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심부름꾼 (5)
035화 수상한 심부름꾼 (5)
이른 저녁을 먹고 바로 잠자리에 든 만호진 군졸들은 자시(子時)가 되자 일제히 길을 나섰다.
수상한 산채가 있는 산자락에 도착했을 때는 축시(丑時) 말 즈음이었다.
해인과 심종현은 만호진 장교들만 대동하고 산채가 있는 쪽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은밀히 사병을 양성하는 곳이라 불침번을 세웠을 것이기에 발걸음은 무척 조심스러웠다.
예측했던 대로 산채 근처에는 두 곳이나 불침번을 세워 두었다.
다행히 경계를 서는 자들이 나무에 기대어 졸고 있었기에 들키지 않고 제압할 수 있었다.
소수의 인원만으로 접근했기에 망정이지 만호진 군졸들을 모두 동원했다면 필시 들켰을 거였다.
이들의 기강이 그리 대단치는 않거나 외부인의 접근이 아예 없는 곳이기에 불침번은 그저 시늉만으로 세워 둔 모양이다.
졸고 있는 불침번들의 목덜미를 쳐 기절시킨 후 장교들은 흩어져 있는 통나무집을 지키도록 했다.
산채의 장정들이 군사 조련을 받는다고는 하지만 만호진 장교들의 무예를 감당할 정도는 아닐 것이므로.
그런 후 해인과 심종현은 우두머리의 통나무집 근처로 거침없이 접근했다.
우두머리가 나왔던 통나무집에는 코 고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안의 동정을 살핀 결과 세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고르게 숨을 쉬는 자 하나에 가볍게 코를 고는 자가 둘이었다.
나무문을 살짝 당기자 약간의 소음과 함께 쉽게 열렸다.
문에 빗장을 하지 않았다는 건 그만큼 이곳이 안전하기에 그럴 것이다.
해인과 심 만호가 방 안으로 들어섰을 때, 두 명이 누워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휘장이 쳐진 안쪽에서 움직이는 기척이 들렸다.
서늘한 새벽 공기가 문을 통해 들어왔기에 감각이 있는 자라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을 터.
휘장 안쪽에 있는 자가 우두머리일 것이다.
해인은 몸을 훌쩍 날려 거침없이 휘장을 벗겨 내었다.
어두운 가운데서도 오연히 서 있는 장년인이 눈에 들어왔다.
막 잠에서 깨어난 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안정된 자세였다.
이런 자라면 결코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다.
해인이 환도를 겨누었음에도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뒤쪽에서 심종현이 두 명의 사내를 제압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그래도 사내는 흔들림이 없었다.
서로를 분간하지 못할 만큼 어두웠으나 경지에 오른 이들이라면 서로의 움직임은 감지할 수 있다.
해인 또한 한치의 흔들림이 없자 사내가 입을 열었다.
“기운을 보니 만호진의 인물은 아니군. 누군가?”
해인이 만호진의 군관이 아니라는 걸 바로 안다는 건 이들은 회양 만호진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아니면 해인이 흘리는 기운이 워낙 날카로웠기에 그리 생각할 수도.
“한성에서 온 토포사다.”
“한성? 토포사? 말이 되지 않는군. 이곳은 누구도 알 수 없는 곳인데......토포사를 사칭하다니 웃기는군.”
귀신도 모를 일을 한성에서 알고 있다니까 어이가 없는지 말이 토막되어 나왔다.
어떤 목적으로 산채를 꾸렸다면 극소수만 알고 있어야 하는 게 맞다.
이곳도 해인이 새벽 같이 움직였기에 우연찮게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네 동료들이 이미 검거되었다.”
동료들이 검거되었다가 하자 사내가 움찔했다.
아마 청천벽력 같은 얘기일 것이다.
그와 동시에 사내는 채광을 위해 만들어 둔 나무 창문으로 몸을 날렸다.
해인도 바로 몸을 날려 밖으로 나왔다.
따라 나온 해인을 일별한 장한은 품에서 단도를 꺼내 들었다.
오연히 서 있는 사내가 풍기는 기세가 예사롭지 않았다.
죽음을 각오한 자세였다.
연관된 사람들이 이미 검거되었는데 혼자 살아남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비밀리에 운영되던 산채에 토포군이 들이닥쳤으니 그리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터.
해인은 심적인 압박을 주기 위해 이미 상황이 끝난 것처럼 말했다.
“네 동료들은 지금 한성으로 압송 중이다. 그러니 순순히 오라를 받으라.”
“으흠···!”
