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조부와의 만남 (4)
022화 외조부와의 만남 (4)
해인이 그냥가자고 하자 찬영이 발끈했다.
“형님. 이대로 돌아가면 웃음거리밖에 안되오. 소제는 오늘 여기에서 꼭 마셔야겠소.”
“앞으로 자주 나올 건데 뭘 그러느냐. 오늘은 그냥 가는 게 좋겠다.”
둘이 실랑이를 하자 불청객들이 더 난리를 쳤다.
“누구 맘대로 돌아간다는 것이냐. 이미 우리 속을 긁어놓았으니 대가를 치르고 가야지.”
적반하장도 유분수다.
멀쩡히 남의 방을 내놓으라고 하질 않나, 이젠 곱게 가지도 못한단다.
해인은 참을 만큼 참았다는 생각에 한마디 했다.
“우리가 댁들에게 왜 그래야 하지? 양보하고 돌아간다는 것도 문제인가?”
“당연하지. 우리의 기분을 망쳤으면 응분의 대가를 치러라. 대가를 치를 능력이 없다면 매를 맞고 가든가.”
한명만 빼고는 한주먹거리도 되지 않는 도령들이었다.
그런데 저들의 집안 내력이 어떤지 모르는 터라 막나가기도 곤란했다.
외가에 얽매인 몸이 아니라면 벌써 요절을 냈을 것이지만, 이젠 예전처럼 몸이 먼저 반응해서는 안 되기에 성질을 꾹꾹 눌렀다.
그런 마음과는 달리 고운 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힘이 없다면 모를까 넘쳐나는데 꼬리를 말긴 그렇잖은가.
“우리 몸에 손을 댈 수 있다고 생각하나?”
해인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도령들을 노려봤더니 셋 중 둘은 움찔했지만 하나는 입술 끝을 올렸다.
“못할 것도 없지.”
도발이라고 생각했는지 해인의 말이 끝나자 날렵하게 생긴 도령이 가만히 있는 찬영에게 주먹을 날렸다.
만만해 보이는 찬영을 먼저 제압하여 기선을 잡으려는 것이다.
기습적인 공격이긴 하나 그 정도의 공격을 막는 건 일도 아니었다.
부드럽게 보법을 밟아 찬영을 슬쩍 밀치며 손바닥으로 상대방의 손목을 살짝 건드렸다.
가벼운 손짓임에도 찰진 소리가 들렸다.
짝!
“억! 이놈이 사람을 치네.”
“먼저 손을 쓴 자가 할 말은 아니지. 억울하면 다시 시도해 보려무나.”
“오냐. 이놈. 명년 오늘을 네 제삿날로 만들어주마.”
약이 바짝 오른 도령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더니 발차기를 시도했다.
발차기를 시도한다는 건 제법 무예를 익혔다는 방증이다.
박투술은 형과 식이 정해져 있는 무술이라기보다는 임기응변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는 것이기에 발차기는 기본이고 박치기와 낭심을 걷어찬다든가 깨물기 등도 공격의 한 방법으로 친다.
옆에서 지켜보노라면 애들 싸움처럼 유치하기 이를 데 없지만 상대방을 무력하게 만들기에 그만한 것도 없다.
도령의 자세가 안정적이고 공격이 날카로운 것으로 보아 수년간 수련한 몸이었다.
그러나 해인이 누구던가.
가볍게 피하며 검지로 도령의 어깨를 툭 밀었다.
단순한 동작이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힘이 들어가 있었다.
견우혈을 찔렀으니 하루나 이틀은 어깨를 못 쓸 거였다.
“어이쿠!”
마당에 나가떨어진 도령은 바로 일어나지 못하고 신음만 뱉어냈다.
일반인들 같았으면 비명을 질렀겠지만 수련을 한 도령인지라 이를 악물고 참아내었다.
제법 강단이 있는 자였다.
넘어진 도령이 계속 끙끙거리자 뭔가 사달이 난 걸 감지했는지 다들 표정이 굳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해인은 시침을 뚝 딴 얼굴로 찬영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젠 더 볼일이 없겠지. 집으로 돌아가자.”
“이보시오. 사람을 저리 만들어놓고 그냥 가면 어떡하오.”
해인이 자리를 뜨려고 하자 나머지 도령들이 앞을 가로막기는 했지만 눈빛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도령들도 봤을 게 아니오. 제풀에 넘어진 걸 난들 어쩌겠소. 공연히 홀로 넘어진 사람을 책임지라는 말이오?”
