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산(下山) (1)
013화 하산(下山) (1)
약관이 되기까지 2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그동안 태식호흡도 130을 조금 넘게 헤아리게 되었고 검술은 더 완숙해졌다.
배꼽 아래의 하단전에 똬리를 틀고 있던 기운은 이제 명치 어름인 중단전으로까지 뻗쳤다.
자신을 문수라던 노스님의 말에 따르면 중단전이 열리면 환희지심이 일어나고 오욕칠정에 초연해진다고 했었다.
이 말은 곧 깨달음과 관련이 있다는 말인데, 중단전이 열려도 이내 닫히기를 반복해서인지 아직은 깨달음과는 거리가 멀었다.
경전 공부를 게을리하는 해인이 뭘 깨닫는다는 것도 웃기는 일이었지만.
무예의 경지가 한층 더 깊어지길 기대했는데 중단전은 무예와는 무관한 것 같았다.
중단전을 열어 두려면 끊임없이 기운을 돌려야 하는데, 왠지 의식적으로 기운을 돌리는 건 자연의 섭리에 역행하는 것 같아서 그냥 자연스럽게 놔두었다.
알고 보면 중단전이야말로 진정한 마음공부인데 말이다.
한차례 몸을 풀고 난 혜인은 태식호흡으로 지친 몸을 달래었다.
최근에 안 사실이지만 태식호흡이 130을 헤아리게 되자 10여 번의 호흡만으로도 몸의 피로가 풀렸던 것이다.
만약 150을 헤아리는 수준에 도달하면 오장과 삼초를 보할 수 있는 건 물론이고, 겉으로 드러난 상처도 빨리 아물게 할 수 있다고 했기에 기를 쓰고 태식호흡법에 매달렸지만 그런 경지는 아마 기연이나 만나야 가능할 것 같았다.
그런데 130 넘게 헤아리게 되자 자잘한 상처가 전보다 쉬이 아무는 것으로 봐서는 130이 어떤 경계점이 아닐까 싶었다.
우선은 130을 넘긴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그동안 얼마나 수련했는지 보개산 중턱의 수련장은 풀 한 포기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반들거렸다.
해인에게 늘씬하게 두들겨 맞고 조선 산천을 그려 넣은 두루마리까지 빼앗긴 왜구들이 다시 찾아올까 싶어 늘 긴장하며 지냈지만 이태가 지나도록 찾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찾기를 포기했든지, 해인에게 빼앗긴 두루마리 외에 별도로 그려 놓은 게 있든지 둘 중의 하나일 터다.
아마 훼손될 경우를 대비해서 별도로 그림을 옮겨 놓았을 수도 있을 거였다.
그랬으니까 두루마리를 찾으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겠지.
만약 그렇지 않다면 무슨 수를 쓰든 찾으려고 했을 텐데 말이다.
그렇게 결론을 내고 나니까 이제는 마음 편히 절을 떠나도 될 것 같았다.
대웅전 마당을 서성이며 한참을 골똘하던 해인은 단호한 얼굴로 보현의 방 앞에 섰다.
“스님. 해인입니다.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들어오너라.”
약관에 들어선 이후로는 해인의 말투도 많이 변했다.
예전처럼 응석 어린 말투가 아니었다.
방안으로 선뜻 들어서자 고개를 들어 해인을 올려보던 보현 스님이 얼굴을 찌푸렸다.
“고개 아프다. 얼른 자리에 앉아라. 뭘 먹었기에 갈수록 몸이 자라는지 모르겠구나. 필시 산짐승들이 네 제물이 되었을 터.”
“절간 공양만 먹고 열심히 수련한 게 전부입니다.”
산에 올라가면 도라지며 칡, 더덕, 잔데 등과 각종 버섯, 밤, 머루, 다래가 지천이었다.
뿐만 아니라 운이 좋으면 삼도 얻어걸렸다.
그리고 올무에 걸린 꿩이나 토끼 등도 있었고 이따금 멧돼지도 제물이 되었다.
살생을 금하는 계율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해인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강도 높은 수련을 하다 보니 고기를 먹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놈이 이젠 얼굴색도 변하지 않고 뻔뻔하게 나오는구나?”
“사실대로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됐고. 무슨 일인데 내내 마당을 서성거렸더냐?”
해인은 하산하겠다는 결심을 고할 궁리를 하느라 발소리도 감추지 않고 대웅전 마당을 서성였던 것이다.
태식호흡이 130을 헤아리자 발소리마저도 감출 수 있게 되었다.
“스님. 조만간 속세로 내려갈까 합니다.”
온갖 그럴듯한 궁리를 했지만 에둘러 표현하지 않고 바로 하산하겠다는 말이 나왔다.
그런데 보현은 놀라기는커녕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무심하게 받아들였다.
“네 몸과 마음을 잘 다스릴 수 있겠느냐?”
“예···예?”
