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심부름꾼 (4)
034화 수상한 심부름꾼 (4)
산자락을 휘돌 때쯤 이상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지게에 가마니를 가득 실은 행렬이 멀리 보였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게 지금은 이른 아침이었던 것이다.
추수를 했으면 고을로 들어가야지 왜 인적 없는 산 쪽으로 오겠는가.
그리고 지게를 지고 가는 장정들의 행색 또한 수상했다.
처음에는 산적 무리들이 곡식을 탈취해 가져가는 줄 알았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산적 무리는 아닌 것 같았다.
산적들이라면 각양각색의 옷차림에 병장기를 들고 있는 게 일반적인데 저들은 흔히 볼 수 있는 농투성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하나같이 허우대 좋은 장정이라는 데 있었다.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어 보였기에 은밀히 그들의 뒤를 따랐다.
한 시진쯤 뒤를 따랐을 때였다.
산기슭에 멈춰 선 장정들이 잠시 숨을 골랐다.
또 다시 움직이는 수상한 행렬을 따라 한참 산을 오른 끝에 도착한 곳에는 놀랄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곳은 제법 너른 분지였는데 줄잡아도 이백여 명이 넘는 장정들이 군사 조련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분지 가장자리에는 통나무 외벽에 짚으로 지붕을 얹은 가옥들이 즐비했다.
창고로 쓰임 직한 커다란 것뿐만 아니라 방문이 대여섯 개씩 달린 가옥들이었다.
한 가옥당 수십 명은 기거할 수 있는 구조였다.
몸을 숨기고 분지를 살피고 있을 때 통나무 가옥 중 가장 번듯하게 지은 곳에서 중년인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중년인이 나오자 장정들을 조련하던 자 중 하나가 부리나케 쫓아가더니 고개를 꾸벅 숙였다.
중년인이 뭐라고 지시하자 조련을 받던 장정들은 일제히 산 아래로 내려갔다.
산 아래에 있는 곡식 가마니를 옮기려는 것이리라.
이것으로 평강과 통천, 고성의 수령들이 무슨 일을 벌이는지 명확하게 파악되었다.
사사로이 사병을 키우고 있다면 역모를 꾸미는 게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문제는 이런 산채가 과연 이곳에만 있는가이다.
더 있어 본들 알아낼 것도 없기에 해인은 서둘러 회양 만호진으로 발길을 돌렸다.
* * *
단숨에 회양 만호진으로 달려온 해인은 허인회와 심 만호에게 고성 근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실을 고했다.
“무엇이? 금강산 인근에서 사병을 키우고 있었단 말인가?”
“예. 영감.”
“최 교위. 이백여 명이나 되는 인원이 군사 조련을 받고 있다고 했는가?”
“예. 만호 나리.”
해인의 대답에 둘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사병을 키우고 있는 주체가 누군지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런 산채가 은밀한 곳에 있다는 것과 또 다른 곳에도 더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심 만호. 평강 현감과 통천과 고성 군수가 어느 붕당에 속해 있는지 아시오?”
“동인 일파라고 들었습니다만···. 혹시 영감께서는 동인들이 또 역모를 꾸민다고 보시는 겝니까?”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드는구려.”
조선의 선비들이 파당을 이뤄 반목한 지는 오래되었다.
지금의 주상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신료들을 부추긴 면도 있었지만.
이십 년 전의 사달도 정철을 비롯한 서인들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정여립이 모반을 꾀하고 있다고 고변하여 정여립이 스스로 목을 매고 죽은 일이 있었다.
그때 서인들은 정여립이 모반을 인정했기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라며 이발, 백유양 등의 동인들을 숙청했는데 그 인원이 무려 천여 명에 이르렀다.
허인회는 그때의 원한을 잊지 않은 동인들이 사병을 키우는 게 아닌가 보고 있었다.
“소관이 알기로는 정여립의 역모 사건도 나중에는 아닌 것으로···.”
불현듯 그 당시 역모로 몰려 모진 고신을 받다가 유명을 달리한 생부가 생각났다.
당쟁으로 누군가를 모함하고 나중에 아닌 것으로 밝혀지는 일이 한두 번이었겠는가만.
나중에 복권이 되면 뭘 하겠는가.
이미 가문은 풍비박산 난 이후인 것을.
이 대목에서 생부의 억울함이 가슴에 약간 와닿았다.
사고무친으로 자랄 수밖에 없는 처지로 만든 누군가가 못내 원망스럽기도 했고.
복수를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으나 생부에게 누명을 씌운 주상이나 거기에 동조한 신료들에게 좋은 감정일 수는 없었다.
만약 생부가 힘이 있었다면 그렇게 곱게 당하지는 않았을 터인데···.
억울함을 모면하기 위해 저항이라도 했을 게 아닌가.
