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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선 제일 검이다-21화 (21/130)

외조부와의 만남 (3)

021화 외조부와의 만남 (3)

물어물어 화계사로 찾아갔으나 문수보살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문수라는 노스님이 여기에 있느냐고 물어본 해인만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았다.

문수보살에게 물어보고 장래를 결정할 생각이었던지라 조금은 난감했다.

그렇다면 이젠 스스로 결정하고 나아갈 수밖에.

외가댁에 돌아온 해인은 집 안이 무척 어수선한 것에 바짝 긴장했다.

낯선 사람들이 집 안에 있었던 것이다.

무슨 일인가 싶어 급히 외조부에게 문안드리러 갔더니 외조부는 청수하게 생긴 노인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인사드려라. 어의이시다.”

어의라면 궁궐에서 왕과 왕실 가족들만을 살피는 의원인데 어찌 외조부와 함께 있느냐다.

해인이 깜짝 놀라자 외조부는 금상의 명으로 어의가 왔다고 부연했다.

“주상 전하께서 내 환후가 걱정되어 어의를 보내 주셨구나.”

금상이 어의를 보내어 환후를 챙겨 준다는 건 여전히 외조부의 영향력이 크다는 뜻이고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려는 화해의 손짓일 수도 있다.

다시 중용하겠다는 의사 표시일 수도 있고.

가슴을 쓸어내린 해인이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경주 최가 승우라고 하옵니다.”

“얘가 조금 전에 말한 외손자요. 20년 만에 찾았소이다.”

“대감마님의 정성이 하늘을 감복시켰나 봅니다. 드디어 찾아내셨군요.”

“그러면 뭘 하오. 외손자만 오고 여식은 먼 곳으로 떠나 버린 것을. 앞으로는 제발 그런 억울한 일이 없어야 할 텐데......이제는 여한이 없소.”

“대감마님. 아직 정정하신데 무슨 말씀이십니까. 주상 전하께서 걱정을 많이 하시오니 쾌차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궐내에 바쁜 일이 있어 그만 물러가옵니다.”

외조부의 말에 어의 영감은 자리가 불편한지 서둘러 일어났다.

어의가 나가자 외조부는 분기를 참지 못했다.

“주상이 무슨 변덕으로 어의를 보냈는지 모르겠다. 내 병이 주상으로 인해 비롯되었거늘. 이제 와서 어의를 보내는 건 병 주고 약 주는 게 아니면 무엇이겠느냐. 아무리 주상이라지만 사람을 이렇게도 우롱하다니···.”

주상에 대한 서운함이 뼈에 사무쳐 있는 듯했다.

사위와 딸을 저승으로 보낸 원흉이니 오죽하겠는가만, 해인으로서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문수보살이 말한 한성이 머물 곳이 못 된다는 말이 바로 이것인가 싶었기 때문이다.

“할아버님. 듣는 귀가 있을까 저어됩니다.”

“이젠 듣는 귀가 있어도 상관없다. 내가 골골하고 있다니까 어의를 보낸거다. 얼마나 더 살지 알아보려는 게지.”

생부나 외조부가 어지간히 바른 소리를 했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밉보이다 못해 있지도 않은 역모를 핑계로 벼슬을 떼고 내쳤을 게 아닌가.

해인이 알기로는 관리나 선비들은 금상을 충심으로 위한다 했는데, 김인수 대감이나 외조부를 보면 꼭 그렇지만 않은 것 같았다.

금상에 대해 거의 막말에 가까운 언사를 쏟아 내는 걸 보면 충심은커녕 반감만 가득했다.

“소손이 언젠가는 생부를 모략한 자들에게 그 죄를 물을 것입니다.”

자신이 세상에 나온 건 생부와 생모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걸 애써 외면했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심현사에 있을 때 초파일 날 불공드리러 온 사람들의 손을 잡고 밝게 웃던 아이들을 보고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그리고 보개마을에 심부름 갔을 때에도 아이들이 집으로 가는 모습을 보던 심정은 또 어땠으며.

왜 나는 저러지 못하는가 하는.

보현 스님에게 부모가 누구인지 왜 심현사에 오게 되었는지 꼭 물어보겠다고 다짐하곤 했지만, 막상 보현 스님의 얼굴을 보면 차마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스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 것이므로.

“이제 와서 들춰낸다고 네 아비 어미가 살아올 것도 아니다. 금상에게 밉보인 게 잘못이지 누구를 원망하겠느냐. 부화뇌동한 신료들이 있기는 하지만 다들 자기 목이 떨어지는 게 두려워 어쩔 수 없이 동조한 것이고.”

