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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선 제일 검이다-20화 (20/130)

외조부와의 만남 (2)

020화 외조부와의 만남 (2)

김인수 대감으로부터 저간의 사정을 들은 노 대감의 아들은 해인을 상대로 이것저것 물어 왔다.

“아버님께서 쓰러지실 만하구나. 누이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셨는데 이제는 희망마저 사라졌으니 말이다. 그래. 너는 그동안 절에서 자랐다고?”

“예.”

“고생 많았겠구나.”

“아닙니다. 큰스님과 사형들이 잘 챙겨 주셔서 배를 곯을 일은 없었습니다.”

“사람 사는 일이 어찌 배만 부르다고 될 일이냐. 양친 없이 어린 시절을 보낸 것만으로도 참담한 처지거늘. 용케도 그 노리개를 간직하고 있었구나. 정심 누이가 늘 만지작거리던 그 노리개를 나도 기억하고 있단다.”

외삼촌은 외조부가 쓰러졌음에도 불고하고 해인을 따뜻이 맞이해 주었다.

외가에서 생모를 찾기 위해 그간 얼마나 노력했는지 대략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렇게 묻고 대답하는 동안 정신을 차린 외조부가 먼저 해인부터 찾았다.

외조부는 해인을 찬찬히 살피더니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 노리개는 조선에 두 개 있을 수 없는 물건이다.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온 이로부터 선물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다른 증거도 노리개에 남아 있단다. 정심이 어릴 때 떨어뜨려 끝부분이 살짝 깨진 것 하며··· 거기다가 너의 입매마저 정심을 닮았으니 내 외손자인 걸 어찌 의심하겠느냐.”

“······.”

“어허! 지금껏 사방에 사람을 보내어 행방을 수소문했건만 정심은 떠나고 일점혈육인 너만 돌아왔구나.”

그러더니 또 말을 잇지 못했다.

노 대감의, 아니 외조부의 눈은 눈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게 찾던 딸은 간데없고 노리개와 외손자만 돌아왔으니 그 심정인들 오죽할까.

생모를 기억하진 못하지만 입매가 닮았다는 말에 해인도 가슴이 뭉클해졌다.

심현사를 떠나올 때 보현 스님이 알려 준 생모의 무덤을 봤을 때만 해도 무덤덤했었는데.

생모의 죽음을 애달파 하며 눈물짓는 모습을 보자 가슴이 찡해졌다.

불제자로 살면서 생로병사에 무덤덤해져 눈물 흘릴 일이 없을 것 같았는데, 이렇게 가슴이 에이는 건 무엇인지.

이름 모를 골짜기에서 스러져간 생모의 죽음을 슬퍼하는 외조부의 애끊는 심정이 전염된 것이리라.

“얘야. 손이나 한번 잡아 보자꾸나. 너와 정심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걸 하늘도 알아보았나 보구나.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내게 와 주어서 고맙구나.”

해인이 조심스레 손을 내밀자 한참 동안 해인의 손을 어루만지던 외조부가 목멘 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라도 만나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구나.”

“······.”

“얘야. 왜 말이 없느냐?”

“대감마님.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아직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대감마님이라니 이제부터는 할아버지라고 불러라. 모든 정황으로 보아 너는 정심의 아들이 분명하다. 네가 송곡의 직계 혈손이 아니라면 그렇게 닮을 수도 없거니와 그게 아니라면 사위가 환생한 것일 게다. 그리고 네가 보관하고 있던 노리개가 정심의 아들이라고 증명하고 있잖느냐. 그러니 한 점 의혹도 가지지 말거라.”

아무나 가질 수 있는 흔하디흔한 노리개가 아닌 명나라에서 만든 노리개라는 희소성과, 실수로 떨어뜨려 귀퉁이가 살짝 깨진 것 하며.

거기에 더해 사위와 빼다 박은 것 같은 생김새며, 해인의 나이와 두 모자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먼 곳까지 움직인 정황 등.

하나에서 열까지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지자 해인도 자신이 정심이라는 여인의 소생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다만 너무 얼떨결인지라 실감이 나지 않았을 뿐.

그래서 억지로 목소리를 짜내어 대답했다.

“예. 할아버님.”

“그래. 이놈아. 내가 네 할애비다.”

할아버지란 말에 감격했는지 또 눈물을 흘렸다.

잠시 격정이 지나간 후 외조부는 김인수 대감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김 대감. 자네의 은공은 절대 잊지 않겠네. 내 생전에 외손자를 만나게 되었으니 이 은공을 어찌 보답할지···.”

