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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선 제일 검이다-12화 (12/130)

낯선 자들 (3)

012화 낯선 자들 (3)

“뭐라고? 왜구를 만났다고? 그리고 놈들은 도검까지 꺼내 들었고?”

“도검이 아니라 그냥 단도였어요. 작신 두들겨 줬으니까 다시는 얼씬거리지 않을 거예요.”

“왜구인 건 어찌 알았느냐.”

이 대목에서 잘못 말하면 해인이 챙긴 물건을 보자고 할 것 같아서 적당히 둘러대었다.

“조선말을 하기는 했지만 무척 어설펐어요. 그리고 드잡이를 할 때 얼떨결에 이상한 말도 튀어나왔고요. 체구가 무척 왜소한 것으로 봐서 왜구가 아닐까 생각한 거예요. 결정적인 건 그놈들이 펼치는 검술이 기묘했어요.”

“다친 곳 없이 물리쳤다니까 그만하기 다행이다. 앞으로 산에 나무하러 갈 때 각별히 조심해야겠구나.”

“꽁지가 빠져라 도망갔는데 설마 다시 돌아오겠어요? 중이라고 우습게 보다가 된통 당한 거지요.”

이 정도 얘기해 두었으니 낯선 사람들이 절에 나타나면 긴장을 할 것이니까.

어제 만난 놈들은 사형들의 수준으로는 조금 버거운 상대이기에 얘기를 해준 거였다.

다만 놈들이 절에 들어왔을 때인데, 벌건 대낮에 올 리는 없으니까 밤을 택할 터.

밤에는 해인이 어김없이 요사채에 머물고 있기에 절간으로 스며드는 기척은 충분히 잡아낼 수 있음이다.

단전에 기운이 가득한 이후로는 오감이 전과는 확연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잠을 자다가도 산짐승이 절간으로 소리 없이 다가오는 것도 알아낼 정도였으니까.

* * *

첫째 사형이 왜구가 나타난 사실을 보현 스님에게 말했는지 다음 날 스님에게 한참이나 시달려야 했다.

다행인 것은 늘씬하게 두들겨서 쫓았다는 해인의 말을 믿는 것 같았다.

진부령에서 산적들을 상대로 펼친 활약을 봤으니 말이다.

보현 스님은 시절이 어수선하니 왜구가 내륙까지 나타났다며 탄식을 늘어놓았다.

탄식 끝에 조정에서 당파 싸움에 양민들만 죽어난다고 열을 올렸다.

해인은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이따금 듣는 터라 귀를 쫑긋 세웠다.

양반들이 서로 작당을 해서 싸우느라 왜구들을 방치하고 있다는 말로 들렸던 것이다.

“스님. 왜구가 조선 군사들보다 강해요?”

“왜구들의 무술을 직접 겪어 보지 않아 잘 모르겠다만. 오랜 내전으로 싸움질을 했으니 조선 군사들보다는 훨씬 낫겠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각도의 관찰사나 목사 도호부사들이 가렴주구만 일삼고 파당에 들어 당파싸움에만 열을 올리니 왜구가 나타나도 손을 쓰지 못하고···.”

보현 스님이 뭔가 더 얘기하려다가 말을 흐렸다.

현감과 관찰사는 아는데 목사나 도호부사는 생소한 말이어서 해인은 눈만 멀뚱거렸다.

그러자 보현은 해인에게 조선의 지방관의 품계에 대해 자세히 알려 주었다.

언젠가는 속세에 나갈 일이 있을 것이니 기본을 알고 있어야 한다며.

외관직인 목민관들의 가렴주구에 민초들의 삶이 피폐해졌다는 얘기를 듣자, 왜구들이 조선 산천을 그려 놓은 두루마리 얘기를 꺼내려던 생각이 쑥 들어갔다.

관아에 두루마리를 갖다줘 봐야 일이 더 복잡해질 것이므로.

칡넝쿨을 끊고 도망친 왜구를 쫓기보다는 바로 관아에 알리지 않았던 해인만 들볶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섯 개의 두루마리를 자세히 살펴본 결과 말로만 듣던 한성 일대의 산천을 표시한 그림도 있었다.

보현 스님의 성격상 그런 걸 입수했다고 하면 분명히 관아에 갖다주자고 할 것이므로.

한때는 종사관까지 지냈던 만큼 보현 스님이 절대로 그냥 넘어갈 리가 없음이다.

해인은 왜구가 조선의 산천을 왜 자세히 그리고 있는지는 안중에도 없었고 오로지 지도 자체만 욕심났다.

