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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선 제일 검이다-6화 (6/130)

금강산 건봉사 (2)

006화 금강산 건봉사 (2)

첫날은 백운 계곡을 거쳐 양구현까지 50리를 걸었다.

해인 혼자라면 100리도 가뿐하지만 늙은 보현을 생각해서 걸음을 늦추었던 것이다.

보부상이 다니는 거친 임도여서 사냥꾼이라도 하루에 오십 리는 버거운 거리였다.

등짐장수(부상)와 봇짐장수(보상)에게 보부상이라는 이름을 내려 준 이는 조선을 건립한 태조대왕이라고 했다.

여말 위화도 회군 때 800여 명의 등짐장수들이 군량미를 운반해 줬기에 그 공로를 인정하여 조정에 보부청을 설치하고 각종 행상권과 독점적인 전매권을 보장해 준 거였다.

오늘 보현과 해인이 발품을 팔았던 길도 보부상들이 주로 다니는 길이었다.

서서히 땅거미가 지고 있어서 서둘러 쉴 자리를 찾았다.

보현 스님이 조금만 더 가면 맞춤한 쉴 곳이 있다고는 했지만, 그랬다가는 어둠 속에서 저녁 공양을 지어야 하기에 해인은 이쯤에서 노숙하자고 미적거렸었다.

산속에서 맞춤한 쉴 곳이라고 해봐야 거기가 거기라는 걸 보개산을 싸돌아다니면서 이미 터득한 해인이다.

미리 잠자리를 봐두고 화톳불을 피울 땔감을 준비하려면 지금이 딱 적당했다.

보현도 수긍이 되는지 더는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해가 긴 여름날이라면 모를까 해 짧은 봄날은 금방 어두워지기 때문이다.

해인이 다람쥐처럼 주변을 돌아다니더니 한 곳을 지목했다.

“스님. 저쪽에 큰 바위가 있어요. 약간 오목해서 바람을 피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옆에 작은 개울도 있고요.”

“그러자꾸나. 조금만 더 지체하면 곧 어두워져서 아무것도 못 하겠다.”

“저는 땔감과 솔가지를 베어 올게요. 찬 기운을 막으려면 바닥에 솔가지라도 좀 놓아야겠어요.”

“솔가지는 됐다. 앉아서 자면 되는 것을.”

“내일 갈 길도 만만찮은데 편히 주무셔야지요.”

“절집을 나오는 순간부터 고행인데 뭘 바라겠냐.”

보현이 손사래를 쳤지만 세속 나이 환갑을 바라보는 스님을 찬 바닥에 눕게 할 수는 없었다.

지게를 벗어 놓은 해인은 작은 도끼를 들고 주변에 있는 소나무의 생솔가지를 치기 시작했다.

금세 한 아름의 생솔가지와 땔감을 장만한 해인은 바위 아래에 솔가지를 펼쳐 놓고 적당한 돌을 찾아내 솥단지를 걸 화덕을 만들었다.

보현은 생솔가지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해인의 모습을 지그시 지켜보고 있었다.

“이 녀석. 경전 공부를 그렇게 부지런히 했으면 벌써 성불했겠다.”

“이런 일도 공부가 깊어야 하는 거라고요. 사형들과 동행했으면 분명히 오늘 저녁 공양은 못 잡숫고 주무셨을걸요?”

“민초들은 헐벗고 굶주리고 있는 판에 하루 한 끼를 먹는 것도 감사해야지. 하릴없이 염불이나 외우는 중이 때마다 끼니를 찾아 먹어서야 되겠느냐.”

“중노릇하기가 어디 그리 쉬운···.”

한마디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기에 냅다 뒤통수를 갈겼다.

“아야!”

“내 손바닥도 피하지 못하면서 범이 우습다고?”

“피할 수 있었지만 억지로 맞아 준 거라고요.”

“말이나 못 하면···. 이놈아. 중노릇이 세상에서 가장 편하다는 걸 아직 모르느냐?”

“저는 편한 중노릇보다는 힘들더라도 속세에서 마구 굴러다니고 싶어요.”

“이놈이 언제는 내 곁에 있겠다고 하더니. 속세가 무어 그렇게 좋다고. 속세가 무간지옥인 걸 모르느냐?”

“저는 재미도 없는 절집보다는 무간지옥일지라도 속세가 더 좋아요.”