“별말씀을요.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송곡의 소생을 찾았으니 저승에서 만나더라도 조금은 떳떳할 것 같습니다.”

“내 심정 또한 그러하네. 사달이 났을 때 재빨리 손을 썼어야 했는데···. 그 아이의 성정을 미처 생각 못 한 게 실책이었네.”

“너무 자책하지 마십시오. 영양께서도 대감마님께 누가 될까 그리 했을 했을 것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잠시 후 외조부는 해인을 돌아보며 말을 건넸다.

“이젠 이곳이 네 집이다. 지난날은 잊고 새로 태어났다고 생각하려무나.”

“예. 할아버님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해인의 대답에는 힘이 없었다.

외조부의 눈빛으로 봐서는 좋든 싫든 꼼짝없이 한성에 머물러야 할 것 같았으므로.

거기에 더해 친가를 말할 때는 숨까지 막혔다..

“너는 경주 최씨의 방계혈족으로 승우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

처음으로 들어 보는 성씨이고 이름이었다.

생모와 함께 사라질뻔한 자신에게 버젓한 이름이 있었던 것이다.

“네 생부는 참으로 총명한 선비였다. 장원급제를 한 네 아비를 내가 욕심내어 네 어미와 짝을 지었단다.”

“······.”

외조부의 권세가 하늘을 찌를 때였으니 생부도 감지덕지했을 것이다.

다만 불꽃 속에 뛰어든 불나방 신세인지는 몰랐을 터.

해인이 짐작한 것처럼 외조부의 뒤이은 얘기도 그렇게 흘러갔다.

“주상은 내가 네 아비를 사위로 받아들인 게 못마땅했던지 사사건건 각을 세우더구나. 급기야는 관례도 무시하고 대뜸 포천 현감으로 내보내기에 내가 조금 심하게 반대를 한 게 화근이 된 게 아닌가 싶구나.”

“할아버님. 소손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라서···.”

생부의 과거를 알려 주려는 의도인 건 알겠지만, 도가 지나친 게 아니가 싶어 주의를 환기시켰다.

듣는 귀가 있을 수 있음이다.

“이 자리가 아니면 언제 이렇게 내 속을 알릴 수가 있겠느냐. 이젠 늙었는지 두렵지도 않구나. 말을 옮길 누군가가 있다면 내가 잠시 정신이 혼미해졌다고 전하겠지.”

아직도 외조부를 주시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었다.

“마침 네가 태중에 있었기에 네 아비는 홀로 포천 현감으로 부임했단다. 얼마 후 주상께서 한성으로 불러올렸지만·.”

생부의 처지가 어땠는지 잘 모르겠으나 복중부터 줄곧 외가에서 있었다면 외조부모가 해인을 얼마나 애지중지했는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외가에 머물라는 건 그때의 역모 사건으로 네 친가도 어렵게 되어서 그렇다. 우선은 이곳에 있으면서 차차 내 장래를 논의해 보자꾸나.”

“할아버님. 생부께서 복권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이제는 해인이 아닌 최승우로 살아야 한다는 걸 알고 나자 친가 쪽도 궁금해졌기에 물어본 것이다.

“집안이 풍비박산 났는데 뒤늦게 복권이 된들 쉽게 일어나겠느냐.”

“······”

“그래서 네 뒷바라지를 내가 하려는 게다. 이제부터는 과거를 잊고 최승우로 살아야 한다는 걸 명심하여라.”

* * *

그날부터 해인은 외가댁에서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승려에서 양반으로 신분이 바뀐 현실에 적응하는 게 가장 난처했다.

승려의 신분일 때는 누구나에게 존대해야 했지만, 지금은 말을 가려야 했다.

하인들에게 존대를 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아침마다 외조부와 외삼촌에게 문안 인사를 드려야 하는 일이 보통 곤욕이 아니었다.

사랑채에 문안 인사를 드리러 가면 한참 동안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양반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글공부가 왜 필요한지 등 온갖 시시콜콜한 얘기를 다 들어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약관의 나이가 될 때까지 절에서만 지낸 해인이 세상 물정을 너무 몰랐기 때문이다.

어려운 불경 공부를 한 경험으로 경서를 읽는 데는 무리가 없었으나 세상 물정은 하루아침에 알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두 살 아래 외종인 찬영을 대동하고 자주 대문 밖을 나서야 했다.

외종인 찬영 또한 글방 도령이라 세상 물정에 그리 밝은 건 아니었지만 한성에서 자랐기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외동인 찬영은 해인을 곰살갑게 대했는데, 형제자매가 없는 그로서도 든든한 형이 생긴 게 무척 달가웠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세속을 익히며 서책에만 파묻힌 지 두 달이 다 되어 가는 어느 날이었다.