이 정도의 범위를 조사하려면 계절이 몇 번 바뀌도록 발품을 팔아야 한다는 부분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고성의 건봉사 가는 길 외엔 몰랐으니 조선 산천을 그린 지도에 욕심이 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스님도 당파 싸움이 보기 싫어서 속세를 등진 거군요.”

“비슷한 이유였다. 네게 차마 말할 수 없이 부끄러운 일도 많았단다. 속세가 그렇게 혼탁한데 하산할 생각만 가득한 네가 걱정이다. 하산하지 말고 심현사에 계속 있었으면 좋겠구나.”

보현의 말에 해인은 펄쩍 뛰었다.

무예도 어느 정도 익혔고 거기다가 지도까지 입수한 마당에 그냥 죽은 듯이 살자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보현 스님이야 세상 구경을 실컷 했으니까 넌더리를 내고 산문에 들어왔겠지만, 해인은 아직 세상 구경을 못 해 봤기에 미치도록 궁금했던 것이다.

“스님. 저는 심현사와 아랫마을을 본 게 전부예요. 얼마 전에 건봉사를 다녀온 것 빼놓고는요. 세상을 경험해 보지도 못했는데 무엇으로 중생들을 계도할 수 있겠어요.”

“무슨 소리냐. 나와 네 사형들과 얘기를 나누는 것도 세상을 알아가는 것이거늘. 세상에 나가면 때만 묻어올 건데 내가 어찌 너를 바깥으로 내보내겠느냐.”

“그렇다면 아랫마을도 이미 아수라 세상이나 다름없는데 저를 왜 내보내셨어요.”

“이놈아 그건···.”

보현은 해인의 항변에 답변할 말을 못 찾고 있었다.

속세가 아수라이고 아귀지옥이라고 늘 강조했으면서도 아랫마을에 종종 심부름을 보냈기 때문이다.

“세상을 경험해 보지도 않고 어찌 중생을 계도할 수 있겠어요. 부처님도 세상 속에서 고행을 한 후에야 열반에 들었다면서요.”

“네 마음공부가 깊다면 무슨 걱정이겠느냐.”

“스님. 세속 나이로 약관이 되었을 때 잠시 세상 구경을 하게 해 주세요. 그때까지는 좀 더 불심을 쌓을게요.”

당장 절간을 나가겠다면 치도곤을 낼 것 같아서 두 해 정도 후를 겨냥했다.

“이놈아. 세상이 궁금하면 오늘처럼 내가 얘기해 주면 되잖느냐.”

“그럼 앞으로도 계속 불목하니 노릇을 하라고요?”

“누가 너더러 불목하니 노릇을 하라고 했느냐? 네가 먹을 것을 찾아 산으로 들로 쏘다니는 게 보기 싫어서 공양간에 앉힌 게지.”

거기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었다.

더 많이 먹을 욕심에, 좀 더 바깥으로 나다니고 싶었기에 불목하니 역할을 자처한 거였다.

그러나 불경 공부보다는 검술 수련이 훨씬 재미있는데 어쩌겠는가.

수련이 깊어질수록 절간에 붙어 있는 시간이 너무도 아까웠다.

한 호흡에 몇 장을 뛸 수 있고 두 호흡이면 이미 타인의 시야에서 사라질 정도로 변한 몸이 아닌가.

“하여튼 약관이 되면 절에서 나갈 거니까 그리 아세요.”

“언제는 내 곁에 붙어 있겠다던 놈이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을꼬.”

“심현사 중창불사를 제힘으로 해 보려고요.”

“뭐?”

“재물을 많이 벌어서 심현사를 건봉사만큼 크게 만들 거예요.”

“욕심을 버려야 할 중이 별소리를 다 하는구나.”

“불목하니가 무슨 중이라고 그러세요.”

* * *

불목하니가 무슨 중이냐고 말했다가 보현에게 꿀밤을 맞고 불퉁한 모습으로 요사채를 나오는데 큰 사형이 문 앞에서 빙그레 웃고 있었다.

아마 보현과 해인이 나누는 얘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스님께 많이 혼났느냐?”

“몰라요. 앞으로 큰 사형에게 아무 말도 안 해 줄 거예요.”

“어이구. 우리 해인이 단단히 화난 게로구나. 그런데 어쩌겠느냐. 왜구들이 해코지하러 올 수도 있는데 그냥 모른 척하고 넘어갈 일은 아니지.”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어린 중을 만나 뼈가 부러진 것도 억울하겠지만, 그동안 애써 조사한 두루마리까지 뺏겼는데 곱게 물러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세상 물정 모르는 해인도 요긴하게 써먹을 물건이라고 생각하는데, 하물며 놈들에게는 오죽 귀한 물건일까.