“어허! 이를 어쩔꼬. 나무 관세음보살.”

도저히 대화가 안 되자 보현은 불호를 외우며 외면하고 말았다.

보현이 그러거나 말거나 해인은 불을 조정해 가며 뜸을 들인다고 분주했다.

“스님. 밥이 다 되었어요. 찬은 오다가 거둔 취나물과 달래와 잔대가 답니다.”

“된장에 찍어 먹으면 그게 성찬인 게지. 어서 먹자. 네 덕에 한데에서 저녁 공양을 다하는구나.”

“사형들하고 다닐 때는 저녁 공양을 못 드셨어요?”

“여염집이나 주막이 없는 산속에서 무슨 수로. 네가 솥단지라도 챙겨 왔으니까 이런 호사를 누리는 게지.”

“헤헤···. 그럼 앞으로 스님께서 건봉사에 출타할 때는 제가 모실게요.”

“일없다. 이놈아.”

* * *

양구현을 출발해 홍천을 지나 인제현까지의 여정은 순탄했다.

그런데 막 진부령 초입에 들어섰을 때였다.

한 식경 거리쯤에서 사람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마침 바람이 산 위에서 아래로 불고 있어서 먼 거리임에도 해인의 귀에 소리가 포착된 거였다.

“스님. 저 위에 사람들이 있는데요?”

“응? 내 귀에는 새소리밖에 안 들리는데?”

“헤헤···. 제 귀가 많이 밝아졌잖아요.”

“산속에 사람 소리가 들린다면 필시 보부상들인가 보구나.”

“그럼 새참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겠네요.”

등짐을 지고 재를 오르내리는 보부상이라면 당연히 육식을 할 거라는 기대로 해인의 마음은 바빴다.

보리밥만 먹어서는 힘을 쓸 수 없었던 것이다.

“네 녀석은 온통 먹을 궁리밖에 없구나.”

“가져온 곡식이 다 떨어져서 오늘 저녁 공양은 없다고요. 제가 얼른 가서 보부상들을 붙잡아 놓고 있을게요. 스님은 천천히 올라오세요.”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보현도 지금 배가 무척 고픈 상태였다.

인제현의 여염집에서 부실한 아침 공양을 얻어먹은 게 다였기에 진즉부터 허기가 찾아왔던 것이다.

자신도 허기가 지는데 지게를 지고 험한 길을 오른 해인은 더 할 거였다.

“어허! 하루 저녁쯤 굶는 게 뭐 어떻다고···.”

“면포가 남았는데 바꿔 먹어야죠.”

“이놈아. 돌아갈 때를 생각해야지.”

“건봉사에서 챙겨 주겠지요. 왕실의 원당이라는 절에서 그 정도도 안 챙겨 주겠어요.”

보현 스님이 매년 건봉사를 방문하는 이유도 쇠락한 심현사를 중창불사하려고 공을 들이는 거였다.

건봉사에서도 당장 도움을 주지 못하자 돌아가는 길에 빈손으로 보내지는 않았다.

사형들이 건봉사를 다녀올 때면 그 먼 길에도 불구하고 면포 등을 바리바리 짊어지고 왔던 것이다.

“이놈아.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공것을 받아 낼 궁리부터 하느냐.”

“중들이 재물을 쌓아 둔다는 말을 못 들었거든요. 가진 게 많은 절이라면 재물을 나누어야지요. 스님이 이렇게 공을 들이는 것도 가진 것을 조금 나눠 달라는 거잖아요.”

“이놈이?”

보현이 눈을 부라리는 것도 아랑곳을 하지 않고 해인은 말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발걸음을 떼려 하자 보현이 막았다.

“혹시 산적들일지도 모르니까 조심해라?”

“벌건 대낮에 산적질을 한다고요?”

“녀석아. 밤에 산을 넘는 자들도 있다더냐? 그리고 산적들은 잠을 안 잔다던.”

“그렇기는 하네요.”

해인은 빠른 걸음으로 산길을 올랐다.

계곡을 옆에 끼고 구불구불하게 난 임도는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도 어려울 정도로 협소했다.

오르막길이었지만 해인은 평지나 다름없이 내달렸다.

보개산을 오르내리던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반 식경도 채 안 되어 도착한 곳은 약간 너른 공터였다.

