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산(下山) (3)
015화 하산(下山) (3)
김 대감이 해인에게 이것저것 캐물으며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않자 일행들이 길을 재촉했다.
“대감마님. 조금 있으면 어두워집니다. 석반을 드시려면 지금 움직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어!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느냐?”
자리에서 일어난 김 대감은 해인에게 불쑥 물었다.
“자네도 성안으로 들어갈 참이 아니었던가?”
“마땅한 거처가 없어서 내일 들어갈 생각이었습니다.”
“그럼. 나를 따라오게. 집에 가서 못다한 얘기를 나눠 보세.”
따라가고는 싶으나 일행들의 눈초리 때문에 조금은 망설여졌다.
특히 해인에게 덤볐던 30대 장한은 먹이를 보는 늑대 같은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아직도 본인의 실력이 부족하다는 걸 느끼지 못하는 눈치였다.
“말씀은 감사하나 소승은 한뎃잠이 더 익숙합니다.”
그러자 30대 장한이 끼어들었다.
“이런 방자한 중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대감마님께서 권하면 군소리 없이 따라올 것이지 무슨 잔말이 그리 많으냐.”
“제 갈 길을 가는 것도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게요?”
“이놈. 중이라고 봐줬더니 얻다 대고 말대꾸냐?”
대감은 가만히 있는데 밑의 것인 주제에 더 설쳤다.
중이란 걸 알았으면서도 이놈 저놈 하는 말본새가 괘씸하기 그지없었다.
참다못해 같이 목청을 높였다.
“도가 지나치시오. 법력이 보잘것없다고는 하나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는 승려에게 어찌 그리 험한 말을 하시오.”
“이놈이 스스로 매를 버는구나.”
여차하면 칼을 뽑을 기세였다.
그러자 대감이 나서서 얼른 자리를 수습했다.
“어허! 중겸. 어찌 그런 망발을 하느냐? 스님을 청한 이유는 내 친우와 관련되어 있어 권하는 것인데.”
“송구하옵니다. 대감마님.”
“자네는 제발 그 불같은 성정을 좀 버리게. 그러다가 언젠가는 큰코다칠 것이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한성에서 저를 상대할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쯧쯧쯧···. 조금 전에 펼친 자네의 한 수가 헛 손질이라는 걸 잊었는가?”
대감의 말에 장한은 얼굴이 붉어진 채 먼 산만 쳐다봤다.
해인은 중겸이란 자가 한성에서 제법 이름 있는 검사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살펴봐도 그저 그런 실력이었기 때문이다.
잘 봐줘도 두 수 정도면 능히 제압할 수준이었던 것이다.
겨우 그런 실력인데 대단하다고?
아직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가늠해 볼 기회가 없었던 해인은 자신이 어떤 경지에 도달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한성에 상대가 별로 없다는 말에도 해인의 표정에 변함이 없자 30대 장한은 아주 잡아먹을 듯 눈을 부라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해인은 대감을 향해 한 번 더 고사했다.
“대감마님. 소승은 그만 물러나겠습니다.”
“아닐세. 이것도 인연인데 우리 집에서 하루 유하고 가게나. 석반을 들면서 얘기를 더 나눴으면 싶네. 그냥 보냈다간 내가 후회할 것 같아서 그러네.”
이렇게까지 청하는데 더 이상 엉덩이를 빼는 것도 결례다.
대답을 않고 가만히 있자 승낙으로 받아들였는지 말에 올라타더니 해인을 바라봤다.
따라오라는 뜻이었다.
* * *
늦은 오후 때라 들어가는 사람보다는 밖으로 나오는 사람이 더 많은 흥인지문은 철릭에 벙거지 차림의 군관과 창을 든 병졸들이 지키고 있었다.
대감 일행이 통과할 때 눈도 맞추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며 예를 다했다.
뒤이어 ‘판윤 대감 행차시다. 길을 물러라’라는 외침에 성문을 통과하던 사람들은 물길이 갈라지듯 길을 틔우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땅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한성부 부윤이 얼마나 높은 자리인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성문 안쪽에는 허름한 초가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는데, 집의 크기는 성 밖보다 훨씬 작았다.
