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윤 김인수 (2)
017화 판윤 김인수 (2)
“무슨 일인지요?”
“발소리만으로도 상대가 누군지 알아채는 걸 보니 네 정체가 더욱 의심스럽구나.”
들어오라는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방문을 연 중겸은 눈을 부라리며 으르딱딱거렸다.
그러나 거친 말과는 달리 표정은 해인을 경계하는 게 역력해 보였다.
“시비를 걸려고 오신 게 아니라면 자리에 앉으시오. 쳐다보려니까 목이 아프오.”
“이만 서 말인 중에게 시비를 건들 뭐 나올 게 있다고. 고얀 중놈 같으니라고. 나이를 따져도 한참 위인데 어째 말투가 그따위냐.”
중을 낮잡아 보는 세상이 되었지만, 그래도 중겸처럼 막 대하지는 않는다.
어제부터 시종일관 놈이라고 하는 걸 보면 부처님을 싫어하거나 중에게 무슨 억하심정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중놈이라고 말하는데 어느 중이 좋게 받아들이겠소. 나중에 무간지옥에 떨어지지 않으려면 불제자를 함부로 대하지 마시오.”
“어이쿠. 그럼 성균관 유생들은 모두 무간지옥에 갈 팔자겠네.”
유학을 하는 선비들은 경우 불교를 기피하는 경향이 없잖아 있었다.
“유생이라고 전부 부처님을 멀리하지는 않소.”
“좋다. 나야 원래 무식한 놈이라서 그렇다고 하자. 너는 경전께나 읽었을 테니까 잘 알겠구나. 어린놈이 어른에게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는 건 잘하는 짓이고?”
“오는 말이 고왔다면 내가 이렇게 막 나갔겠소?”
“조선에서 중으로 살려면 이런 취급은 당연한 게다. 절간에서 떠받들리며 살았는지는 몰라도 저잣거리에 나오면 상것보다 못한 게 중이란 걸 아직 모르느냐?”
해인이 아는 한 유생이나 양반들도 승려를 그리 낮잡아보지는 않았다.
천여 년이 넘게 이 땅에 뿌리를 내린 신앙이 아무리 유교가 득세해도 하루아침에 없어지겠는가.
민초들은 물론 건봉사 가는 길에 만났던 산적들도 중이라면 한 수 접어 주지 않던가.
중겸만 유난스러울 뿐이었다.
“됐소. 댁에게 대우를 받을 생각은 없소이다. 예까지 찾아온 이유나 들읍시다.”
“참으로 건방진 놈이로다. 어째 한마디를 안 지려고 하느냐. 대감마님의 부탁만 아니었다면 벌써 대문 밖으로 내쫓아 버렸을 것을. 아직 대감마님의 얘기를 듣지 못한 모양인데 이곳에 있을 동안은 내 명을 따라야 한다는 것만 알아라.”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친우의 아들일지도 모르는 신분이거늘 호위무사에 불과한 자의 명을 받으라고 할 리가 있겠는가.
없는 말을 지어낸 것 같아 해인도 짐짓 어깃장을 놓았다.
“댁의 명을 받고 굽실거리고 지낼 거면 차라리 대감 댁을 나가고 말겠소.”
“뭐라고? 나가겠다고? 이곳이 들어오고 싶다고 들어오고 나가고 싶다고 나갈 수 있는 곳인 줄 아느냐?”
“이 댁과 어떤 얽매임도 없는데 내 발길 닿는 대로 움직인들 무슨 문제가 된다고 하시오.”
해인이 당차게 나가자 중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러다가 정말 나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놈이 정말 매운 맛을 봐야 하겠구나.”
“댁의 실력으로 내 옷깃이나 건들 수 있다고 생각하오?”
“오냐. 오늘 아주 끝장을 내자. 나와라 이놈.”
얼굴이 벌게진 중겸이 팔을 걷어붙였지만 가까이 다가오지는 못했다.
이미 실력이 판가름 났는데 또 덤벼 봐야 아침처럼 창피만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또 실력 행사를 하겠다면 이번에는 절대로 봐주지 않을 거니까 그리 아시오.”
절대로 봐주지 않겠다고 말하자 중겸의 두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어찌하랴.
아침에 본바탕이 이미 다 드러났거늘.
여기서 대거리해 봐야 창피당하는 건 자신이다.
씩씩거리고 나가면서 한마디 뱉었다.