“........”
해인의 대꾸에 할 말이 없었는지 길을 비켜섰다.
자신들도 곁에 있었지만 상대방이 손쓰는 걸 보지 못했으니 딱히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해인이 노린 것도 그것이었다.
어느 댁의 도령인지도 모르고 함부로 손을 썼다가는 외가댁에까지 그 화가 미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음에 기회 있으면 술잔이나 나눕시다. 우린 이만 가겠소.”
명월옥 대문을 나서자 찬영은 뛰듯이 걸었다.
“뒤따라오지도 못할 것인데 왜 그리 서둘러 가는 거냐. 쓰러진 자를 돌보기도 바쁠 게다.”
“형님. 도대체 뭘 어쨌기에 그 자가 넘어져서 끙끙거리는 게요?”
“무슨 소리냐? 제풀에 넘어진 걸 너도 봤으면서.”
“형님이 놈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찌르는 걸 내 눈으로 봤는데 뭔 소리요.”
눈썰미도 좋지, 해인의 손짓을 봤다면 찬영의 눈도 보통이 아니었다.
곧이곧대로 얘기해줘 봐야 괜한 걱정으로 머리만 복잡해질 것이어서 시침을 뚝 땄다.
“그냥 단순히 손가락으로 민 것뿐이다.”
“그런데 운신을 못할 정도로 끙끙거린단 말이오?”
“그것이야 넘어지면서 충격을 받은 거겠지.”
찬영은 해인의 말을 믿지 않았다.
본인은 손을 쓰지 않았다고 하지만 뭔가 수를 쓰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형님. 속일 사람을 속이시오. 내가 눈치 하나는 한성에서 제일이라는 소리를 듣소.”
“네가 그렇게 봤다면 그런 것이겠지. 나는 그 자의 공격을 피한 것 외엔 별로 한 게 없다니까 그러네.”
***
그 일이 있고부터는 찬영은 기방에 가자는 말이 쑥 들어갔지만, 그 대신 무예를 배우겠다고 떼를 썼다.
사내가 자신의 몸 하나는 건사해야 한다는 게 찬영의 논리였다.
해인이 곁에 없었다면 톡톡히 창피를 당한 건 물론이고 금전까지 뺏길 처지였기에 그게 못내 언짢았던 모양이다.
문제는 허약하기 짝이 없는 찬영의 근력을 키우기가 그리 쉽지 않다는데 있었다.
방안에 들어앉아 경서나 읽던 도령이라 찬영의 손발은 근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상것이라면 맘껏 뛰놀기라도 해서 기본 체력이 있겠지만, 양반가의 체통에 걷는 것조차 소걸음이라 언제 근육이 붙겠는가.
다음날부터 아침저녁으로 찬영의 앓는 소리를 외가댁 담장너머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
찬영이 무예를 익히자 외조부와 외숙은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반기는 눈치였다.
자기 몸 하나는 건사할 줄 알아야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몸을 뺄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게 외조부의 생각이었다.
괜한 고집으로 버티고 있다가 죽음을 자초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해인의 생부가 좋은 본보기였으리라.
찬영이 막 검술 수련에 재미를 붙이고 있을 즈음 내년에 실시할 식년시 기일이 정해졌다.
그래서 무예수련 시간을 줄이려고 하자 찬영이 펄쩍 뛰었다.
“승우 형. 과거시험이 있다고 수련을 멈출 이유가 없잖소.”
“그 정도면 이젠 어딜 가서 창피를 당하지는 않는다. 과거시험 때까지는 경서나 읽자. 나도 아직 모자란 부분이 많아서 서책을 더 들여다봐야겠다.”
“형님의 글 수준이면 무과는 별 문제 없소. 무과는 글만 읽을 줄 알면 그냥 통과시켜준다지 않소.”
“나는 그렇다고 하자. 문과를 보는 너는?”
“나도 과거시험에 통과할 자신이 있으니 가르쳐주시오.”
과거시험은 전통적으로 3년마다 치르는 식년시가 가장 으뜸으로 치는데 찬영은 지난 식년시에 학문도 짧고 나이가 어려 응시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이라고 별 다를 게 없었다.
전국의 수많은 유생들이 구름같이 몰려들기에 식년시를 통과하는 건 하늘의 별을 따기만큼이나 어렵다.
식년시 급제자는 수십 년을 공부한 이립이나 불혹을 넘긴 유생들 차지라고 봐야 한다.