“아닐세. 실제로 정여립이 사병을 키워 한성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가 발각된 일일세. 물론 정여립의 일을 계기로 서인들이 동인들을 너무 몰아세운 게 문제였지만.”
허인회는 서인이나 동인에 속하지 않은 터라 객관적인 시각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 희생되었던 사람들의 식솔들이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허인회도 잘 몰랐다.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자신의 호위무관도 그때의 일로 조실부모하고 20년을 절에서 자랐었다.
물론 파당에 엮인 건 아니지만 바른 소리를 하다 주상에게 찍힌 것이니 그게 그거다.
“영감.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우리라도 놈들의 거점을 토벌해야 하지 않겠소이까?”
“만호진의 군사들로만 말이오?”
“저들의 병력이 비록 이백여 명이라고는 하나 다들 오합지졸들일 것이오. 그러니 충분히 승산이 있소이다.”
심종현은 만호진의 군사들과 엇비슷한 숫자라니까 만만히 여기는 것 같았다.
“만호 나리. 제가 본 바에 의하면 제법 조련된 병력이었습니다. 결코 오합지졸들이 아닙니다.”
“최 교위. 우리 만호진 군사들이 비록 삼백여 명에 불과하나 한성의 용양위도 부럽지 않을 정예이네. 일당백이란 말일세.”
“저는 타초경사가 아닐까 염려하는 것입니다. 그런 산채가 거기 하나뿐이라면 모를까···.”
금강산 산채가 토벌되면 혹시 더 있을지도 모르는 나머지 산채들이 흔적을 지울 수도 있기에 하는 말이다.
“이 일대에 다른 산채가 더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네. 물산이 흔하지 않고 사람도 적은 곳이네. 이백여 명 정도의 병력을 유지하려면 얼마나 엄청난 재물이 들어가는지 아는가? 여러 수령들이 힘을 합쳤다고는 하나 그 정도 인원을 먹이고 재우는 것만도 대단한 일일세. 회양 만호진을 유지하기 위해 들어가는 재물을 따져보면 자네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하네.”
만호 심종현은 회양 만호진의 병력을 유지하기 위해 들어가는 곡식과 의복, 병장기 등을 조목조목 들먹였다.
듣고 보니 그 정도의 병력을 유지하는 것도 대단하긴 하지만, 역모를 획책하는 세력이 병력을 겨우 이백여 명만 키우겠는가.
금강산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도 그 정도의 병력을 육성할 수도 있음이다.
그러나 당장 금강산 산채의 존재를 알면서도 마냥 주상의 교지만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미 수상한 무리를 발견했으면 뭔가 조치를 취해야 정상이다.
당상관인 어사가 있고 만호진 병력이 있는데 그냥 손 놓고 있다가는 오히려 역풍을 맞는다.
“심 만호. 어찌 그리 확신하는 게요. 사람이야 다른 곳에서 데려올 수도 있지 않소.”
“영감. 낯선 무리들이 여기저기에서 준동했다면 각 지역의 만호진이나 관아의 나졸들 눈에 띄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제껏 그런 자들을 봤다는 얘기는 없었소이다. 그렇다면 금강산 산채의 사람들은 외지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금강산의 산채 인원도 최대한 긁어모은 인원이라는 뜻이었다.
“강원도 북부 쪽 말고도 얼마든지 그런 산채가 있을 수도 있잖소. 가령 원주나 강릉 같은 곳 말이오.”
“그렇기도 하겠지만 저희들이 관여할 지역은 아니잖소이까. 당장 수상한 무리가 도사리고 있는 금강산 산채를 발견했으니 그곳부터 토포하는 게 순서올시다. 만약 내일이라도 금강산 산채를 다른 곳으로 옮긴다면 어찌하려고 그러시오. 충분히 토벌할 수 있었는데 뭉그적거렸다는 말이 나올 일이오이다.”
“만호진 병력만으로 산채를 토벌할 자신이 있는 게요?”
“예. 영감. 그동안 회양 만호진이 놀고 있지 않았다는 걸 보여 드리지요.”
이 정도 자신감이면 만호진 군졸들의 조련 상태가 최상이라는 뜻이다.
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최 교위가 우릴 도와준다면 더 쉬운 싸움이 될 것이외다.”
허인회는 잠시 망설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최 교위가 돕는다면 한결 토포가 쉬워질 것이기에.
당장이라도 산채에 있는 병력이 어디로 움직일지도 모르는데 장계를 올리고 교지가 내려올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었다.
지금이야말로 선참후계를 행사할 때였다.
형조 참의를 지낸 어사가 그 정도의 판단을 못 내려서야 말이 되는가.
* * *
다음 날 만호진의 군졸들이 삼삼오오 주둔지를 빠져나갔다.