신음을 뱉은 사내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지만 이내 신색이 안정되었다.
그러더니 단검을 고쳐 잡았다.
곱게 무릎을 꿇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대로 잡힌다면 모진 고신을 받는 것은 물론 종국에는 망나니의 칼에 목이 베일뿐이다.
“차라리 이 자리에서 나를 죽여라.”
“국법이 지엄한데 어찌 함부로 목숨을 취할까.”
“국법? 썩은 조정 신료들과 왕권 강화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주상이 만든 것도 국법이라고 하느냐?”
“······?”
“보아하니 이제 갓 무관 벼슬을 한 것 같은데 주상에게 충성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백성들이 굶어 죽든 말든 나 몰라라 하는 주상은 이미 백성의 어버이가 아니다”
“잔말이 많다. 본관은 그저 명령을 이행할 뿐이다.”
“능력이 된다면 망설이지 말고 어서 죽여라.”
찰나지만 여러 생각이 지나갔다.
사내의 말이 뭘 뜻하는지 대충 짐작이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주상과는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말한 사내의 흔들림 없는 자세에서 결연한 의지가 엿보였다.
해인이 약간 망설임을 보이자 사내는 전광석화와 같이 단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살기가 없는 한 수였다.
공격을 위한 칼부림이 아닌 몸을 빼기 위한 위협이었던 것이다.
당장 제압할 수 있었음에도 해인은 몸을 비틀어 피했다.
이 상황에서 불현듯 생부가 예전에 처했던 상황이 생각나는 건 무엇인지.
* * *
산채를 벗어난 우두머리 사내를 한 식경가량 쫓아갔다.
사내의 발걸음은 무척 빨랐지만 해인이 그를 따라잡는 건 여반장이었다.
보개산을 평지처럼 넘나들던 해인의 발걸음을 따를 자는 조선에 그리 많지 않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따르자 사내가 걸음을 멈추더니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
“나를 바로 제압할 수 있었는데 굳이 여기까지 쫓아온 이유가 뭔가?”
“······.”
“왜 내게 도망갈 틈을 주는 건가?”
틈을 준 이유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신념을 굽힐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자를 제압하여 한성으로 압송한들 조정에 피바람만 몰아칠 뿐이다.
주상은 주상대로 신료들을 엮으려 들 것이고 신료들은 파당의 이익을 위해 움직일 것이니까.
개인적인 원한도 없거니와 왜 이런 무모한 짓을 벌이는지 궁금했기에 바로 제압하지 않고 이곳까지 사내를 따라온 것이다.
자신의 호기심으로 인해 놓친다 해도 그리 아쉽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고.
사내의 무예가 남다르다는 걸 만호나 장교들도 지켜봤으니까 오해 살 일도 없다.
그동안 이들 조직으로부터 암습받은 걸 생각하면 물고를 내야겠지만 암습자들의 목숨을 취한 것으로 빚을 갚은 셈이었다.
“왜 이리 무모한 짓을 하는지 궁금해서 따라왔소.”
“······?”
사내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토포사라면 당장 제압하여 오라를 지어야지 이런 질문을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명에 따라 나를 제압하면 그만일 터. 사병을 양성하는 이유를 말해 본들 그대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호기심이 동했소. 미관말직이라 억울함을 바로잡지는 못하지만 합당한 이유가 있다면 댁을 놓아줄 수도 있소이다.”
사내는 해인의 말에 어이가 없는지 허탈하게 웃었다.
“허허허···. 토포사가 왜?”
“소관은 토포사가 아니오.”
“토포사도 아닌데 만호진 병사들을 이끌고 왔다고?”
토포사가 아니라고 하자 사내의 표정은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그럼. 함경도로 향하는 어사 일행인가?”
어사 일행이라고 넘겨짚은 걸 보니 암습자와 관계가 있으리라.
굳이 숨길 것도 없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댁들이 그렇게 기를 쓰고 죽이려 한 어사 일행이오. 소관은 어사의 호위무관이고.”
“그게 무슨 말인가? 어사 일행을 죽이려 했다니. 우리는 대의를 위해 일어난 것뿐이네.”
당장 죽음이 코앞에 다가온 몸임에도 펄쩍 뛰며 부정하는 걸 보니 이들이 한 짓이 아닌가도 싶었다.
사내의 반응에 은근히 맥이 빠졌다.
“정말 그대들의 소행이 아니라는 말씀이오?”
“우리가 왜 어사 일행을 죽인다는 말인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애꿎은 우리를 의심하는 겐가.”