“너무 자신하다가 낙방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내가 부추겨서 공부를 등한히 했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다.”
“형님. 나는 이미 등과한 것이나 같다니까요.”
“?.......”
“준비된 자와 벼락치기로 공부한 자가 같을 수가 없다는 얘기요. 며칠 더 공부한다고 실력이 부쩍 늘어난다면 그런 공부를 몇 년씩 할 이유가 없지요. 매일 붓을 든 필체와 어쩌다 붓을 든 필체가 확연히 다르듯이 말이오.”
과거시험은 평소에 갈고닦은 실력으로 임해야 한다는 뜻이리라.
그건 비단 학문에만 국한된 게 아닌 무예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무예를 익히고부터는 공부도 더 잘 된다는 찬영이고 보면 굳이 수련을 멈출 이유는 없었다.
“네가 그리 원한다면 새벽 수련만 하는 것으로 하자.”
“아쉽긴 하지만 어른들 눈치도 있으니까 그 정도로 만족해야지 어쩌겠소.”
경서를 읽는 것보다 무예 수련이 더 재미있다는 찬영이 이 정도 양보한 것만도 다행이었다.
요즘 무예를 익히는데 푹 빠져 경서공부도 뒷전이었기 때문이다.
근력이 없던 초기에는 무척 힘들어 했으나 어느 정도 근력이 붙자 무명에 물 스며들 듯 가르치는 대로 빨아들였다.
총명한 머리 때문인지 무예에 대한 이해도 빨랐다.
이런 정도라면 일 년 정도만 수련해도 제법 날카롭다는 소리를 들을 터.
“형님. 소제도 형님처럼 무반으로 나갈까보오.”
“그게 무슨 말이냐?”
“솔직히 말하면 약관도 안 된 내가 과거에 급제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오. 설사 운 좋게 급제한다고 해도 우리 가문을 계속 견제하기에 좋은 자리가 날 것 같지 않고요. 차라리 무반으로 출사하면 관심에서 벗어나지 않을까 싶소.”
생부가 억울한 누명이 벗겨져서 복권되었다고는 하나 역모로 몰렸다는 낙인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생부로 인해 외조부도 벼슬을 내려놓지 않았는가.
의심이 많은 금상이나 금상의 눈치를 살피는 신료들이라면 견제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게 아니라도 일단 금상의 눈 밖에 난 가문이라면 누구든 가까이하지 않으려 할 것이니까.
“신료들이 견제하려 든다면 무반벼슬이라고 가만히 두겠느냐. 그러느니 초야에 묻혀 사는 게 속편하겠다.”
“형님. 조선의 국법이 어떤지 아시오? 집안의 누가 과거시험을 통과했느냐에 따라 양반이 되고 상민이 되는 게요. 역모 사건으로 인해 아버님은 아예 과거도 치르지 못하셨소. 하다못해 초시나 진사 소리도 듣지 못하시오. 나마져 급제를 못하면 어찌 되겠소. 그래서 경쟁이 덜한 무과라도 보려는 것이오.”
문과에 응시하는 전국의 유생들을 제치고 초시나 복시를 통과하기는 하늘의 별따기이다.
얼마나 경쟁이 치열하면 불혹을 넘기고도 과거 시험에 보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일까.
3대 걸쳐 품계를 받지 못하면 상민으로 전락하기에 과거시험에 목을 매는 것이다.
찬영이 문과를 마다하고 무과를 생각할 정도라면 현실의 벽이 그만큼 높다는 뜻이다.
그런 고민 끝에 나온 말이겠지만 무과라고 그리 만만하겠는가.
그리고 문반보다 아래로 치는 무반의 길을 간다면 어른들이 곱게 허락해줄지도 의문이었다.
“네가 결정한다고 외조부와 외숙께서 허락하시겠냐?”
“안 그래도 오늘 여쭤볼 작정이오.”
***
찬영의 고민을 들은 외조부와 외숙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아무리 총명하다고 하나 수십 년을 공부한 유생들과 경쟁해야 하는데, 약관 전의 급제는 어불성설이고 이립을 넘겨야 가까스로 붙을까 말까다.
그리고 이미 금상이 반골 가문으로 새초롬하게 보고 있는데, 그 가문의 자손이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했다고 하여 쉽게 중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무반의 길로 가겠다는 것도 문반 가문으로서는 내키지 않을 일이었다.
한참을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외조부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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