경비 인력을 제외한 이백오십여 군졸이 만호진을 빠져나가기까지는 두 시진이나 걸렸다.
허인회 일행이 회양 만호진으로 객사를 옮긴 후부터 평강 현감이 동정을 살피고 있을 것이기에 한꺼번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집결지는 통천에서 고성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로 정했다.
고성 고갯마루에 이백 오십여 군졸들이 모두 집결했을 때에는 땅거미가 질 무렵이었다.
만호 심종현은 장교들과 잠시 숙의하더니 해인을 불렀다.
“최 교위. 이곳에서 산채까지는 얼마나 걸리겠나?”
“한 시진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은 이곳에서 노숙하고 내일 새벽에 산채를 급습하는 게 나을 것 같네. 최 교위 생각은 어떤가.”
만호쯤 되는 무관이라면 대규모 병력을 자주 동원했을 것이기에 다른 의견을 개진할 것도 없었다.
경험도 없고 아랫사람인 자신에게 의견을 묻는 게 오히려 송구할 정도였다.
아마 어사의 호위무관이기에 체면상 의견을 묻는 것일 터.
“소관이 보기에도 새벽에 급습하는 게 옳을 것 같습니다.”
만호진을 빠져나오는 데 시간이 지체되어 오늘 급습하려는 계획에 차질을 빚었지만, 한편으로는 다들 잠들어 있는 새벽에 급습하는 게 상책이긴 했다.
“그래서 말인데 최 교위와 본관이 앞장서는 게 어떨까 싶네.”
심종현은 이런 일이 벌어진 게 무척 흥분되는지 직접 나서겠다고 했다.
지금도 틈만 나면 수련하는 터라 몸이 근질근질한 모양이다.
“나리께서 직접 나서는 건 아무래도···. 이번 일이 마무리되고 난 후 나리께 배움을 청할 것이오니 나리께서는 후방에서 지원해 주십시오.”
“아니네. 군졸들의 희생을 줄이려면 내가 나서는 게 최선일세.”
심종현은 수상한 무리들이 사병을 조련시키고 있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온몸에 피가 끓어올랐다.
무료하던 차에 어사 일행이 나타나 긴장감을 불어넣어 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인데, 거기에 더해 환도까지 들게 되었으니 어찌 흥분되지 않겠는가.
그러려면 뒷전에 있을 게 아니라 당연히 선두에서 진두지휘해야 직성이 풀린다.
“나리께서 그리하시겠다면 소관이 감히 무어라 말씀드리겠습니까만. 병력 전체를 지휘하셔야 하는 나리께서···.”
“아닐세. 내가 앞장서려는 이유는 또 있네. 사병을 조련하고 있다면 우두머리는 필시 무관 출신인 가능성이 많네. 혹여 나와 안면이 있는 자일 수도 있다는 말일세. 그렇다면 굳이 피를 보지 않고도 해결할 수 있지 않겠나.”
자신들의 비밀이 탄로 났는데 과연 대화로 풀 수 있을까 싶었다.
“비밀리에 사병을 양성할 정도라면 이미 다른 뜻을 품고 있다는 증좌가 아니겠습니까. 그런 자가 과연 나리와 말을 섞으려고 하겠습니까?”
“말을 섞든 아니든 무슨 상관인가. 내가 아는 자라면 그의 능력을 대충 짐작할 수 있으니까 토포가 더 쉬워지겠지.”
“아! 그렇기도 하겠습니다.”
심종현은 해인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짚었다.
비밀리에 사병을 키울 정도라면 이미 조직이 갖춰졌을 것이고, 무관 출신도 당연히 있다고 봐야 한다.
그동안의 역모 사건으로 억울한 일을 당한 벼슬아치가 어디 한둘이던가.
특히 이름깨나 날리던 무관이 연루되었다면 의심 많은 금상이 곱게 놔뒀을 리가 없다.
그렇게 내쳐진 무관들이라면 심종현과 안면이 있을 가능성이 많았다.
“어쩌면 내일 피를 묻혀야 할지도 모르겠네. 최 교위도 마음을 단단히 가지게나.”
“예. 나리. 소관은 그저 주어진 임무에만 충실하겠습니다.”
수상한 무리가 군사 조련을 받고 있다면 볼 것 없이 역모를 도모하는 것이고, 어사의 명에 따라 그들을 토포하는 건 호위무관으로서 당연한 일이다.
다만, 천지 분간 못 하고 부나방처럼 뛰어드는 장정들을 베야 한다는 점인데, 애꿎은 장정들을 상대로 검을 휘둘러야 한다는 게 곤혹스러웠다.
해인은 그 부분이 마음에 걸렸기에 우두머리를 먼저 제압할 생각이었다.
우두머리만 제거하고 나면 나머지는 지리멸렬할 것이므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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