“속세에 나가서 험한 일을 당하더라도 잘 견딜 수 있겠냐는 말이다.”
“그동안 마음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목검만 휘두른 놈이 무슨. 두 해만 머물다가 돌아오너라. 나도 이제 늙어서 언제 무간지옥에 떨어질지 모르겠구나.”
중들은 스스로 겸양한답시고 극락왕생한다는 말은 않고 무간지옥에 떨어진다고들 한다.
“스님. 무슨 말씀이세요. 이렇게 정정하신데요.”
“겉만 멀쩡하지 뼈마디가 쑤신 지가 오래되었다. 그러니 속세에 너무 오래 있지 말거라.”
해인이 떠나고 나면 많이 보고 싶을 거라는 말이었고 빈자리가 그만큼 크다는 뜻이리라.
자식 같은 해인이 품을 떠난다는데 어찌 무덤덤할 수 있겠는가.
아마 해인이 절을 떠나고 나면 이제나저제나 하고 기다릴 것이다.
때가 되면 매일같이 일주문에 나와 보개마을 쪽을 굽어볼 보현 스님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려왔다.
“되도록 빨리 돌아오겠습니다.”
“도저히 견디기 힘들면 지체 없이 돌아오너라.”
“예. 스님. 그럴 일은 없을 거니까 염려 마십시오.”
하산하기 위한 준비는 진즉에 끝냈다.
왜구들이 그린 두루마리의 내용을 머리에 각인시켜 두었고 틈틈이 쌀을 쪄서 말려 두었다.
다치거나 아플 때를 대비해서 보현 스님이 만들어 둔 환약도 많이 챙겼다.
그리고 이슬과 서리를 피할 노숙 준비도 했다.
만약 먹을 게 소진되면 탁발을 하고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농가의 허드렛일이라도 도우면서 끼니를 때우면 된다.
아니면 장작을 해다 팔아도 되고.
그래서 평소에 애용하는 지게와 도끼도 챙겨간다.
이것저것 챙기다 보니 바랑으로는 감당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 * *
사형들은 아랫마을 초입까지 따라와서 해인의 장도를 빌어 주었다.
그들 또한 보현과 마찬가지로 걱정 가득한 표정이었다.
무예를 익혔으니 다칠 염려는 없겠으나 산천을 떠돌다 보면 온갖 고생을 하게 될 것이니 걱정하는 건 당연지사다.
사형들과 헤어진 해인은 기운차게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부터는 누구의 간섭도 없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기에 발걸음이 가벼울 수밖에 없었다.
머리도 기르고 납의도 얼른 벗고 싶었다.
탁발은 물 건너가겠지만 허드렛일을 할망정 중이라는 시선은 받고 싶지 않았다.
해인이 방향을 잡은 곳은 한성이었다.
일단 한성을 둘러본 후 평양으로 갈 계획이었다.
딱히 목적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산천을 두루 섭렵하려는 게 목적이니까.
이태 후에는 심현사에 돌아온다고 보현 스님과 약속했기에 부지런히 돌아다녀야 한다.
먼저 보개마을에 들어선 해인은 김 진사 댁부터 들렀다.
장기 출타를 하는데 인사도 없이 간다는 것도 그랬고, 금동 아씨의 얼굴도 볼 요량이었다.
사월초파일에 심현사를 찾은 금동과 말을 섞어 본 이후로는 그녀의 얼굴이 계속 생각났었다.
보현 스님이 조제한 환약을 먹고 김 진사가 병석을 털고 일어나자 매번 환약을 보개마을까지 가져다준 해인에게 감사 인사를 해 왔던 거였다.
안면이야 진즉에 있었지만 말을 섞어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쟁반에 옥구슬이 굴러가는 것 같았다.
그날 이후로 해인의 마음에는 금동이 시나브로 들어앉기 시작했다.
김 진사 댁에서 한참을 머물렀지만 끝내 금동을 만나지 못하자 춘심에게만 이태 동안 심현사를 떠나 있을 것이라고 말해 두었다.
포천으로 향하면서 계속 보개마을을 돌아보는 해인의 발걸음은 처음 산문을 나설 때보다는 무거웠다.
금동을 만나지 못하자 꽤나 맥이 빠졌던 것이다.
장도에 조심하라는 말이라도 들었으면 힘이 날 텐데.
중이 이런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되겠지만 이성에 눈을 뜬 해인으로서는 금동을 향하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잡생각을 떨쳐 버리려고 왜구에게서 뺏은 표창을 가상의 목표를 향해 던지며 길을 재촉했다.
이태 동안 표창 던지기 연습을 부지런히 한 결과 이제는 마음먹은 대로 던질 수 있게 되었다.
날아가는 거리도 10장은 가뿐했고 정확도는 말할 것도 없었다.
회전력으로 인해 어지간한 손목 굵기의 나무 정도는 쉽게 관통했다.
