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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선 제일 검이다-9화 (9/130)

문수보살과의 만남 (2)

009화 문수보살과의 만남 (2)

다음 날, 아침 공양이 끝나자마자 적멸보궁으로 갔으나 노스님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겨우 저녁 공양 때문에 노스님의 말씀을 마저 듣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다.

더 기다리고 싶었으나 보현 스님의 볼일도 끝났기에 어쩔 수 없이 건봉사를 떠나야만 했다.

일주문을 지나면서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는 해인에게 보현이 핀잔을 주었다.

“이놈아. 저녁 공양 안 먹는다고 죽기라도 하더냐? 이제 후회해 봐야 소용도 없다. 돌부리에 채여 넘어지지 말고 앞이나 똑바로 보아라.”

“다음 날 분명히 만나자고 했다니까요. 약속을 안 지킨 건 노스님이라고요.”

해인은 괜히 심사가 뒤틀려 불퉁하게 나왔다.

“이놈이 왜 내게 심통을 부려. 제 못난 탓인걸.”

“그러니까 스님께서 공부를 더 하셨으면 제가 이런 것으로 궁금해할 일도 없잖아요.”

“아이고. 이 녀석이 이젠 나까지 업신여기는구나.”

“노스님이 그랬단 말이에요. 스님의 공부가 깊었으면 신과 정이 무엇인지 알았을 거라고요.”

“정말 노스님이 그렇게 말씀했단 말이냐?”

“그럼 제가 없는 말을 지어냈겠어요?”

“어허!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노스님이 도대체 누군지 알 수가 있어야지. 건봉사 큰스님도 그렇게 생긴 노스님을 본 적이 없다던데.”

통상적으로 법랍이 많은 승려가 건봉사에 다니러 왔다면 절의 어른인 큰스님이나 주지에게 인사를 차린 후 머무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해인이 만난 노스님을 큰스님이나 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졌다는 말이 아닌가.

본인 입으로 문수라고 했으니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겠지만, 옛적에 성불한 문수보살이 무슨 수로 현실에 나타날 수 있겠는가 이다.

“어허 참. 묘한 일이로고.”

“스님. 정말 문수보살이 현신한 게 아닐까요?”

“예끼 이놈. 어딜 가서 그런 말 절대로 하지 말거라.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건봉사의 스님들 중 누구도 노스님을 모른다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냐고요.”

해인은 보현과 얘기를 나눌수록 노스님이 정말 문수보살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노스님에게 손목이 잡힌 이후, 해인의 몸이 예전과 사뭇 달라졌던 것이다.

단전의 기운이 전과는 달리 가득했기 때문이다.

태식호흡을 하고 나서야 한 식경 정도 머물던 기운이 이제는 종일토록 머물러 있는 게 그 증거였다.

분명히 노스님이 어떤 기운을 불어넣은 후부터였다.

그러니까 문수보살이 현신한 것으로 믿을 수밖에.

“네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철딱서니 없는 소리를 하느냐. 큰스님이나 주지 스님에게 인사를 올리지 않고 잠시 머물다 가는 화상도 있다니까 그중의 한 분일 게다.”

“어찌 되었든 저는 문수보살을 만났으니까 그리 아세요.”

실제로 문수보살은 종종 현신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는 얘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세조 임금이 등창으로 고생할 당시 오대산 상원사에 잠시 머물 때 문수보살이 동자승으로 현신해서 세조 임금의 등을 씻어 준 일화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으니까.

조카를 죽이고 임금이 된 세조도 문수보살이 찾아주었는데 해인이라고 못 만날 이유가 없는 거였다.

적멸보궁 사리탑을 지극 정성으로 돌고 있는 해인의 마음을 알았으니까 문수보살이 감복해서 현신하지 않았느냐는 게 해인의 생각이었다.

“노화상들 중에는 어린아이처럼 장난치기를 좋아하는 분들도 있다고 들었다. 어떤 노스님이 널 놀리려고 문수보살을 사칭한 게야. 이 녀석아.”

“하필이면 왜 문수보살이라고 했겠어요. 아무리 장난이라도 감히 문수보살을 자처할 만큼 배포 큰스님이 어디 있다고 그래요.”

