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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선 제일 검이다-8화 (8/130)

문수보살과의 만남 (1)

008화 문수보살과의 만남 (1)

건봉사에서 머무는 동안 해인은 틈날 때마다 적멸보궁 앞에 있는 진신사리 탑을 돌았다.

낯선 사미승이 매일이다시피 탑돌이를 하자 그것도 구경거리라고 자그마한 노스님이 해인을 지켜보고 있었다.

적멸보궁 문설주에 기대앉아 탑돌이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노스님은 딱 봐도 할 일이 없어 심심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노스님이 지켜보든 말든 해인은 부처의 기운을 받아 보겠다고 탑돌이에 몰두했다.

나흘째 되는 날 아침이었다.

요란하게 기침을 하며 적멸보궁에 등장한 노스님은 무아지경으로 탑돌이를 하는 해인에게 말을 걸었다.

한창 몰입하고 있는데 말을 거는 터라 살짝 짜증이 났지만, 남의 절간이니 무시할 수도 없었다.

“어디서 온 사미승인데 이렇게 열심히 탑돌이를 하느냐?”

얼굴 표정만큼 목소리도 무료함이 가득 묻어났다.

“심현사에서 왔습니다. 노스님.”

“헐헐···. 심현사라면 보현이 있는 절인데 네가 보현의 제자이더냐? 그런데 어째 탑을 그리도 열심히 도는 거냐?”

보현 스님도 큰스님 소리를 들은 정도로 법력이 깊은데 그냥 법명만 부르는 것으로 보아 한참 윗줄인 것 같았다.

보현 스님을 알고 있다는데 그냥 벌줌이 있을 수 없어서 해인은 정색을 하고 인사를 했다.

“소승 해인이라고 합니다. 보현 스님의 막내 제자입니다.”

“소승은 무슨. 어찌 되었든 보현의 막내 제자구나. 그런데 탑은 왜 그리 열심히 돌고 있는지 말해 줄 수 있느냐?”

사미승이기에 소승이라 한 것인데, 노스님은 코웃음을 쳤다.

같지도 않다는 뜻이리라.

속에서 불쑥했지만 그렇다고 겉으로 드러낼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진정한 불제자가 되고자 탑을 돌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영험한 기운을 얻고자 함도 있고요.”

“어허 불심이 무척 깊은 사미승이로고.”

“아닙니다. 무예를 익히는 데 도움을 될까 싶어 그러합니다.”

굳이 감출 것도 없다 싶어 솔직히 얘기했다.

이미 자신을 무시하고 있는데 눈치볼 것도 없다 싶었던 것이다.

“무예를 익히고 있다고? 중이 염불을 안 외우고 무예를 익히다니 참 별일이구나.”

무예를 익힌다는 말에 잠시 눈을 반짝이더니 이내 장난기 가득한 얼굴이 되었다.

“그런데 아이야. 사심 가득한 마음으로 뭘 얻겠다고 그러누? 생각을 버리고 망념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하거늘. 탑돌이 내내 뭘 얻겠다고 욕심을 부리면 얻을 것도 못 얻는단다.”

노스님은 해인의 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걸 곧이곧대로 인정할 수 없어서 나름 변명을 했다.

“노스님. 저는 지금 무아지경인 상태로 탑을 돌고 있었습니다.”

“네 얼굴에 미망이 가득한데 무슨 소리를 하는 게냐?”

“그게 아닌데···.”

“탑돌이를 하면서 너는 엉뚱한 곳에 마음이 뺏기고 있지 않았느냐. 무아지경이었다면 누가 옆에 있든 말든 신경쓰지 말아야하는데 넌 이미 내가 올 때부터 신경을 쓰고 있더구나.”

“그렇게 요란하게 기침을 하시는데 어찌 모르겠습니까?”

“내가 그랬나?”

자신이 언제 그랬냐는 듯 천연덕스럽게 반문한다.