불현듯, 문수보살을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외조부에게 허락을 구했다.

“낯선 길인데 찬영과 함께 가지 그러느냐. 그런데 화계사에도 아는 스님이 있었던 게냐?”

“일전에 저잣거리에서 안면이 있는 노스님을 만났습니다. 마침 화계사에 머문다기에 찾아뵙고 불가를 떠난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한성에 머물러야 할 처지를 알리고 앞으로 어떻게 처신하는 게 옳은지를 묻고 싶었다.

“네 근본을 되찾았으면 그만이지 굳이 찾아가서 고할 필요가 있느냐?”

“저와는 인연이 깊습니다. 신분이 바뀌고 속세에서 살아간다고 하여 굳이 피할 것도 아니고요.”

“그건 그렇다만. 혹여 네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까 걱정되는구나.”

외조부의 염려가 무엇인지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나 이젠 불제자의 길을 포기한 상태였다.

“할아버님. 소손은 이미 불제자의 길을 포기했습니다.”

“네가 마음을 굳힌 걸 모르는 건 아니다만 속세에 살다 보면 환멸을 느낄 때도 있을 게다. 그런 일이 발생하면 네가 다시···.”

어차피 파계를 한 마당에 굳이 불가와의 인연을 남겨 둘 이유가 뭐 있겠느냐는 것일 게다.

혹여 세상사에 실망한 나머지 다시 승려의 길로 들어서지 않을까 염려하는 것이리라.

“그래도 이대로 소식을 끊는 건 도리가 아닌 것 같사옵니다. 소손의 걸음으로 두 시진이면 너끈히 다녀올 수 있으니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도록 해라. 그런데 그 먼 곳까지 두 시진에 다녀오는 게 가능하냐?”

“소손이 약간의 무예를 익혀 걸음이 조금 빠른 편입니다.”

해인의 대답에 눈을 가늘게 뜨고 이리저리 몸을 살피던 외조부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과연 몸이 튼실하구나. 네가 무예를 익혔다고 김 판윤이 말해 주더구나.”

“겨우 제 한 몸 건사할 정도밖에 안 됩니다.”

“겸양 떨 것 없다. 판윤의 호위무사를 한 수에 제압할 실력이라면 자랑해도 된다.”

“······.”

왜 이리 무예를 익힌 것에 관심이 있나 싶어 아무 대답도 못 했다.

그랬는데 외조부의 심중은 다른 곳에 있었다.

“네가 승려임에도 무예를 익혔다는 건 속세로 나올 마음이 있었던 게 아니겠느냐. 그러니 더 이상 걱정은 않겠다. 다만 무예보다 학문을 더 쳐 주는 세상이라 아쉽긴 하지만 어쩌겠냐. 무과를 보는 것도 한번 고려해 보자꾸나.”

외조부는 과거를 보게 할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그것도 무반의 길로.

하기야 이제 와서 사서오경을 공부한들 어느 세월에 문반으로 출사하겠는가.

물론 과거를 치르지 않고 음서로 벼슬을 얻는 길도 있겠지만, 그러나 음서로 출사해도 기본인 음문취재는 거쳐야 한다.

허나 해인의 수준으로는 음문취재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설사 음서로 벼슬길에 오른다 할지라도 청요직에 오르지 못하고 한직에 머무는 게 고작이라 내키지도 않았지만.

“할아버님. 저는 벼슬길에 나설 생각이 없습니다.”

“어허! 그런 소리 말아라. 벼슬을 떠나 조선에서 양반으로 살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다. 문반보다 무반이 괄시를 받기는 하지만 일단 시도는 해 보자꾸나.”

“화계사에 다녀온 후에 소손의 거취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너의 전정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벼슬하는 게 아귀지옥에 들어가는 것이긴 하다만 네가 처신하기 나름이다. 그러니까 화계사 다녀오면서 마음을 다잡아라. 알았느냐?”

“예. 할아버님.”

“오냐. 그럼 그렇게 알고 있으마.”

이렇게 소원하는데 다른 구실로 거절하는 것도 불효다.

문수보살을 만나 저간의 사정을 얘기하면 해인에게 나아갈 길을 제시하지 않겠나 싶었다.

이젠 한성을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는 형편이기 때문이다.

목매게 그리던 딸의 일점혈육과 극적으로 상봉했는데, 외손자가 제 갈 길을 가겠다고 한다면 그 충격은 또 오죽하겠는가.

인연을 끊는다면 모를까 그렇게 모질지 못하니 어쩔 수 없이 외조부의 말을 들어야 할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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