반야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은 석가모니의 교화를 돕기 위해 몸을 바꾸어 보살의 지위에 있었다는 인물이다.

누가 있어 감히 그를 사칭하겠는가.

그랬다가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을 일이다.

“스님. 힘들면 지게에 올라타세요. 진부령까지 단숨에 달려갈 겁니다.”

“이 많은 짐을 지고도 나를 지게에 올리겠다고?”

“탑돌이를 했더니 힘이 막 넘쳐나네요.”

“그것도 참 별일이구나. 그러다가 금방 배고파질 건데도?”

“문수보살을 만나고 난 이후로는 배고픈 것도 없어졌어요.”

“걸신이 들린 네가 어쩐 일이냐?”

“아귀가 제 몸을 떠났나 보지요. 뭐.”

이번에도 심현사 중창불사에 소용될 재물을 얻지 못했다.

건봉사 주지는 빈손으로 보내기가 뭐했던지 지게 한가득 면포를 들려 주었다.

사형들이 따라왔다면 지게의 반도 못 채웠겠지만, 해인은 욕심껏 면포를 실었다.

가져갈 만큼 가져가라기에 잔뜩 실었는데, 건봉사의 살림을 책임지는 원주 스님이 그걸 어찌 지고 갈 거냐고 걱정을 할 정도였다.

그런 걱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해인이 거뜬히 지게를 지고 일어서자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었다.

* * *

“해인아. 힘들면 잠시 쉬어가자꾸나.”

“아직 거뜬합니다. 진부령 고갯마루에서 잠시 땀을 훔치면 돼요.”

“이놈이 도대체 뭘 먹었기에 이렇게 힘이 넘치는 게야?”

“문수보살님의 기운이 몸속을 훑고 간 덕이라니까요.”

“객쩍은 소리 그만하고 잠시 나를 내려놓아라.”

일주문을 지나 인적이 없는 곳부터 보현을 지게에 얹고 왔으니 거의 한 시진은 넘긴 셈이었다.

평지도 아니고 산길을 날듯이 걸었음에도 힘도 별로 들지 않았고 숨소리조차 거칠어지지 않았다.

해인 스스로도 이런 몸 상태가 놀라웠지만 보현은 더 놀라고 있었다.

자신을 지게에 얹고 얼마나 버티는지 두고 보자 하는 심정이었는데, 거의 괴물 같은 힘을 내고 있는 게 아닌가.

“조금만 더 가면 고갯마루예요.”

“이놈아. 그러다가 밤새 끙끙 앓지 말고 어서 내려놓으라니까 그러네.”

“스님, 저는 괜찮으니까 걱정 마세요.”

“내가 어지러워 그런다. 이놈아.”

두 노소가 옥신각신하는 소리에 주변의 산새들이 푸드득 날아올랐다.

어지러움을 호소하는 보현 스님을 어쩔 수 없이 내려놓았다.

“제가 스님 연세를 생각 못 하고 너무 빨리 걸었나 보네요.”

“이제는 내가 늙었다고 타박까지 하는 게냐?”

보현 스님의 발걸음으로 심현사로 가게 되면 엿새는 그냥 흘러가는 터라 빨리 도착할 욕심에 속도를 낸 거였다.

그렇게 발을 재게 놀렸으니 지게 위의 스님은 얼마나 시달렸겠는가.

한 시진 이상을 흔들리며 온 터라 머리가 어지러울 수밖에.

“어지럽다고 말씀하시지 그러셨어요.”

“너는 지치지도 않느냐. 도대체 네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제가 지극 정성으로 탑돌이를 하니까 부처님이 감복해서 영험한 기운을 줬나 보지요.”

“터무니없는 소리 작작 해라. 이놈아.”

노스님이 진맥을 하면서 기묘한 기운을 흘리고 난 후부터 단전에 기운이 가득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노스님은 문수보살이 현신한 것 같은데 그걸 얘기해 봐야 보현에게 실없는 놈이란 소리만 듣기에, 진신사리가 안치된 탑돌이의 영향인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런데 산적들이 어째 뵈질 않는데요?”

“그 작자들이 산채를 다른 곳으로 옮겼을 게다. 그렇게 혼났는데 이곳에서 판을 벌이겠느냐.”