그러던 노스님은 아예 적멸보궁 문설주를 두드리며 와서 앉으라고 권했다.

거절할 수도 없어서 해인은 주춤거리며 다가섰다.

노스님의 근처로 다가앉자 잽싸게 해인의 손목을 낚아채더니 눈을 지그시 감았다.

얼마나 날쌘지 해인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손목을 잡히고 말았다.

곧이어 손목을 통해 이질적인 기운이 해인의 몸으로 파고들었다.

뿌리치고 싶었지만 도무지 힘을 쓸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냥 손목이 잡힌 채 노스님이 하는 대로 가만히 있어야 했다.

“어라! 이것 봐라. 보현이 제법 잘 가르쳤구나. 아이야. 도대체 얼마나 수련했기에 벌써 단전에 정을 심어 놨느냐?”

단전에 모이는 힘을 정(精)이라고 하는가 보았다.

보현 스님에게서도 들어 보지 못한 말이어서 해인은 두 눈만 껌뻑거렸다.

귀찮게 할 것 같았기에 말을 섞고 싶지는 않았으나 정이란 말뜻이 궁금해서 어쩔 수 없이 질문을 던졌다.

“노스님. 정이라는 게 무엇인지요.”

“생명수 같은 것이다.”

“네?”

“정은 배꼽 아래 단전에 모이는데 단전은 생명이 모이고 생겨나는 곳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당연히 그곳에 모인 기운은 생명수지 않겠느냐.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그런데요?”

“그곳에 힘이 모이면 어찌 되겠느냐? 생명이 모이고 생겨나는 곳에 남들보다 강한 기운이 서려 있다면 말이다.”

뭔 말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일단 좋다는 뜻이어서 해인의 입은 헤벌쭉해졌다.

“오감이 조금 밝다는 소리는 들었습니다.”

“덩치는 장정보다 큰 놈이 아직도 어린아이 같은 소리를 하는구나. 이놈아. 귀를 씻고 잘 들어라. 단전에 기운이 모여 있다는 건 여벌의 생명을 하나 더 갖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

단전에 기운을 조금 품었다고 죽음까지 피할 수 있는 건 아닐 터.

너무 난해한 말이어서 해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이란 말도 모르느냐? 보현이 그것도 가르쳐 주지 않더냐?”

“보현 스님은 제 나이에 단전에 힘을 모이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고만 하셔서···.”

“에잉. 시원치 못해서는. 보현이 아직 공부가 짧아서 그런 게다. 아이야. 네가 보현의 제자라니까 귀찮지만 내가 한마디 해 주마.”

정작 귀찮은 사람은 해인인데 노스님은 자신이 귀찮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걸 내색할 수는 없어서 말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이런 얘기를 듣는 것도 기연이라면 기연이 아니겠는가.

건봉사에 왔으니까 이런 얘기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진신 사리를 모신 곳에서 정성 들여 탑돌이를 했더니 하늘이 감복한 것이리라.

“이런 얘기는 곡차라도 마시면서 해야 하는데 네놈을 보니 그런 걸 가져올 주변머리도 없어 보이니까 그냥 말해 주마."

잠시 뜸을 들이던 노스님이 재차 입을 열었다.

"신은 곧 영인데 그놈은 중단전에 있으면서 사람의 마음을 다스린다. 그래서 생각이 많고 정신을 많이 쓰는 사람은 몸의 균형을 잃고 쉬이 늙는단다. 내가 이렇게 늙었듯이 말이다. 중단전이 열리면 환희지심이 일어나고 오욕칠정의 감정에 초연해지니라.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네. 그래서요.”

“헐헐···. 고놈 참. 그렇게도 궁금하냐. 신이 있어 마음을 다스린다면 정이 있어 생명을 연장한다는 말이다. 자! 그렇다면 대충 짐작이 갈 것이다. 주야장천 경전을 외우고 화두를 풀어야 하는 제대로 된 중들은 중단전을 열기 위해 신을 쌓아야 할 것이고 너처럼 무예를 익히는 땡추들은 정을 쌓아야 하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말끝마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고 되뇌는데 일일이 대답하기도 귀찮을 지경이었다.