“저잣거리를 구경하고 싶으면 하인을 앞세우고 나가라. 대감께서 퇴궐할 때까지만 돌아오면 된다.”
“이것도 댁의 명이오?”
“이런 건방진 놈. 누구의 명이 무어 그리 중하냐. 끝까지 내 자존심을 건드리는구나.”
아마 김 대감이 그리 전했을 터.
그 말을 전하려고 왔다가 아침에 창피당한 게 언짢아서 어깃장을 부리는 것일 게다.
어깨를 늘어뜨리며 나가는 걸 보니 자신의 실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한 것이다.
* * *
중겸이 방을 나간 후 해인은 나갈 채비를 했다.
오랜만에 태식호흡에 몰두하려 했는데 판이 깨져 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골방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것도 답답해서 일단 대문을 나섰다.
대감 댁을 못 찾을까 싶어 종에게 대감 댁의 지명까지 알아두었다.
막상 대문을 나섰으나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
생소한 곳으로 가려니 나중에 김 대감 댁을 찾아올 자신도 없었고, 그렇다고 하인을 앞세우고 구경 다니자니 그것도 못 할 짓이다.
홀로 구경을 나서는 게 여러 가지로 편하니까.
그래서 대감 댁을 중심으로 골목길을 오가며 주변 지형을 눈에 익혔다.
길도 없는 산에서도 목적한 곳을 찾아내던 실력이 어딜 가겠는가.
대감 댁과 주변의 몇몇 가옥을 눈으로 충분히 익힌 해인은 골목길을 나섰다.
골목길을 나서자 어제 지나쳤던 너른 길이 눈에 띄었다.
그곳에서 북쪽으로 바라보니 악산이 펼쳐져 있고 그 앞으로 웅장한 건물과 대문이 보였다.
금상이 산다는 궁궐일 것이다.
가까이 가서 궁궐을 구경하고 싶었으나 또 무슨 시비가 벌어질지 몰라 궁궐이 보이는 반대편으로 발길을 옮겼다.
중이 궁궐을 구경한다면 불경스러운 행동으로 볼 수도 있음이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종루까지 나왔다.
시전은 종루를 중심으로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사람들에 치여 길을 가는 것도 어려울 정도였고 미곡 등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호객꾼의 외침과 물건을 흥정하는 소리, 달구지에 짐을 부리는 사람들의 목청껏 떠드는 소리로 귀가 먹먹할 지경이었다.
거기에 더해 가마를 멘 가마꾼들이 길을 비키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온갖 소음과 혼잡함에 혼이 빠진 해인은 따가운 햇볕을 피해 건물 처마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렇게 한 식경가량 서 있으면서 거리의 소음에 익숙해질 무렵, 복잡한 거리 상황에도 아랑곳을 하지 않고 휘적휘적 걸어오는 자그마한 스님이 눈에 들어왔다.
* * *
“어! 건봉사의 문수 스님이 맞으시죠?”
해인은 귀신에 홀린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을까.
“흘흘···. 어린놈이 제법 기억력은 좋구나.”
문제는 문수라는 법명을 사용하는 약간은 요상한 스님이 또 눈앞에 나타났다는 점이다.
“안 그래도 스님을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건봉사의 스님들도 문수라는 법명을 사용하는 스님은 없다고 했거든요.”
“그 땡추들 눈에는 내가 안 보였겠지. 누가 뭐래도 내가 문수다. 이놈아.”
“노스님. 경을 칠 말씀을 하지 마십시오. 이미 오래전에 열반하신 문수보살께서 어찌 현신하실 수 있습니까? 건봉사에서는 제가 뭘 몰라서 넘어갔지만 이제는 속지 않을 겁니다.”
한 번 속지 두 번 속겠는가.
물론 문수보살을 자처하는 노스님을 만나고 난 이후로 신체에 굉장한 변화가 있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해인 스스로 노력한 결과물이라는 생각이었다.
“이놈이 좋은 기운을 얻어 놓고는 그냥 넘어가려고 하네.”
“제가 스님께 무슨 기운을 얻었다고 그러세요.”
속으로 뜨끔했다.
분명 그날 이후로 달라진 신체의 변화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다만, 상대가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과거의 사람이란 게 믿기지 않을 뿐.
그러나 문수보살이 이따금 현생해서 이적을 행하고 있었으니 마냥 전설로만 치부할 것도 아니었다.
이게 기연이라면 일종의 기연인데···.