“그래도 억울한 누명을 쓴 걸 알았을 건데 직언을 하는 게 신하의 도리가 아닙니까.”

조선은 신료들과 선비들이 움직이는 나라라고 알고 있었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내가 흥분한 나머지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한 것 같다만. 가슴에 한을 품고 살아 봐야 네 판단만 흐려질 뿐이다. 판단이 흐려지면 시야도 좁아지고 실수가 따르는 법이다. 조선에서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느냐. 네 아비도 그 중 하나라고 생각하여라.”

“······.”

“이제 와서 주상을 흠잡은들 뭐가 달라지겠느냐만. 그래도 네 아비처럼 되지 않으려면 진실은 알고 있어라. 지금의 주상은 병적으로 의심이 많은 사람이다. 그리고 주변에서 신망을 받는 신하를 자신의 자리를 넘본다고 생각하고 가차 없이 쳐 내더구나. 교묘하게 정쟁을 붙이고 신료들 사이를 이간질시키는 짓도 서슴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니 나중에 출사를 하더라도 네 흉심을 절대로 남에게 내비치지 말거라.”

“무슨 말씀인지 잘 알았습니다.”

“그렇다고 쥐 죽은 듯 웅크리고 있을 것도 없다. 영원한 권세란 없는 법이다. 주상의 세상도 언젠가는 저물 것이다.”

* * *

화계사에 다녀온 후 해인은 태식호흡과 무예를 다듬는데 몰두했다.

범접할 수 없는 무예를 갖춘다면 어려운 일에 봉착하더라도 쉬이 헤쳐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는 틈틈이 사서오경을 읽었다.

외조부가 과거를 봐야한다고 입버릇처럼 되뇌기도 했지만, 양반가의 자손으로 과거 시험에 붙지 않으면 앞으로 행세를 할 수 없다는 현실을 자각한 거였다.

무과는 초시, 복시, 전시의 삼시제로 치러지는데, 중점적으로 보는 건 궁술 기창 격구 병서 경서 등이다.

삼시를 통과하면 홍패를 수여하고 종7품의 품계를 수여하는데, 문과 장원에게는 종6품의 품계를 주는 데 반해 무과는 장원 제도도 없이 종7품의 품계만 주어졌다.

그만큼 무과를 아래로 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무과 복시를 치를 때 사서와 오경에서 각각 한 과목씩을 선택하여 최소한의 교양만 확인하기 때문이다.

물론 문과에 비해 훨씬 낮은 수준이긴 하지만, 사서오경을 들여다봐야 하는 해인으로서는 여간 성가시지 않았다.

과거 시험이 아니라도 양반으로서 최소한의 교양을 갖추려면 반드시 읽어 두어야 하는 터라 몸을 꼬면서도 하루에 두 시진 이상은 꼬박 경서를 읽는 데 할애해야 했다.

한 달 동안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해인을 외종인 찬영이 대문 밖으로 끌어내었다.

“형님. 그러다가 몸에서 사리가 나오겠소. 오늘은 바람이나 쏘이고 옵시다. 아니면 기방에 들러 곡주라도 마시든가.”

“할아버님이 아시면 경을 치실 텐데···.”

“장가를 가서 슬하의 자식을 두었을 나이인데 곡주를 좀 마신들 누가 뭐라고 하겠소. 할아버님의 성품은 제가 익히 아니까 형님은 나갈 채비나 하오.”

집 안에만 박혀 있었더니 조금 답답하던 차였다.

수련이든 공부든 열심히 한다고 능사는 아니기에 잠시 쉬기로 했다.

“그럼 잠시 바람이나 쏘이러 나갈까?”

“잘 생각하셨소. 할아버님께는 제가 말씀드리고 오겠소.”

찬영은 뭐가 그리 좋은지 뛰다시피 사랑방으로 향했다.

그동안 과거 시험 공부에만 매달렸던 터라 바깥출입은 생각조차 못 했었는데 해인을 핑계 삼으면 쉬이 허락할 것이기 때문이다.

절에서 자란 해인에게 바깥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알려 주겠다는데.

잠시 후 찬영은 상기된 표정으로 돌아왔다.

“형님. 앞으로 매일 출타하게 생겼소.”

“무슨 일로?”

“할아버님께서 무과에 대비해서 승마를 배우라지 뭐요.”

