 전진한 해인은 강한 기합과 동시에 표두압정세로 내리쳐 버렸다.

“핫!”

“어흥!”

갑작스러운 공격이었지만 범은 가볍게 피하며 짧은 포효를 터뜨렸다.

목에서 나는 소리가 아닌 배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것 같은 낮은 저음이었다.

어떤 짐승들에게서도 들을 수 없는 특이한 중저음은 해인의 근육마저 경직되게 만들었다.

범의 포효에 다들 꼼짝을 못한다는 게 바로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그렇지만 오랜 수련으로 단련된 해인은 중저음의 족쇄에서 금방 헤어 나올 수 있었다.

범은 자신의 포효에도 상대방이 흔들리지 않자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심하고 있다 싶어 한 발 내디디며 또 한 번의 표두압정세를 펼쳤다.

그랬더니 범은 기다렸다는 듯 솥뚜껑 같은 커다란 앞발을 불쑥 내밀었다.

텅!

마치 쇠붙이들이 맞부딪치는 것 같은 소리가 온 산에 울렸다.

낫처럼 생긴 앞발톱과 목검이 부딪치는 소리였다.

바로 눈앞을 지나치는 발톱이 숫제 잘 벼른 낫처럼 보였다.

목검에서 전해지는 발톱의 강도는 단단한 바위를 두드린 것 같아서 손목이 저릿했다.

제대로 된 파지법이 아니었으면 목검은 하늘 높이 떠올랐을 터.

해인이 당황한 데 반해 범이 별로 타격을 입은 것 같지도 않았다.

이 정도의 격돌이라면 약간의 기별이라도 갔어야 정상인데, 범은 별일 아니라는 듯 앞발을 쳐든 채 노려보고만 있었다.

여기에서 멈추면 꼬리를 만 것으로 알고 범은 분명히 공격할 것이어서 해인은 목검을 휘두르며 범을 압박해 나갔다.

범과의 공방은 수차례 계속되었다.

검술 52식 중 가장 강한 공격을 모두 풀어내는 동안 해인의 옷은 걸레 조각으로 변했다.

옷이 갈가리 찢어졌지만 다행히 치명상을 입지 않았다.

그만큼 해인의 몸놀림과 방어력이 좋았다는 방증이다.

깊은 상처는 없었으나 발톱이 스친 곳이 무척 쓰라렸다.

해인은 범을 잡겠다는 생각보다는 쫓아야 하겠다는 일념으로 범의 앞발만을 공략했다.

휘두르는 앞발 때문에 몸통은 아예 건드리지도 못했지만, 범 또한 이렇다 할 타격을 입히지 못하자 뒷걸음질 치는 횟수가 늘어났다.

자신에게 덤비는 인간이 있다는 게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대로는 당한다. 저놈은 결코 쉽게 물러나지 않는다.’

포식자라고 하더라도 강하게 반항하는 먹잇감은 함부로 건드리지 않는다.

자신이 다치는 걸 극도로 경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점을 알려 줘야 할 필요가 있었다.

짧은 생각 끝에 혼신의 힘을 다하여 횡베기로 앞발을 훑었다.

동시에 산이 떠나가라 기합까지 넣었다.

좀 더 강한 기세를 보이려는 의도였다.

“핫!”

따악~!

목검에 부딪친 부위에서는 제법 큰 소리가 들렸다.

운 좋게 범의 앞발에 제대로 타격을 가한 것이다.

그게 충격을 주었는지 범은 앞발을 털며 한 발짝 물러났다.

목검과 앞발을 번갈아 쳐다보며 송곳니를 드러내던 범은 잠시 으르렁거리더니 몸을 돌려 능선으로 느릿느릿 사라졌다.

놈은 행동으로 봐서는 해인이 무서워서 피하는 건 아니었다.

자신에게 덤비는 인간이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기 때문이다.

범이 사라지자 해인은 다리가 풀려 저도 모르게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긴장으로 인해 온몸에 힘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얼마간을 그렇게 땅바닥에 멍하게 앉아 있던 해인은 정신을 가다듬었다.

