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과 급제 (2)
026화 무과 급제 (2)
김민혁이 노른자위 자리인 겸사복을 팽개치고 수문장으로 온 이유는 조만간 이루어질 무관직 인사이동 때문이었다.
겸사복에서 바로 빠져나오기 어렵기에 우선 수문장직을 택한 거였다.
그렇다면 해인도 따분하기만 한 수문장 자리를 벗어날 기회이기도 했다.
심현사를 떠난 건 천하를 주유하기 위함이었는데 외조부를 만난 후에 일이 꼬인 신세였던 것이다.
수문장 노릇을 하면서도 이게 과연 옳은 길인가를 두고 몇 번이고 곱씹었었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부모와 사고무친으로 절에서 자라야만 했던 자신이 누구로 인해 불행을 겪었는가를 생각하면 이건 아니다 싶었다.
갓난아이 때부터 절에서만 자랐기에 부모에 대한 애착이 거의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혈육이 아니던가.
그걸 떠나서 한창때에 무료하기만 한 수문장 노릇을 한다는 것도 지겨웠다.
오죽하면 일 년 내내 재미랄 것도 없는 심현사가 다시 그리워지기까지 했겠는가.
지금 심정으로는 내금위를 벗어날 수만 있다면 여진과 맞부딪치는 동북면의 무관 자리도 감지덕지할 것 같았다.
이번에 혹여 운이 좋아 감찰어사들을 수행하는 무관으로 발탁된다면 금상첨화이겠고.
해인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자 김민혁이 불을 질렀다.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어서 얼른 손을 쓴 것이네. 이번 기회가 따분한 내금위를 벗어날 절호의 기회일세. 그래서 하는 말인데 자네도 도총부로 자리를 옮기는 게 어떤가.”
해인으로서는 낮에 활동할 수만 있다면 어디든 상관없었다.
기왕이면 팔도를 돌아다닐 수 있는 감찰어사의 호위무관이라면 더 좋고.
“나는 도총부보다는 감찰어사의 호위무관으로 갔으면 싶네.”
김민혁이 설쳐 주면 도총부로 옮기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허나 그래 봐야 한성에서만 맴돌 뿐이다.
몇 달 수문장 노릇에 진저리가 난 해인은 감찰어사 호위무관 자리가 더 솔깃했다.
“고생길이 훤한 호위무관을 하겠단 말인가?”
“자네도 알다시피 천하를 주유하고자 절을 떠났다가 외조부를 만나 주저앉게 되었지 않았는가. 이미 쇠락해진 가문을 나보고 일으켜 세우라지만 내가 무슨 수로 그러겠는가. 붙박이처럼 서 있는 수문장보다는 몸이 고달프더라고 산천을 주유할 수만 있다면 마다 않을 생각이네.”
이미 마음은 한성 밖으로 훨훨 날아가고 있었다.
“이보게. 승우. 기왕 벼슬길에 들어섰으면 좋은 자리를 꿰차야 하지 않겠는가. 감찰어사 호위무관은 일시적인 자리일 뿐일세. 그 이후의 거취도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나. 한성에 있으면서 일가도 이루어야 하고 말일세.”
“······.”
“자네 나이에 미장가는 드문 일일세. 그것도 벼슬을 하고 있는 처지라면.”
“속세로 돌아온 지 겨우 일 년도 안 되었네. 아직 불제자의 때도 다 벗지 못했는데 무슨 혼인인가. 사고무친인 내게 누가 올 것이며···.”
약관이면 이미 장가를 들었어야 할 나이였다.
외사촌인 찬영도 곧 혼인을 한다고 서두르고 있었기에 내심 부러웠다.
그러나 당장 혼인을 한다는 게 썩 내키지 않았다.
세상을 조금 더 안 다음이면 모를까 아직은 누군가에 얽매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속내를 내비쳤다가 외조부와 외숙에게 한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당장은 산천을 주유하고 싶은 마음뿐이네.”