“저나 스님이 어쩌다가 이곳을 오갈 건데 다른 곳으로 왜 가겠어요?”

“일이 년에 한 번 오간다는 걸 그 작자들이 어찌 알겠느냐. 아마 우리가 자주 진부령을 오갈 것으로 알고 지레 겁먹고 산채를 옮겼겠지.”

해인은 이번에도 산적들을 만나기를 은근히 기대했었다.

단전에 넘치는 기운을 풀어 볼 기회로 삼으려던 거였다.

그런데 진부령을 넘는 동안 산적들은 흔적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 * *

별일 없이 심현사로 돌아온 해인은 매일 보개산 중턱에 마련된 수련장에서 52식의 검법과 역근경을 수련하며 단전에 똬리를 틀고 있는 기운을 풀어내고 있었다.

그런지 얼마 후 단전에 깃든 기운으로 인해 태식호흡도 120까지 헤아리게 되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겨우 110을 헤아리던 것에 비하면 엄청난 발전인 셈이다.

노스님을 만나고부터 몸이 확연히 달라졌던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자신을 문수라고 말한 노스님이 기묘한 기운을 몸속에 흘려 넣어 준 게 아니라, 본래부터 해인이 갖고 있는 기운이 무념무상으로 탑돌이를 하면서 활성화된 게 아닐까 싶었다.

그렇게 추정하는 이유는 이미 열반에 든 문수보살이 현신했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혹시 무아지경인 상태에서 허상을 본 게 아닐지, 아니면 잠시 꿈을 꾸었던 걸거나.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노스님이 만약 문수보살이라면 기연을 얻은 건데 왜 굳이 부정을 하는 거야.’

너무 터무니없는 일이 자신에게 벌어졌기에 잠시 혼란스러운 거였다.

어찌 되었든 기연을 얻은 건데.

그러니까 단전에 힘이 가득한 게 아니겠는가.

그런데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가 궁금했다.

노스님이 심심해서 해인에게 기운을 불어넣지는 않았을 터.

‘지극 정성으로 탑돌이를 하는 모습이 예뻐 보였나?’

오늘따라 유난히 머릿속이 복잡해서 수련에 집중할 수 없었다.

해인은 일찌감치 산을 내려갈 생각에 지게를 지고 일어섰다.

산을 내려가는 도중 저녁 공양에 쓸 산나물을 뜯던 해인의 귀에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민가도 없는 산속에 사람이 나타나면 일단 경계부터 해야한다.

사냥꾼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심현사에 온 신자라면 불공을 드리느라 산에 오를 틈이 없음이다.

혹시나 짐승으로 오인받아 화살을 맞을 수도 있어서 일부러 인기척을 내었다.

오월로 접어든 때여서 녹음이 짙어진 터라 풀과 나뭇잎들이 시야를 가리고 있었던 것이다.

해인이 인기척을 내자 발걸음 소리가 뚝 멎었다.

사냥꾼이 사람 소리에 발걸음을 멈춘다?

그것도 세 명씩이나 몰려다니면서.

오히려 ‘거기 누구냐’고 묻는 게 정상인데 말이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에 지게를 내린 해인은 땔감 더미에 꽂아 둔 목검을 슬며시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상대방이 확실히 들으라고 헛기침을 하고는 정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냥꾼들이시오?”

수풀 저쪽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그래서 재차 물었다.

“거기 뉘시오? 나는 심현사에 살고 있는 사미승이오만.”

해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상대방들은 대꾸도 없이 방향을 바꿔 반대쪽으로 돌아가는 게 아닌가.

방향을 바꾼 발걸음 소리는 거의 뛰다시피 했다.

보개산 일대를 돌아다니는 사냥꾼이라면 심현사에 있는 중들과 대부분 안면이 있어서 반가워해야 정상이다.

해인이 심현사를 거론한 것도 그런 연유였다.

보개산에서 종종 마주치면 인사를 나누는 사이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사냥꾼은 아니라는 건데, 설사 사냥꾼들이 아니라고 해도 심현사의 중을 만나면 반가울 건데 왜 도망가느냐다.

수상하기 이를 데 없는 행동이었다.

마침 지게도 벗어 둔 터라 해인은 빠르게 따라붙었다.

무슨 일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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