몸을 추스르고 나면 필시 찾을 올 것이다.

해인이 심현사의 중이라고 왜구 앞에서 나발을 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큰 사형에게 두루마리를 뺏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조금 두들겨 맞았다고 복수하기 위해 되돌아온다고요?”

“그거야 모를 일이지.”

“다시 온다고 해도 저나 사형들의 상대는 아니니까 걱정 마세요.”

“네게는 별것 아닌 상대지만 큰스님과 우리는 버거운 상대일 수도 있겠지.”

그 말을 들으니까 괜히 찜찜해졌다.

놈들이 찾아온다면 스님과 사형들이 감당할 수 있을지 염려되었다.

해인이 절간에 있을 때라면 모를까 절을 비웠을 때 찾아온다면 어쩌겠는가.

다시 찾아올 때는 필시 단단히 준비하고 올 것인데.

“아! 어쩌지. 놈들 때문에 내가 속세로 못 내려갈 수도 있겠네.”

“아랫마을에 자주 나다니면서 무슨 소리냐?”

“아랫마을이 무슨 속세예요. 그냥 심현사 안마당인걸요. 적어도 양구나 인제 정도는 되어야지요.”

해인이 구경한 큰 마을은 건봉사 가는 길에 봤던 양구나 인제가 전부였다.

그곳을 지나칠 때 놀란 걸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벌렁거렸다.

태어나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에게. 겨우 그런 곳에 가기 위해 절을 떠난다고?”

“그곳이 얼마나 큰 마을인데 그래요.”

“이 녀석아. 기왕 속세로 나갈 거면 금상이 있는 한성 정도는 되어야지.”

왜구로부터 뺏은 두루마리 중 한성 일대의 산천이 자세히 그려져 있는 게 있었다.

두루마리만 있으면 혼자 한성을 찾아가는 것도 별것 아니기에 호기심이 더 동할 수밖에 없었다.

또 놈들의 봇짐 속에 쪄서 말린 쌀이 있었는데, 찐쌀을 가지고 다니면 짐도 단출해서 조선 천지 어디든 편하게 다닐 수 있을 것 같았고.

“한성을요?”

“그래.”

“큰 사형은 한성에 가 보셨어요?”

“내가 무슨 수로 한성을 가 보았겠냐. 그냥 말만 들었을 뿐이다.”

한성이 엄청나게 크다는 얘기는 들었다.

그리고 눈만 살짝 감아도 코를 베인다는 곳일 만큼 각박한 곳이라는 말도 들었고.

그런 곳에 산중에서 살던 중이 가서 탁발이나 할 수 있을까 싶다.

보현 스님의 말마따나 양반들의 주구 노릇을 하든가,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해야 입에 풀칠을 할 수 있을 건데.

그렇게 한 곳에 얽매여 살 생각은 없었다.

세상 구경을 하고 다시 심현사로 돌아올 생각이었다.

“한성을 구경해 보긴 하겠지만 그곳에서 살 생각은 없어요.”

“세상을 알기 위해 속세로 내려간다며? 대처에서 부대끼며 살아야 세상을 빨리 알 수 있지. 이 녀석아.”

“한성이 조선의 전부는 아니잖아요. 평양이나 저 북쪽의 오랑캐가 사는 곳도 돌아볼 생각이에요.”

“그동안 먹고 자는 건 어찌 해결할 참이냐?”

“탁발을 해서 끼니를 때우고 남의 집 헛간이나 한데 잠을 자면 되지요.”

“이렇게 순진해서야 며칠이나 버틸까. 건봉사 가는 길에 탁발을 몇 번 해 봤느냐? 여염의 사람들도 먹을 게 없어 굶주리기 일쑤인데 중에게 먹을 걸 선뜻 내준다고?”

첫째 사형인 일심이 계속 부정적인 말만 늘어놓자 해인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졌다.

그저 절을 떠날 생각만 했지, 당장 먹고 자는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산 입에 거미줄을 칠까 싶어 짐짓 큰소리를 쳤다.

“힘 뒀다 어디에 쓰겠어요. 허드렛일이라도 해 주면 얼마든지 먹고 자고 할 수 있어요.”

“겨우 그러려고 속세로 나가는 거라면 만류하고 싶구나.”

“힘들더라도 조선 팔도를 구경하고 싶어요.”

“그냥 심현사에 있어라. 바깥세상에 나가 고생하지 말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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