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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선 제일 검이다-33화 (33/130)

수상한 심부름꾼 (3)

033화 수상한 심부름꾼 (3)

날이 밝은 후에 길을 떠나려고 했으나 현감의 노비들과 노숙한다는 게 꺼림칙했기에 무리해서 밤길을 나섰다.

밤에, 그것도 인적이 없는 산길을 나선다는 건 산짐승들의 습격을 각오해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길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주인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과 식솔들에 대한 염려가 뒤섞이면 다른 마음을 품을 수도 있음이다.

다행이 달이 떠 있어서 길을 되짚어 갈 수 있었다.

현감의 노비들도 이런 일에는 이력이 난 사람들이라 밤길을 걷는데 거침이 없었다.

이따금 늑대들이 출몰했지만 해인이 살기를 피우자 꼬리를 말고 피했다.

현감의 노비들도 해인의 살기에 주눅 들기는 마찬가지였다.

범인들로서는 감히 견딜 수 없는 살기였던 것이다.

평강현을 빙 돌아 회양 만호부에 도착한 때는 다음날 미시쯤이었다.

평강 현감이 관찰사에게 보내는 서신을 허인회에게 내놓았다.

“으흠! 무척 용의주도한 자로다. 서신이 외부로 유출될 걸 대비한 것 같으이.”

“나리. 현감의 서신을 소관도 읽어보았습니다만. 크게 의심할만한 대목이 없었습니다.”

“이 부분을 보게. 말을 꼬아 놓았지만 암습이 실패했다는 걸 관찰사에게 고하는 것이네.”

허인회가 지적한 문구는 안부 인사 끝에 범 사냥이 여의치 않아 놓쳤다는 부분이었다.

이런 문구를 본다면 관찰사에게 범 가죽을 구해주려고 사냥을 나선 것으로 볼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어사 일행을 암습했다고 보기엔 뭔가 미진했다.

“그것만으로는 우리를 공격했다고 유추하기엔 무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결정적인 단서가 또 있네. 회양 만호진를 거론한 부분일세. 만호도 이 서신을 한번 읽어보시오.”

허인회는 만호진의 협조를 받아 조만간 범 사냥을 나가겠다는 대목을 지적하며 치를 떨었다.

서신을 읽던 심종현은 서신을 읽더니 그저 고개만 갸웃거렸다.

“범으로 인해 민가에 피해가 있다면 만호진의 군졸들도 도와야지요. 다만 영감께서 관아를 떠난 이후 이런 서신을 보냈다는 게 조금 걸리오이다. 의심하고 들어다보니 조금 이상하긴 합니다.”

허인회가 워낙 단정적으로 말하니까 심 만호도 어쩔 수 없이 동조하는 듯했지만 그리 확신하는 눈빛은 아니었다.

그런데 허인회는 계속 평강 현감을 원흉으로 지목하고 있었다.

“본관도 그리 생각하오. 미루어 짐작컨대 서로 주고받는 서신에 어떤 약조가 있는 듯하오. 최 교위. 자네는 이 서신을 어찌 보는가?”

“내용상으로는 그리 의심할 부분이 없다고 보옵니다. 실제로 철원과 평강 등지에 범이 자주 출몰하여 사람을 상하게 하는 일이 잦았고요. 소관도 소싯적에 직접 범과 만난 적이 있을 정도로 범이 자주 민가에 내려오고 있잖습니까.”

솔직히 그리 의심할만한 대목은 없었다.

범 사냥이 관아의 나졸들만으로 할 수 있을 정도로 쉬운 일은 아니기에 만호진에 병력을 요청할 수도 있는 것이다.

고을 수령이 범 사냥을 부탁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어허! 아무래도 의심스러워. 우리가 회양으로 떠나고 나자 관찰사에게 급히 서신을 보냈다는 게 더 이상하다는 말일세.”

“참의 영감. 최 교위가 데려온 자들을 닦달하다보면 관찰사와 현감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알아낼 수 있지 않겠소이까?”

“만호 나리. 이미 소관이 닦달해보았으나 단순한 심부름꾼에 불과했습니다. 아는 게 없는데 닦달한들 뭐가 나오겠습니까?”

노비들의 입을 열기 위해서는 필시 모진 매를 앞세울 건데, 별반 아는 것도 없는 그들을 닦달해봐야 나올 것도 별로 없을 것 같았다.

그들을 회양까지 데려온 이유는 현감에게 돌아가 봤자 죽은 목숨이나 같기에 측은지심이 발동한 거였다.