아무리 고강한 무예를 익혔어도 소리도 없이 날아오는 표창에는 당할 재간이 없을 것 같았다.
암습에 성공한다면 치명상을 입혀 항거불능으로 만들 수 있는 게 표창이었다.
목이나 심장 쪽에 직격당하면 저승 문턱을 넘나들 만큼 위력적인 무기였다.
표창 던지기를 해도 잡생각을 떨치지 못하자 이번에는 단검을 꺼내 들고 휘둘렀다.
조선 환도보다 짧아서 단검이라고 표현했지만, 실제로는 1척 남짓한 길이의 단검은 환도와 비교해도 크게 손색이 없었다.
길이만 조금 짧을 뿐 강도 면에서는 훨씬 앞섰던 것이다.
* * *
드디어 한성의 성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심현사를 떠난 지 20여 일 만이었다.
철원도호부에서 한성까지 해인의 걸음으로는 금방이었지만, 20일이나 걸린 이유는 세상 돌아가는 걸 조금이라도 알아보고 한성에 입성하려고 지체한 것이다.
눈 뜨고도 코가 베인다는 곳이 한성인데 절간에서만 살던 해인에게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주 목에서 뭉그적거리면서, 천 석지기인 박 초시 댁의 대문을 두드렸었다.
박 초시의 막내아들이 등창으로 몇 개월째 자리보전을 하고 있던 터라 내로라하는 의원들을 초빙하고 있다는 소문을 접한 것이다.
보현 스님이 지어 준 환약으로 사용하고 쑥뜸을 뜨는 등 어설픈 의원 흉내를 내며 십여 일 동안 편히 지낼 수 있었다.
환약이 주효했는지 박 초시의 막내아들 등창이 차츰 나아지자 박 초시는 해인을 수시로 불러 대접했는데, 그와 함께 식사하면서 최근의 한성의 분위기 등을 소상히 들을 수 있었다.
해인은 흥인지문이 멀리 보이는 냇가에 앉아 더위를 식히며 오늘 성내로 들어갈지 내일 들어갈지를 저울질하고 있었다.
한성은 백악산, 인왕산, 목면산, 낙산을 연결하여 약 3장 높이의 성곽을 쌓았고, 둘레가 약 6만 척에 달할 만큼 넓어서 10만이 넘는 백성이 그 안에 거주하고 있다고 했다.
그 크기에 걸맞게 동서남북으로 흥인지문과 돈의문, 숭례문, 숙청문 등 사대문을 두고, 그리고 혜화문과 소의문, 동소문, 창의문 등 사소문이 있다고 들었다.
인시에 파루를 쳐 사대문과 사소문을 열고 해시에 인정을 쳐 문을 닫는다는 것이다.
해거름인 지금 한성에 들어가 봐야 잘 곳도 마땅찮아서 내일 파루를 치면 그때나 들어갈 생각으로 지게를 벗고 개울에 발을 담그고 있는데, 개울 건너편에 말을 탄 사람들이 나타났다.
다들 말을 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지체 높은 양반의 행차인 것 같았기에 자리를 피하려고 서둘러 짚신을 꿰차고 지게를 졌다.
양반들과 마주쳐 봐야 귀찮기만 하다는 걸 짧은 여행에서 이미 파악한 터였다.
훤칠한 키에 헌앙한 용모인지라 길을 가다 보면 자연스레 눈에 띄었고, 호기심 많은 양반들은 종종 해인을 불러 세워 이것저것 물어 왔던 것이다.
그런 귀찮음을 피하기 위해 얼른 자리를 뜨려는 거였다.
그런데 그 중 중년의 양반이 해인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아무 곳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스님인데 뭘 그리 궁금하다고 뚫어지게 보나 싶어 잠시 주춤거렸다.
그냥 무시하고 돌아섰다가는 경을 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잠시 주춤거리고 있는데, 중년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해인을 자세히 살피던 양반은 무척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살짝 경직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어디에 사는 누구인가?”
“연천현 심현사에 적을 두고 있는 사미승입니다. 나리.”
해인이 나리라고 말하자 일행 중 양태가 넓은 갓을 쓴 이가 호통을 쳤다.
“이놈. 나리라니. 대감마님이시다.”
“예?”
생면부지의 양반에게 나리라고 하는 게 무슨 잘못이라고 이놈 저놈인지 모르겠다.
벼슬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도 모르기에 나리라고 부른 것뿐인데 말이다.
“어허! 이 사람아. 그만두게. 내가 벼슬을 밝히지 않았는데 어찌 알겠나. 그런데 자네가 승려라고?”
납의를 입은 것만으로 중이라는 걸 알 수 있겠지만, 해인의 머리털이 밤송이처럼 자랐기에 중이라고 보기도 애매했다.
파계한 중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래서 재차 확인하는 것일 게다.
해인이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자 대감이라는 사람이 가까이 다가오라고 손짓을 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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