무과에 격구 시험이 있기는 하지만 꼭 말을 타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말이 아무나 탈 수 있는 흔한 것이라면 모를까 워낙 귀한 터라 어지간해서는 갖기 어려웠다.

그러기에 가난한 양반가의 자손은 승마를 배울 수도 없었다.

그래서 승마를 배우지 못한 자들에겐 두 발로 달리면서 격구를 한다.

“나는 말만큼이나 빨리 달릴 수 있어서 굳이 승마를 배울 필요가 없는데··· 새삼스레 승마는 무슨.”

“형님. 거짓부렁 하지 마시오. 사람이 무슨 수로 말보다 빨리 달릴 수 있다는 것이오.”

“절에 있을 때 만날 산만 오르내렸기에 몸이 좀 날랜 편이다.”

“그거야 나중에 확인해 보면 될 일이고요. 당장 바깥출입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지요. 이참에 소제도 말 타는 걸 배워 보고 싶소.”

글방 도령이 무슨 근력이 있다고 말을 타겠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경험은 없지만 마구 요동치는 짐승 위에서 중심을 잡는 일인지라 허리며 허벅지의 힘이 남달라야 그나마 견딜 것인데 말이다.

아마 한 식경도 못 견디고 나가떨어질 것이다.

“말을 타겠다고? 뜀박질할 힘도 없는 서생이?”

“이래 봬도 내가 통뼈요. 그깟 말이 무어 그리 대단하다고 그러시오.”

“뭐. 굳이 함께 배우겠다면 나야 심심치 않아서 좋기는 한데 네가 잘 버텨 낼지가 걱정이다.”

“형님. 소제가 보기와는 달리 제법 강단이 있으니까 염려 마시우. 할아버님의 허락이 떨어졌으니까 일단 대문 밖으로 나섭시다. 미적거리다가 발목 잡히겠소.”

그렇게 큰소리치는 찬영에게 이끌려 간 곳은 흥인지문 밖의 마장이었다.

앞서 도착한 하인이 연통을 넣었는지 둘을 맞이하는 마방 주인의 머리가 땅에 닿았다.

마방 주인의 시범이 있은 후 말에 올라탄 해인은 처음에는 잠시 부자연스러웠으나 한 식경쯤 지나자 말의 움직임에 몸을 맞출 수 있었다.

찬영도 힘들어하는 기색 없이 곧잘 타는 걸 보니 제법 근력이 있는 것도 같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마방 주인이 권한 말은 사람을 가리거나 난폭한 성격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권문세가의 도련님들이 왔으니 타기 쉬운 말을 선보였으리라.

* * *

승마 연습을 마치고 귀갓길에 들른 곳은 종루 골목에 위치한 명월옥이라는 기방이었다.

찬영은 친우들과 어울려 몇 번 와 본 곳이라고 했다.

아직 신시도 채 지나지 않은 시간임에도 술 취한 사람들로 왁자지껄했다.

기방에서 심부름하는 여아의 안내로 막 빈방에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잠깐. 그 방은 우리가 이미 들기로 한 방이오. 다른 방을 찾아보시오.”

고개를 돌려보니 한껏 차려입은 도령 셋이 거만한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기방에 미리 연통을 하고 오는 경우도 있는가 싶어 찬영에게 눈으로 물었다.

찬영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짓더니 되받아쳤다.

해인이 있으니 겁날 게 없다 싶은 것이다.

“억지 부리지 마시오. 방을 미리 정해 두었다면 심부름하는 아이가 어찌 이 방으로 우릴 안내했겠소. 괜한 시비하지 말고 댁들이나 빈방을 알아보시오.”

“어허! 이 도령이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고 있네. 곱게 물러나면 그냥 보내 줄 건데 굳이 우리에게 해우채라도 보태 주려나 보네.”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다.

시비를 걸 작정으로 그러는 것이리라.

그중 해인의 시선 끝에 있는 도령의 몸이 제법 실했는데 무예깨나 익힌 몸으로 보였다.

양반가 자제들 중 일부가 시정잡배들처럼 갖은 행악을 부린다는 얘기를 들었었다.

이 정도는 힘으로 충분히 제압할 수 있지만 부딪쳐봐야 시끄러워지기만 할 뿐.

생명의 위협을 받는 자리라면 모를까, 잠시만 참으면 되는 일이다.

“찬영아. 그냥 돌아가자. 다음에 기회를 봐서 다시 오자꾸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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