“말로 해서 곱게 불 것 같은가?”

“만호 나리. 저의 살기를 견딜 만큼 강단 있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원주 감영을 수시로 들락거릴 정도라면 현감이 무슨 일을 벌이는지 대충이라도 알고 있을 걸세. 이 자리에 불러 윽박지르다보면 뭔가 알 수 있겠지.”

현감의 노비들을 불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을러봤지만 별로 얻을 것도 없었다.

두어 달에 한두 차례 서신을 전해주는 것 외엔 아는 게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믿는 사이라고는 하나 노비들에게까지 속내를 보일 정도로 물러터진 인사라면 이런 일을 벌이지도 않았을 터.

한참동안 노비들을 닦달해 봐도 만족할만한 결과가 없자, 허인회는 해인에게 통천과 고성군의 동향도 살펴보고 오라고 했다.

해인은 만호 심종현의 집요한 눈빛을 계속 받아내기도 곤혹스러웠던지라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심종현은 해인과 겨뤄보고 싶어 수시로 객사 주변을 어슬렁거렸던 것이다.

***

통천군은 백두대간의 동쪽 사면에 위치한 곳으로써 바다와 접해 있어, 제법 너른 평야지대가 두 곳이나 있는 큰 고을로 종4품의 군수가 수령으로 있는 곳이다.

고개 길을 넘자 누렇게 익은 벼들이 바람에 일렁거리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산지가 대부분인 강원도의 여느 고을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논이 있는 고을이라 다른 곳보다는 조금 나을 것으로 봤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고을 사람들의 입성이나 몰골은 평강현이나 다를 바 없었다.

이곳도 군수가 백성들을 쥐어짜고 있었던 것이다.

백성들을 쥐어짜 모은 재물로 군수나 아전들이 흥청망청하는지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모은 재물을 다른 곳에 쓴다는 뜻이다.

하루 동안 통천 일대를 대충 훑어본 후 땅거미가 질 무렵 관아 근처의 주막으로 들어갔다.

주막은 마구간까지 갖춘 큰 규모였는데, 나귀 세 마리가 여물을 먹고 있었다.

봉놋방 댓돌 위에 짚신이 세 개나 흩어져 있었고 마당의 평상에도 중년 남자 넷이 개다리소반에 삶은 돼지고기와 탁주를 놓고 떠들썩했다.

흉년이 들었다고는 하나 통천은 살짝 들떠 있는 분위기였다.

추수가 막 시작되고 있어서 미곡을 사려는 사람들이 통천으로 몰려들 때였던 것이다.

주모에게 탁주와 국밥을 청하고 평상에 앉았다.

그때 탱자나무 울 너머에 인기척이 있어 고개를 들어보니 거기엔 벙거지를 삐딱하게 눌러 쓴 나졸 두 명이 주막 마당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평상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훑어보던 나졸들이 주막 마당으로 성큼 들어섰다.

옆 평상에서 떠들썩하게 탁주를 들이키던 이들은 나졸들의 등장에 이내 조용해졌다.

그쪽을 쭉 훑어보던 나졸 중 하나가 해인이 앉아 있는 평상으로 다가왔다.

“못 보던 얼굴인데 어디에서 오는 길이냐?”

상민차림으로 길을 나섰던 터라 대뜸 하대였다.

양반 차림이 아니니 나졸들이 하대하는 게 별로 이상할 건 없었다.

“한성에서 왔소만.”

“한성에서 예까지 어떤 일로 왔느냐?”

“산천을 두루 유람 중이오.”

유람 중이라고하자 나졸들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노려봤다.

흉년이 들어 먹고 살기 어려운 때에 양반도 아닌 상민이, 그것도 새파랗게 젊은 것이 유람 다니는 게 몹시 못마땅하다는 눈빛이었다.

“호패를 좀 봐야겠다.”

괜한 시비를 걸어 엽전이나 뜯어낼 줄 알았더니 호패를 보잖다.

호패를 보이면 자신의 품계가 밝혀질 것이고, 벼슬아치가 상민 복장으로 돌아다닌다면 필시 오해를 살 일이다.

그런 이유로 잠시 미적거렸더니 나졸들이 대뜸 육모방망이를 꺼내 들었다.

“이놈. 호패를 보여주지 않는 걸 보니 매우 의심스러운 자로다. 예서 이럴 게 아니라 우리와 함께 동헌으로 가자.”

“이보시오. 무슨 죄를 지었다고 대뜸 동헌으로 가자는 게요?”