그냥 아는 걸 쭉 읊어 주면 금방 끝날 것을 괜히 시간을 끌어 무료함을 달래려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나머지 말을 듣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맞장구를 쳐주어야 했다.

“네. 그리고요.”

“이놈이 아주 날로 먹으려고 드네. 내 입가에 거품 끼는 게 안 보이느냐? 저기 샘물에서 물이나 떠 오거라. 목이 말라 말이 안 나오는구나.”

심심하던 차에 잘 걸렸다 싶었는지 이제는 물을 떠다 달란다.

법랍으로 따져도 환갑을 넘었을 노스님에게 그 정도도 못 해 주겠는가만, 이러다가 저녁 공양을 놓치는 게 아닌가 싶어 조바심이 났다.

표주박에 물을 떠다 바치자 맛나게 마시고 나서는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어딜 가서 이런 귀한 얘기를 듣겠느냐. 오늘 나를 만난 것도 다 인연이 있어 그런 것을. 물까지 떠 줬는데 그냥 보낼 수는 없구나. 지금부터가 중요한 대목이다.”

“저기 노스님. 저녁 공양을 할 시간인데 내일 들으면 안 될까요?”

“어허! 지금 놓치면 기회가 없는데 그깟 공양이 무어라고 그러느냐.”

“탑돌이를 너무 해서 그런지 뱃가죽이 등에 붙었습니다. 그러니 내일 마저 들으면 안 되겠습니까?”

“그게 모두 수련이 부족한 때문이니라. 단전에 정이 쌓이면 배고픈 것뿐만 아니라 잠을 자지 않아도 몇 날을 버틸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이런 얘기를 어디서 들을 수 있다고 그깟 저녁 공양에 목을 매느냐. 더 중요한 얘기가 있는데 그냥 가려느냐?”

“보현 스님이 걱정할까 싶어 그럽니다.”

“좋다. 오늘은 이 정도로 하고 내일 이곳에서 다시 만나서 얘기를 해 보자꾸나.”

“네. 노스님.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보현 스님과 노스님은 어떤 관계이신지요.”

“보현에게 문수를 만났다고 하면 알 게다. 아이야. 내일 보자꾸나.”

* * *

“스님! 제가 적멸보궁에서 누구를 만났는지 아세요?”

“이놈아. 부처님 진신 사리를 모시는 경건한 곳에서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더냐. 거기에서 떡이라도 나눠 주더냐?”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이라서 수련하기에는 그만이었거든요.”

부처의 영험한 기운을 얻기 위해 탑돌이를 했다고는 할 수 없어서 수련을 핑계 대었다.

사리탑을 도는 행위는 중들이라면 누구나 하는 일이니까.

“어허! 그러다가 건봉사 노화상들의 눈에 띄면 어쩌려고···.”

“안 그래도 문수라고 하는 노스님을 만났어요. 그분도 스님을 잘 알고 있던데요?”

“무엇이? 문수보살을 만났다고?"

문수라는 스님을 만난 게 무슨 큰일이라고 보현의 눈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문수보살이 아니라 문수라는 스님을 만났다니까요.”

“이놈아. 어떤 화상이 감히 문수라는 법명을 쓰겠느냐. 문수보살을 욕보이는 일이거늘.”

“분명히 스스로 문수라고 했는데···.”

“너는 문수보살이 누군지 모르느냐?”

“그걸  어찌 모르겠어요. 대웅전의 부처님 좌측에 봉안한 불상이잖아요. 우수에 칼을 들고 좌수에는 연꽃을 든 보살님을 왜 모르겠어요.”