“어허! 왜 사서 고생을 하나. 좋은 자리를 내가 알선해 주겠다는데도.”
“나를 위하고 싶다면 감찰어사 호위무관 자리나 알아봐 주게.”
“좀 더 심사숙고하면 안 되겠나? 자네에게 배울 게 아직 많이 남았는데···.”
복시 준비를 하면서 김민혁은 해인의 무예에 홀딱 빠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달마대사의 역근경은 아무나 익힐 수 있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태식호흡도 알려 주었는데, 처음에는 시큰둥했다가 불과 몇 달 사이에 몸이 몰라보게 달라지자 기연을 얻었다며 고마워했다.
검술도 마찬가지였다.
보현 스님께 사사받은 검술은 한량들이라면 누구나 익히는 것이지만 해인은 이미 형과 식에 얽매이지 않는 수준이었기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김민혁은 무과에 급제한 후로 함께 무예를 수련할 수 없자 그 점을 무척 아쉬워했다.
“이젠 스스로 갈고닦아야지 누가 봐준다고 달라질 건 없네. 그리고 자네의 무예면 어딜 가서도 큰소리칠 만하네.”
“아직 자네 옷자락도 건드리지 못하는 실력이잖은가.”
“나야 걸음마를 뗀 후로 오로지 무예 수련에만 몰두했으니까 그렇지. 자네도 조만간 나만큼 될 것이네.”
“그런 말 말게. 자네를 따라가려면 십 년도 더 걸릴 걸세. 앞으로 수문장직을 얼마나 할지 모르겠지만 내 수련이나 좀 봐주시게.”
무예를 익힘에 있어 지름길은 없다.
해인의 수준을 따라오려면 몇 년간 다른 걸 전폐하고 오로지 무예만 익혀야 가능하다.
동자승 때부터 죽어라고 무예에만 몰두했기에 지금에 이른 것인데 겨우 몇 달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물론 문수보살을 자처하는 노스님을 만난 게 해인에게는 기연이었지만.
“그리함세. 호위무관 자리를 얻기 위해서라도 자네에게 잘 보여야지.”
“어허. 감찰어사는 주상이 비밀리에 임명하는데 누가 될지 어찌 알겠는가. 대놓고 알아봤다가는 치도곤을 당할 일이네. 감찰어사의 호위무관도 결코 만만히 볼 자리는 아닐세.”
“방법이 없겠나? 가만히 누워서 떡이 떨어질 때만 기다릴 수는 없잖은가.”
“기다려 보게. 자네의 무예가 뛰어나다는 걸 전시에 참석했던 신료들이면 다 알 것이네. 자네 같은 뛰어난 검사를 호위무관으로 데리고 다니면 자신의 안위를 보장받을 수 있는데 누군가는 손을 내밀 것이네.”
무과의 마지막 관문인 전시를 치를 때면 왕의 친림 하에 몇몇 대신들만 참석하는데, 이번에는 주상이 무슨 변덕이 났는지 자신은 빠지고 대소신료들을 모두 참관하게 했다.
그런 자리이니만치 해인도 자신의 실력을 일부분이나 풀어놓았었다.
본래의 실력의 반도 선보이지 않았음에도 다른 무과 응시자보다 돋보였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 * *
김민혁이 금호문 수문장 자리에 온 지 두 달가량 되었을 때, 그의 말대로 창덕궁 각 문의 수문장을 용양위에서 관할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각 문의 내금위 소속 수문장들도 거취를 정한다고 무척 어수선했다.
대다수는 노른자위인 내금위에 남으려고 했지만, 내금위의 자리에도 한계가 있어서 수문장으로 있던 무관들은 도총부 등으로 자리를 옮기는 게 기정사실처럼 되었다.
해인도 이 기회에 호위무관으로 갈 수 없을까 나름대로 알아보고는 있었다.