‘아직 멀었구나. 작은 성취에 자만하고 범을 얕잡아 봤으니···.’

만약 범이 배가 고픈 상태였다면 생사를 염려해야 할 상황이었던 것이다.

범은 자신이 다칠 것을 염려해서 회피한 것이지 결코 힘이 없어서 피한 건 아니었다.

한낱 미물에 불과하다고 가볍게 생각한 게 얼마나 큰 오판이었는지 새삼스레 깨달았다.

그러나 산을 내려가는 해인의 표정에는 자신감이 잔뜩 묻어나 있었다.

* * *

범을 만나고 나서는 산을 오르기가 두려웠다.

며칠 동안 절간에만 머물다가 우연히 절 근처를 배회하는 멧돼지를 확인한 이후부터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멧돼지가 돌아다닌다는 건 범이 보개산을 떠났다는 증거니까.

포식자가 어슬렁거리는데 돌아다닐 짐승은 없음이다.

그날부터 해인은 미친 듯이 검술 수련에 매달렸다.

그리고 태식호흡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만약 태식호흡의 수련 정도가 조금만 더 깊었어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을 거니까.

해인의 변화를 가장 먼저 눈치챈 사람은 셋째 사형인 법륜이었다.

요즘 부쩍 말이 없고 수련에만 몰두하는 게 조금 이상하다 싶었는지 법륜이 넌지시 물었다.

“요즘 미친 듯이 수련만 하는데 무슨 일이 있는 거냐?”

법륜이 이미 눈치를 채고 물어 오는데 숨길 것도 없어서 범을 만난 얘기를 해 주었다.

그랬더니 법륜이 펄쩍 뛰었다.

“큰일 날 뻔했구나. 그런데도 산에 계속 올라갔다는 말이냐? 또 범이 나타나면 어쩌려고?”

“보개산이 놈의 영역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에요.”

“범이 괜히 나타났겠냐? 보개산을 새로운 영역으로 삼았으니까 나타난 게지.”

“놈의 영역은 아닌 것 같아요. 며칠 후에 우연찮게 멧돼지를 만났거든요.”

“······?”

“제가 본 멧돼지는 산에 오르면 자주 보던 놈이에요. 그놈이 다시 나타났다는 건 어떤 위협도 없다는 것이잖아요.”

“그렇기는 한데 범이 또 돌아오면 어쩔 테냐?”

“그때는 승부를 봐야지요.”

자존심 때문에 나온 말일 뿐 결코 범과 맞설 생각 따위는 없었다.

“네가 지금 제정신인 게냐? 범이 어떤 짐승인데 혼자 상대하겠다고?”

“이번에는 자신이 있어요.”

“안 되겠다. 주지 스님께 말씀드려야겠구나.”

“법륜 사형!”

“깜짝이야. 이 녀석이 왜 큰 소리야.”

“절대로 주지 스님께 말씀하지 마세요. 그랬다가는 저는 절간에 갇혀 꼼짝도 못 할 거예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범이 나타난 일을 함구하라는 게 말이 되느냐? 주지 스님이나 위의 사형들이 위험할 수도 있는 일인데?”

사실 그런 부분이 염려되어 범의 흔적을 찾아다녔지만, 어디에도 범이 머문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범은 이미 보개산을 떠난 것으로 봐야 했다.

“제가 그동안 범이 있을 만한 곳은 모조리 찾아봤는데 흔적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어린 멧돼지들까지 온 산을 헤매고 다니지요.”

“겁도 없이 범을 찾으러 다녔단 말이냐? 네가 간이 단단히 부은 모양이구나.”

“사형. 제발 일을 크게 만들지 말고 지켜봐 주세요. 지금껏 아무 일도 없었잖아요.”

“아니다. 그냥 넘어갈 일이 따로 있지 이게 어디 보통 일이냐? 보개산에 범이 나타났다면 아랫마을에도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걸 왜 생각 못 하느냐.”

듣고 보니 그랬다.

범이 괜히 보개산까지 와서 어슬렁거렸겠는가.

보개산을 자신의 영역으로 삼고자 왔을 수도 있음이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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