“그런데 문수보살을 만났다고? 문수보살은 옛적에 성불하여 열반했거늘 네 앞에 현신했다는 게 말이 되느냐. 이놈아.”

“어! 그렇기는 하네요. 그런데 노스님이 분명히 자신을 문수라고 말했는데···.”

조금 전까지 문수라는 말에 어떤 의문도 품지 않았었다.

노스님이 스스로 문수라고 칭하기에 잘난체한다고만 생각했을 뿐.

“혹시 문수보살께서 현신하신 게 아닐까요?”

“경전 공부는 뒷전이고 오로지 칼만 휘두르는 네가 뭘 그리 예쁘다고 문수보살께서 현신하셨겠냐.”

“무예를 익힌다고 했더니 별말씀 없으셨는데···.”

“건봉사의 노화상 중 한 분께서 네게 장난을 쳤던 게로구나. 그런데 나를 알고 있다고 했더냐?”

“네. 스님과는 잘 아는 사이처럼 말씀하시던데요? 스님께서 저를 부를 때처럼 법명만 말하더라고요.”

“큰스님과 주지 스님은 조금 전까지 나하고 있었으니까 다른 노화상이로구나. 흠! 그런데 노스님의 모습은 어떻더냐?”

건봉사에 머무는 중들만 해도 천여 명이 넘고 불목하니만 해도 일백여 명이나 된다.

동안거나 하안거 때는 이천여 명이 넘는 중들이 머물고, 평소에도 각지에서 순례를 오는 중들로 복닥거리는 곳이다.

그런 곳이니만치 법력이 높은 노화상들이 득시글거리는 건 당연지사다.

그런데 보현 스님은 자신을 알고 있는 스님이 있다니까 궁금증이 일어날 수밖에.

“체구가 무척 작았어요. 그런데 힘은 엄청나게 세던걸요?”

“너하고 힘겨루기라도 했다는 말이냐?”

“갑자기 제 손목의 맥을 잡기에 손을 빼려고 해도 옴짝달싹도 못 했어요.”

“그래서?”

“잠시 진맥을 하더니 벌써 단전에 정을 심었냐고 놀라시더라고요. 그리고 스님께서 저를 잘 가르쳤다는 말씀도 하셨고요.”

“단전에 모인 기운을 정이라고 하더냐?”

“네. 정이 곧 생명수라고 하면서 여벌의 목숨을 하나 더 갖고 있는 것이라고도 했어요.”

“어허! 이런 일이. 나무 관세음보살.”

“노스님의 말씀이 맞나 보군요.”

“이놈아. 앞서가지 마라. 단전에 쌓이는 기운이 정이라고 하니까 어렴풋이 생각나는 게 있기는 한데···.”

보현은 한참 동안 생각을 더듬더니 입을 열었다.

“단전에 모이는 힘을 정이라고 표현하는 건 아주 오래전 일이다. 요즘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없구나. 네가 조금 전에 만난 분은 필시 고인인가 보다.”

“아이고. 그럼 좀 더 있을 건데 저녁 공양에 늦는다고 빠져나왔지 뭐예요. 자꾸 붙잡는 게 귀찮기도 하고요.”

“이런 맹추 같은 놈이 있나. 그런 분의 말씀을 더 들었어야지.”

“아! 어쩌죠. 지금이라도 가 볼까요?”

“됐다. 이미 자리를 비웠을 게다.”

“신과 정에 대한 얘기를 한참 늘어놓더니 다른 중요한 말씀이 있다고 붙잡았거든요. 그런데 제가 그만 저녁 공양 때문에···.”

“예전 선현들께서는 신과 기와 정이 몸을 지탱하는 근본이라고 말을 했지. 내가 공부가 짧아서 심오한 뜻은 모르겠다만 네 몸속의 기운을 정이라고 말했다면 맞는 말일 것이다. 이럴 게 아니라 큰스님을 만나 보아야겠다. 도대체 누가 감히 문수보살을 사칭하는지 말이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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