그러나 주상이 은밀히 임명하는 어사가 누구인지 알아야 줄을 댈 게 아닌가.
답답한 속을 달래느라 외종인 찬영과 곡주를 마시는 날이 점점 많아졌다.
오뉴월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날 형조 참의가 사람을 보냈는데,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고 은밀히 사가로 와 달라는 전갈이었다.
정3품 형조 참의와 내금위 소속 수문장은 어떤 접점도 없는 사이였다.
그런데 은밀히 만나자는 건 내금위와 관련된 일은 분명 아닐 것이고 다른 일로 만나자는 뜻이 아니겠는가.
혹시 호위무관과 관련된 일이 아닐까 싶어 한달음에 형조 참의 댁으로 찾아갔다.
형조 참의 댁은 창경궁의 정문 격인 홍화문과 이어진 담장을 따라가다 보면 나오는 선인문 근처였다.
외조부 댁과는 달리 초라할 정도의 작은 기와집에 기거하고 있었다.
물론 본가가 경기도 파주에 있다고는 하나 참의라는 직책에는 어울리지 않은 옹색한 규모였다.
하인의 안내로 사랑방 앞에 도착했다.
좁은 툇마루와 면한 사랑방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쥘부채로 더위를 쫓고 있던 형조 참의 허인회는 사십 대 중반쯤으로 보였는데 바람이 불면 날아갈까 싶을 만큼 마른 몸매였다.
그런 부실한 몸에 비해 목소리는 낮고 굵었다.
“이리 들어오게.”
덩치가 큰 해인이 들어서자 방이 꽉 찼다.
“문을 닫게. 나를 만난다는 사실을 주변에 알리지는 않았겠지?”
“예. 영감.”
대감이라고 부르려다가 영감으로 호칭했다.
정3품에게는 당연히 영감이라 부르지만, 다들 예우 차원에서 대감이라고들 부르기에 잠시 갈등이 일었던 것이다.
대감이란 호칭은 종2품 이상에게만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3품은 당상관이라 대감이라고 불러도 흠을 잡힐 일은 아니다.
당상관이라 함은 정1품부터 정3품까지를 이르고 그 아래를 당하관이라 한다.
당상에 있는 교의에 앉을 수 있다 하여 당상관으로 불렀다.
그리고 당하관이라고 할지라도 매일 아침 상감인 주상을 배알하는 상참에 참여할 수 있는 품계를 참상관이라 하는데, 종3품부터 종6품이 거기에 해당한다.
그 이하의 품계는 참하관이다.
“자네는 나를 잘 모르겠지만 나는 자네를 잘 알고 있네.”
“······.”
“갑과로 등과하고도 내금위 수문장직을 묵묵히 수행하고 있다고 들었네만.”
이런 표현은 자신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는 말이다.
형조 참의가 말단 무관에게 관심을 가졌다는 게 의아했지만, 김민혁의 큰형이 줄을 댔을 수도 있었기에 겸양을 떨었다.
“경험이 일천한 제게 수문장 자리도 부담 백배이옵니다.”
“수문장 자리에 만족한다는 말인가?”
“누가 지켜도 지켜야 할 자리인지라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매일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던 해인으로서는 꼼짝 않고 밤을 지새워야 하는 야간 수문장직은 고역이었다.
몇 번이고 박차고 나가고 싶었지만 외조부의 기대를 저버릴 수가 없었기에 조금만 더 참아 보자 하는 심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뿐이다.
“그럼 더 좋은 자리가 있어도 수문장직에 계속 있을 텐가?”
“무관이 자리에 연연한다면 어찌 무관이라고 하겠나이까. 주상 전하께서 명하시면 어느 자린들 마다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그런데 여기저기 줄을 댄 이유는 뭔가?”
이미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감찰어사의 호위무관 자리를 알아보고 있다는 걸 들킨 것이다.
아마 김민혁이 여기저기 발품을 팔고 다닌 걸 말함이리라.