좁은 곳에 다닥다닥 붙어 지은 초가집들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초가집들이 끝나자 그곳부터는 작은 규모의 기와집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더 나아가자 솟을대문과 돌 담장이 길게 있는 큰 규모의 집들이 경쟁하듯 서 있었다.
잠시 후 도착한 대감의 집은 심현사 대웅전보다 컸다.
별도로 밥상을 받은 해인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는 아니지만 귀한 돼지고기가 상에 올라왔기 때문이다.
양주목 천 석지기 박 초시 댁에서도 이런 대접은 못 받았었다.
막내아들의 등창까지 치료해 줬지만 육식을 금하는 승려에게 고기를 내줄 수 없었던지 온통 나물만 가득했었다.
그런데 해인이 승려인 걸 알고 있는 대감 댁에서 고기를 내놓는다는 건 충격적인 일이었다.
대문을 들어설 때부터 엄청난 규모의 기와집에 이미 기가 죽었던 해인은 고기를 보자 수저를 들지 못하고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서 들게나. 스님들이 육식을 피한다는 건 알지만 탁발수행 중에는 여염에서 주는 걸 그냥 받아먹어야지 어쩌겠나. 스님을 위해 새로 찬을 만드는 것도 번거로운 일일세. 직접 살생을 하지 않는다면 계율에 어긋나지는 않겠지? 법력이 높은 스님들은 고기는 물론 곡주도 마다하지 않는다고 들었네.”
“대감마님. 저는 절간에 있으면서도 음식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눕고 싶은데 자리를 펴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잠시 망설였던 건 육식을 할 핑곗거리가 없어서였다.
“흐흠! 공부가 깊어 번뇌에서 벗어났다면 음식 따위가 무슨 상관이겠나.”
풀떼기만 먹고 극한까지 수련하다 보면 눈에 헛것이 보일 정도로 허기가 지는데 어쩌겠는가.
그래서 보개산에 돌아다니는 짐승을 눈에 띄는 대로 먹어 치웠었다.
살생을 금하라는 계율을 골백번도 더 어겼으니 필시 무간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그런 해인을 마치 득도한 스님으로 보고 있으니 속으로 뜨끔할 수밖에.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소승은 바깥으로 나도는 게 더 재미있어서 경전은 뒷전이었습니다.”
“하하하···. 중겸을 상대하는 걸 보니 무예를 익힌 것 같은데. 계속 불제자로 살아갈 건가? 보아하니 마음은 이미 절을 떠난 게 아닌가? 삭발하지 않고 기른 것도 그런 뜻이겠지?”
“이태 후에는 절에 돌아가야합니다 그때까지는 눈에 띄지 않으려고 머리를 기르고 있었습니다.”
보현 스님에게 단단히 약조하기는 했지만 바깥 생활을 경험한 지금으로서는 되돌아갈 마음은 거의 없었다.
속세가 이렇게 재미있을 줄 알았다면 진즉에 절을 박차고 나왔을 텐데 말이다.
“당장은 어디 갈 곳도 없는 것 같은데 내 집에 머물면서 거취를 생각해 보게.”
“아직 조선 팔도를 다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이제 절을 떠난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았는데 한성에 머무르다 보면···.”
“자네를 우리 집으로 데려온 이유를 아직 모르겠는가?”
“······?”
“죽은 내 친우와 관련이 있을지도 몰라서 확인해 보려고 그러하네.”
얼굴이 닮았다는 것과, 친우의 아들이 살아 있으면 해인과 비슷한 나이인 것 외엔 증명할 게 아무것도 없었다.
“소승이 대감마님의 친우와 조금 닮았다고는 하나 아무 증표도 없는데 어찌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시간을 두고 알아보면 뭔가 접점이 있겠지.”
“저는 한성을 구경하고 바로 평양으로 떠날 생각입니다만.”
“뭘 그리 서두르는 겐가. 한성만 제대로 구경해도 조선을 다 알 수 있음인데. 사실은 자네의 무예가 예사롭지 않아서 곁에 두고 싶어서 그러네.”