왜 속세로 나온 자신에게 문수보살을 자처하는 스님이 또 나타났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이놈아. 네 놈이 약속을 어겨 중요한 얘기를 하지 못했지 않으냐.”
“무슨 말씀이세요. 노스님께서 먼저 약속을 어기셨잖아요.”
“네가 적멸보궁에 왔었다고?”
“저는 분명히 아침 공양을 마치고 적멸보궁에 나갔습니다. 노스님께서 안 나오셨잖습니까.”
“내일 보자는 말은 당연히 새벽 예불 때라고 생각해야지. 누가 아침 공양 끝난 때라고 하더냐. 중요한 얘기를 한다고 했으면 꼭두새벽부터 찾아왔어야지 이놈아. 흘흘흘··· 그런데 그때보다 기운이 더 좋아진 걸로 봐서는 기운을 제법 흡수한 것 같구나.”
환장할 일이다.
아무리 중들이 꼭두새벽에 일어난다지만 누가 새벽에 약속을 잡겠는가.
적어도 새벽 예불이 끝나고 아침 공양을 마쳐야만 자유시간이 주어지는 게 절간인데 말이다.
이제 와서 그걸 따져 봐야 입만 아프지만, 놀랄 일은 노스님이 해인의 몸을 슬쩍 살피고는 단박에 알아봤다는 거였다.
기운이 더 좋아졌다는 말이 바로 그 뜻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노스님께선 이곳 한성에는 어쩐 일이신지요?”
“얽매일 곳 없는 중이 어디를 가든. 삼각산 화계사에 있는 땡추들을 만나러 왔다가 저잣거리를 구경하러 오는 길이다만. 너야말로 한성에는 왜 왔느냐?”
삼각산이라면 흥인지문 밖, 북쪽에 우뚝 솟아 있는 산을 말함이다.
태조대왕이 한성을 도성으로 삼은 이유도 삼각산과 한수에 매료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화계사라면 꽤나 유명한 사찰이라 해인도 조만간 구경삼아 들러 볼 참이었다.
“어! 저도 곧 화계사에 둘러 보려고···.”
“어허! 이런 놈을 봤나. 네가 여긴 어인 일이냐고 묻잖느냐.”
“보현 스님의 허락을 받고 세상을 알고자 탁발수행 중입니다.”
“머리에 든 것도 없는 사미승이 탁발수행을 한다고?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구나. 그리고 아예 절을 떠난 놈이 여전히 납의를 고집하는 건 무엇이냐?”
지금 당장에는 절에 돌아갈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기는 했다.
세상 구경이 시들해질 때쯤에나 심현사로 돌아갈 것이므로.
“평양을 거쳐 압록을 보고 백산까지 둘러본 후 심현사로 돌아갈 생각이거든요.”
“백산이라니? 개마산을 말하는 것이냐?”
“여러 이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산만큼은 꼭 둘러보고 절로 돌아갈 겁니다.”
“이놈아. 행여나 그렇게 되겠다. 그러나저러나 이곳 한성은 네가 있을 곳이 못 되니 뭉그적거리지 말고 어서 떠나거라.”
아무리 건봉사에서 인연을 맺었다고는 하나 난데없이 나타나서 한성을 떠나라고 하니 어이가 없었다.
“당장은 곤란합니다. 어제 우연히 마주친 한성 부윤 대감이 죽은 친우와 제가 너무나 닮았다고 했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돌아가셨지만 지금은 그 누명이 풀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혹시 생부의 소식을 듣을까 싶어 그 대감 댁에서 신세를 지고 있거든요.”
“이제 와서 지난 일을 안들 무슨 소용이라고. 너는 이미 출가한 승려의 신분인 것을.”
“자의로 출가한 게 아닌 몸이니 부모가 누구인지는 확인해 봐야지요.”
무슨 일이 벌어졌든 이미 지난 일이긴 하다.
설사 억울한 누명으로 목숨을 잃었다고 한들 지금 와서 돌이킬 수도 없잖은가.
만약 김 대감이 알고 있는 친우가 해인의 생부라고 해도 출가한 중이 속세의 인연을 거론한다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생부라고 한들 지금은 아무런 감정도 없기 때문이다.
“궁금증을 풀고 나면 머리에서 깨끗이 잊어질 것 같으냐? 누군가의 모략으로 억울한 죽임을 당했다면 말이다. 비록 일면식이 없는 부모라고는 하나 네 혈육인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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