여기서 대답을 잘못하면 지금까지의 우직한 모습은 가식으로 비칠 터.
“편한 자리를 찾으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우연찮은 기회에 각 방면으로 감찰어사를 보낸다는 풍문을 들었기에 혹여 제게도 기회가 오지 않을까 하여 여기저기 기웃거렸습니다.”
“다들 부러워하는 내금위를 떠나겠다는 게 의아하군.”
“내금위에 배속된 건 소관 스스로 원한 일이 아닙니다. 무관들이 있어야 할 자리는 오랑캐가 들끓는 북변이나 왜구의 노략질로 바람 잘 날 없는 하삼도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해인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던 허인회는 만족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지금이라도 험한 곳으로 갈 수 있다는 말이군.”
“예. 영감.”
“그렇다면 나와 함께 일해 보지 않겠나?”
“형조에 소관이 머물 자리가 있습니까?”
“아닐세. 동북변의 정세가 하도 어지러워 잠시 둘러보고 와야 하는 일이 생겼네. 그래서 나와 함께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네.”
에둘러 표현했지만 이번에 동북변 감찰어사가 되었다는 말이다.
여진의 떠오르는 별인 누루하치가 북변을 어지럽히고 있어서 북변의 상황이 말이 아니라는 소문은 접하고 있었다.
“그럼 저의 소속이 바뀌는 것인지요?”
“당연히 내금위를 나와야만 하네. 그리나 임시 호위무관이라 나중을 기약할 수는 없다네.”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말해 보게.”
“왜 저를 낙점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전시를 치를 때 자네의 무예를 직접 봤네. 내가 무예는 잘 모르지만 자네의 검술을 보고 주변에서 다들 혀를 내두르더군.”
3명만 선발하는 전시 갑과에 이름을 올릴 정도면 식년시에 응시한 수많은 한량들 중 가장 뛰어난 인재이긴 했다.
그래 봐야 눈에 차지도 않은 품계인 종7품 무관일 뿐이지만.
문과 장원 급제자에게 종6품을 제수하는 것에 비하면 두 품계나 낮다.
똑 같은 장원급제도 문반보다 두 단계나 낮게 출발하는 것이다.
대뜸 받아들이면 너무 가벼워 보일까 싶어 겸양을 떨었다.
“보잘것없는 재주입니다.”
“자네 재주는 익히 아는 바이니 겸손할 것 없네. 나를 보좌해서 함께 함경도로 갈 수 있겠는가?”
“소관을 휘하로 들이신다면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더 재고 말고 할 것도 없어서 시원하게 대답해 버렸다.
“고마우이. 그럼 속 편하게 털어놓겠네. 주상 전하께서 동북변의 여진인들이 난리를 쳐 염려가 크시네. 하여 본관이 감찰관으로 가게 되었네. 암행하는 입장이라 평복으로 다녀야 하는데 그리되면 아무래도 도적이나 산적들의 표적이 될 수도 있어 솔직히 두렵기도 하다네. 그래서 자네를 낙점했네.”
“산적들 정도는 그리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만 급박한 상황일 때 영감께 재가를 받지 않고 먼저 움직이는 걸 허락해 주셔야 하옵니다.”
급박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 일일이 재가를 받고 몸을 움직이다가는 낭패를 볼 수도 있다.
먼저 상황을 정리하는 게 우선인 것이다.
생각보다 몸이 앞서는 게 무인이 아니던가.
“선참후계를 말함인가?”
“그렇습니다.”
“그거야 당연하지 않은가. 내가 알기로는 무예를 익힌 사람들은 위급한 상황에서도 냉정을 유지할 수 있다고 들었네. 자네의 판단이 그렇다면 선참후계를 허락하겠네.”
품계가 높은 문관들은 무관을 발가락의 때만큼도 여기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관인 해인에게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감사한 마음에 고개를 숙여 답례했다.
“영감을 모시는 동안 견마지로를 다하겠나이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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