한성부 부윤이 무슨 그리 험한 일을 한다고 무예가 뛰어난 사람을 두려는지 궁금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아무리 무예가 출중해도 신분의 한계가 있어 겨우 양반들의 주구 노릇이나 해야하기 때문이다.
“어려서 늘 병을 달고 살았기에 주지 스님께 가르침을 받은 게 전부입니다. 대단한 무예를 익힌 건 아닙니다.”
“중겸이 작정하고 뻗은 손길을 아무나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해인에게는 별것 아닌 수준이었지만, 대감은 중겸을 무척 높이 쳐주는 것 같았다.
“무예를 익혔다면 그 정도의 출수는 충분히 피할 수 있습니다.”
말을 하고 나서도 아차 싶었다.
지인과 닮은 건 둘째 문제였고, 해인의 예사롭지 않은 몸놀림에 매료되어 붙잡아 앉히려 게 아닌가 싶어서다.
“어허! 중겸의 공격이 그렇게 가볍지 않다네.”
“그런 뜻이 아니라 대감마님의 무사가 소승을 너무 쉽게 보고 손을 쓴 게 아닌가 싶습니다.”
“범이 토끼를 잡을 때도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거늘 하물며 무예를 익힌 자가 상대방의 실력도 모르고 가볍게 공격한다고? 중겸은 그런 우를 범하지 않네. 자네의 무예가 그만큼 출중하다는 뜻이지.”
“······.”
“강요는 않겠네만. 당분간 내 집에 머물면서 한성 구경이나 하게. 한성을 돌아본 후 떠날 건지 머물 건지 결정해도 늦지 않아.”
“예. 대감마님.”
이렇게 권하는데 뿌리치고 나가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계속되는 질문에 밥과 찬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였다.
석반을 마치고 가장 억울했던 건 말로만 들은 한 번도 먹어 보지 못한 생선찜에 손도 대지 못했다.
삶은 돼지고기도 마찬가지였고.
음식을 가리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빤히 보고 있는데 어찌 고기에 손을 대겠는가.
아직 구족계를 받지 못했는데 득도한 고승처럼 뻔뻔히 행동할 수는 없었다.
식사가 끝나고도 한참을 묻고 대답하다가 그만 쉬라는 말에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쉬라고 마련해 준 방 앞에 섰을 때는 불쑥 화가 났다.
고기를 앞에 두고 소채에만 젓가락질했던 자신이 바보 같았기 때문이다.
그냥 눈 딱 감고 뻔뻔하게 먹을걸.
그런데 쉬라고 정해 준 정갈한 방 안을 훑어본 후에는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방 안에는 작은 상이 차려져 있었는데, 인절미와 수정과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인절미와 수정과는 양주목 박 초시 댁에서 먹어 봤기에 그 맛이 어떤 것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 세상의 음식이 아닌 것처럼 맛있었던 것이다.
앞으로 재물을 얻게 되면 다른 건 제쳐두고 인절미와 수정과만 먹겠노라고 맹세까지 했을 정도였으니까.
체면 차리느라 깨작거렸던 터라 단숨에 수북한 인절미와 수정과를 해치웠다.
배가 부르고 나니까 슬슬 걱정이 엄습했다.
당분간은 먹고 자는 문제가 해결되었지만, 김인수 대감의 반응으로 봐서는 분명히 자신을 주저앉힐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대감댁의 식솔로 눌러앉는 것도 그랬다.
조선 팔도를 돌아다니며 세상을 경험하려고 나왔지 남이 집 식솔로 있으려고 절을 떠난 건 아니잖은가.
해인의 고민은 깊어만 갔다.
그냥 떠날 건지 당분간 머물 건지.
‘에라 모르겠다. 일단 잠이나 자고 보자.’
일단 한성 구경이나 실컷 한 후에 고민하기로 했다.
한성에서 알아준다는 ‘중겸’의 무예도 해인에게는 하품 날 수준인 걸 감안하면 대감이 강제로 잡더라도 얼마든지 벗어날 수 있을 거니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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