그곳에는 환도 등으로 무장한 열댓 명의 중장년들이 서로 대치하고 있었는데, 아직 접전은 벌이지 않고 상대방을 향해 고함만 지르고 있었다.

한눈에 딱 봐도 보부상들이 산적을 맞이한 꼴이었다.

보부상들도 산적들의 출몰에 대비해서 환도를 갖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끼어들어야 할지 그냥 지켜봐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는데, 양쪽 모두 해인의 등장에 적잖이 당황했는지 일제히 해인을 돌아보는 게 아닌가.

중이 갑자기 등장했으니 그럴 만도 할 것이다.

그중 가장 불량하게 생긴 자가 대뜸 해인에게 물었다.

“넌 뭐냐?”

해인의 눈썹이 순간적으로 꿈틀거렸다.

함부로 뱉는 말에 해인의 말도 곱게 나갈 수 없었다.

“지나가는 길손이오만. 길을 막고 있어서 잠시 기다리는 것뿐이오. 어서 볼일을 보시우.”

해인의 대거리를 보현이 봤다면 치도곤을 내겠지만, 지금은 보현도 옆에 없겠다 내키는 대로 막 나갔다.

“다치기 전에 얼른 꺼져라.”

“댁들이 길을 열어 줘야 꺼지든 말든 할 게 아니오.”

“이런 천둥벌거숭이 같은 중놈이 있나.”

“중놈?”

“중을 중놈이라 부르지 뭐라고 하겠느냐. 피를 보고 싶지 않다면 오던 길로 되돌아가거라. 이놈.”

중놈이라는 말은 동자승 시절에 보개마을의 조무래기들과 드잡이질을 하면서도 들어 보지 못한 막말이었다.

아무리 막 나가는 자들도 불제자에게 중놈이라는 상스러운 말은 하지 않는다.

이 말을 듣고도 그냥 넘어간다면 진부령을 넘나드는 다른 스님들에게도 행악을 떨어 댈 터.

힘이 없다면 모를까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불제자인 중에게 막말을 하는 걸 보니 배워 먹지 못한 불상놈이구나. 빈승은 건봉사로 가야 하니 길을 열어라.”

해인은 열이 뻗쳐 에라 모르겠다 하고 막 나가 버렸다.

어차피 산적들과 드잡이를 해야 이 길을 지날 수 있고, 보부상들도 무사할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저 중놈이 단단히 미쳤구나. 우리가 누군지 알고.”

“누구기는. 산적 놈들이겠지. 지나가는 길손들의 봇짐이나 털려는 자들을 달리 부를 말이 있느냐?”

“이놈이 명을 재촉하는구나.”

상황을 파악해 본바 목자가 불량한 자를 포함해 일곱이 산적이고, 나머지 여섯의 복장으로 보아 필시 보부상일 터.

보부상이 쥐고 있는 환도는 일전에 연천 현감 일행이 소지했던 것과 흡사했다.

환도는 칼집에 고리가 있어서 그렇게 부르는데, 칼날 길이 3척 3촌, 자루 길이 1척, 무게 1근 8량이다.

도끼며 창, 환도 등을 들고 있는 산적들의 면면을 보아하니 체계적으로 무술을 익힌 자들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보부상으로 보이는 자들 또한 심하게 다리를 떨고 있었다.

해인이 산적들에게 막 대할 수 있었던 건 병장기를 움켜쥔 파지법이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실력을 이미 파악했기에 겁먹을 이유가 없었다.

“어서 길을 열어라. 안 그러면 팔다리가 부러질 것이다.”

그렇게 소리친 후 지게를 벗고 짐 속에서 목검을 꺼내 들자 산적들은 배를 잡고 박장대소를 했다.

날이 선 병장기 앞에 목검을 꺼내 들었으니 오죽하겠는가.

“아이야. 살날이 구만리인데 불구로 지낼 수는 없잖으냐. 네가 승복을 입고 있어서 봐주는 거니까 어서 내려가거라.”

해인과 계속 대거리하던 산적은 불쌍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죽거렸다.

중이니까 봐준다는 식이다.

“길고 짧은 건 대 봐야 아는 법.”

말이 끝남과 동시에 해인은 바람같이 달려들었다.

방심하고 있을 때 선공을 날리려는 것이다.

본보기로 몇 놈만 두들기면 꼬리를 내릴 것이므로.

곧이어 보개산 멧돼지를 때려잡던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되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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