“호패도 없이 돌아다니는 걸 보니 필시 산적의 끄나풀이 틀림없으렷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며 오라를 꺼내들었다.

그래서 방어를 하려고 평상에서 몸을 일으켰는데, 그게 나졸들을 자극한 모양이다.

“이놈 봐라? 감히 대들려고 해?”

이대로 있다가는 일이 커질 것 같아서 일단 양반임을 밝히고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할 것 같았다.

“네 이놈. 오라를 내려놓지 못할까? 내가 남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상민 복장으로 다니고 있다만 본래는 양반이니라.”

“뭣이? 양반이라고? 그 잘난 양반이라면 당연히 호패는 갖고 다닐 터. 어서 내보아라.”

“어허! 무엄하다. 양반이라고 밝혔음에도 그 무슨 말 버릇이냐.”

“좋다. 그렇다면 양반인 증거를 보여라.”

호패를 보이지 않고서는 양반이란 걸 증명할 방법이 없는데 무슨 수로 나졸들을 납득시킬 것인지 고민되었다.

마침 작은 등짐에 지필묵이 들었기에 그걸 꺼내들었다.

나졸들은 도대체 뭘 하려고 지필묵을 꺼냈는지 의아하다는 표정이었다.

상민들 중에도 간혹 글을 익힌 자가 있기는 하지만, 글은 양반들의 전유물이나 같은 것.

글을 안다는 건 곧 양반이라는 뜻이다.

해인은 논어의 학이편에 나오는 구절을 단숨에 써 내렸다.

‘인부자이불온 불역군자호’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서운해 하지 않는다면 능히 군자라 할 것’이라는 뜻이다.

양반임을 알아보지 못하는 나졸들의 행사를 크게 문제 삼지 않겠다는 말인즉.

“이 글을 군수께 갖다드려라. 그러면 버선발로 뛰어나올 것이다.”

“글을 안다고 전부 양반이라더냐?”

“참으로 답답할 노릇이군. 직접 글을 써줘도 양반임을 의심한다면 이것으로도 못 믿겠는가?”

해인이 평상 아래에 놓인 미투리를 내보였다.

삼베가 들어간 미투리는 질기고 튼튼하기도 하지만 짚신보다 품이 더 들어간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짚신을 신고 다니는 걸 감안하면 미투리나 가죽신은 사대부 집안이나 재물이 많은 상인들이 주로 신는다.

곁눈질로 미투리를 슬쩍 쳐다본 나졸들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상민이 양반을 사칭할 리도 없거니와 여러 정황상으로도 양반일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나졸 중 하나가 쭈뼛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이제까지와는 달리 공대로.

“양반이라고 하더라도 호패를 갖고 다니지 않은 죄는 없어지지는 않소.”

“이보게. 산속에서 잃어버린 호패를 경황이 없어서 미처 만들 생각을 못했네. 내일이라도 동헌에 들러 군수께 임시호패를 만들어달라고 할 것이네. 그리고 그대들이 관내순찰을 철저히 하고 있다는 것도 알려서 후하게 상을 내리라고 하겠네.”

군수에게 자신들을 칭찬해주겠다는데 뭐라고 할 것인가.

“자! 그렇게 서 있을 게 아니라 이리 앉게나. 내가 탁주와 돼지고기를 사겠네.”

“이러시면 곤란하오. 사사로이 접대를 받으면 경을 치오이다.”

“뭘 그런 걸 걱정하나. 내가 군수께 잘 말씀드린다니까. 그대들이 수고를 하는 것에 비하면 너무 약소한 대접일세.”

해인이 억지로 주저앉히자 나졸들은 못이기는 체하며 평상에 엉덩이를 걸쳤다.

양반이 사주는 탁주와 돼지고기까지 얻어먹는데 당장 관아로 가자는 것도 멋쩍을 터.

내일 관아로 들린다는 약조를 어길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헌앙한 얼굴과 허우대하며, 술과 고기를 내는데 인색하지 않는 걸 보면 분명 재물이 많은 사대부집 자제일 것이다.

나졸들에게 술과 고기를 먹이고 동헌으로 돌려보낸 후 봉놋방에서 두 시진 가량 쪽잠을 잔 해인은 새벽에 고성군으로 출발했다.

만약 고성군의 사정도 통천과 다를 바 없다면 이는 관찰사와 수령들이 무슨 일을 꾸미는 게 틀림없음이다.

그동안 해인 일행을 습격했다는 것부터가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었고.

아마 지금쯤 한성에서도 허인회의 장계를 보고 난리가 났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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