“평강 현감 등의 비리를 감추려고 생면부지의 목숨을 끊으려 한 게 아니었소?”
“조선에서 지방 수령이 자신의 비리가 드러날까 두려워 어사를 죽인다고?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네. 그 정도 강단이 있는 인물이라면 지방관 노릇을 하겠는가. 차라리 나라를 세운다고 나서지.”
“······.”
가타부타 대답이 없자 사내는 해인을 똑바로 바라보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통천 군수과 고성 군수는 몸이 많이 상했는가?”
“그들은 아직 그 자리에 있소이다.”
말을 번복하자 사내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 보였다.
그리고 말투도 한층 부드러워졌다.
“우리 산채가 첫 번째 목표였던가?”
“그렇소. 자! 왜 사병을 양성하고 있었는지 이유나 들어 봅시다.”
“우리가 사병을 양성한 이유는 왜구를 막기 위함이었네.”
왜구가 수시로 조선 해변가를 유린하는 게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그동안 주로 남쪽 지방을 유린했지 강원도 해변까지 접근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만약 강원도까지 올라왔다면 만호진에 알리면 얼마든지 대처할 수 있는 일이다.
그걸 무시하고 비밀리에 사병을 양성한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았다.
“왜구라면 관찰사나 만호에게 고하면 될 일이 아니오. 그런 길을 마다하고 몇몇 수령들이 힘을 모아 사병을 양성한다면 그걸 누가 믿겠소.”
“믿거나 말거나지. 왜구가 곧 큰일을 벌일 것이라는 조짐이 곳곳에서 감지됨에도 조정에서는 손 놓고 있잖은가. 만약 왜구가 쳐들어오면 지금의 조선 병력으로 막아낼 수 있다고 보는가? 그래서 뜻 있는 수령들끼리 자구책을 마련한 것이네. 주상이나 조정 신료들은 사사로이 사병을 키운다고 역모로 몰아세우겠지만.”
오위도총부도 멀쩡히 잘 돌아가고 각지의 병마절도사나 만호진도 제 역할을 하고 있는데 무슨 망발인지 모르겠다.
무과 시험에 구름같이 몰려드는 장정만 봐도 외적의 침입이 있다면 누구나 떨쳐 일어날 거였다.
그걸 부정한다면 이들은 필시 다른 뜻을 품고 있음이다.
“강원도 일대에 왜구가 출몰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소. 빙빙 돌리지 말고 사병을 키우는 진정을 말하시오.”
이런다고 속내를 털어놓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만, 사내의 눈빛 때문에라도 얘기를 더 듣고 싶었다.
“대규모의 왜구가 쳐들어올 징조가 보이는데 조정에서는 그럴 리가 없다고 무시하고 있어서 문제일세.”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리 주장하는 게요?”
“왜구의 간자들이 몇 년째 조선 산하를 헤집고 다니는 걸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네. 우리가 잡은 간자들이 몇 놈인 줄 아는가?”
“아···!”
알고 보니 보개산 자락에서 만난 왜구들이 바로 간자들이었던 모양이다.
천지 분간을 못 할 때였기에 신기한 물건을 얻은 게 어디냐고 만족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 그러나?”
“소관이 무과에 급제하기 전에 왜구들을 만난 적이 있소이다.”
“어디에서?”
“철원 도호부의 보개산 자락이오. 그곳에서 왜구 셋을 만나 겨루었소.”
“그래서 어찌 되었나?”
“놈들을 제압하고 몇 가지 물품을 뺏은 적이 있소이다.”
“홀로 세 명의 인자들을 제압했단 말인가?”
“조금 날래기는 했지만 어렵지 않게 제압하였소.”
왜구의 간자들을 홀로 물리쳤다니까 사내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쉽게 상대할 상대가 아닌데 어찌···. 그 지독한 놈들을 홀로 제압했다니 참으로 대단한 무예를 익혔구먼.”
“그런데 인자가 무슨 뜻이오?”
“우리는 왜구의 간자들을 인자라고 부르네. 왜 말로는 닌자라고 하더군. 대단한 무예를 익힌 놈들이지.”
“그런 자들이 왜 조선에서 암약하는 것이오?”
“왜구들이 노략질로도 모자라 조선을 넘보려는 수작이 아니겠나. 그런데 조정에서는 왜구들을 업신여기고 무시하고 있으니 문제일세. 왜구들이 작정하고 침범한다면 지금의 병력으로 막아낼 수 있을지 걱정이네.”
“······.”
“조만간 조선 땅에서 큰일이 벌어질 것이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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